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8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87화(487/1105)
487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5)
“그, 그게···.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베일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죄 없는 파르페를 스푼으로 푹푹 찔러댔다.
그 행동은 흡사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어서, 직접 쥐구멍을 파내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째서 유지스는 ‘그자’를 계속 ‘그 사람’이라 부르는 겁니까?”
한동안 조용하던 세르펜스가 유지스 쪽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먹는 데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안 듣고 있는 줄 알았더니. 질문의 내용으로 보아, 파르페를 먹는 와중에도 경청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저도 아까부터 그게 궁금했습니다.”
나도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세르펜스의 의문에 동조했다.
세르펜스가 챈들러를 ‘그자’와 같은 대명사나 ‘첫째 공자’ 따위로 부르는 건, 대수로울 것 하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유지스가 그러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설마 세르펜스에게 옮은 건가?’
정말 그런 거라면 세르펜스의 보호자로서 책임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나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스푼을 입에 문 채, 유지스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세라투 자작은 악인이라서 상관없지만, ‘그 사람’은 세라투 자작으로 인해 긴 시간 고통받아온 피해자잖아요. ‘그 사람’이 마인에게 속고 있는 건지, 그렇지 않은지.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악마 숭배 세력과 엮인 이상···. 이대로 두면 큰 죄를 짓게 될 공산이 커요. 아니, 어떻게 보면 이미 저질렀다고도 할 수 있겠죠. 윈스톤 님이 받은 편지를 보낸 게, ‘그 사람’이 맞는다면 말이에요. 그래서···.”
유지스는 시선을 어디 한군데에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다가,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끝에 가서 흐지부지 말을 흐렸지만, 유지스의 마음은 제대로 전달되었다.
윈스톤이 받은 편지에는 에인젤 주교를 모욕하는 내용이 가득 적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에인젤 주교를 죽여야 한다며 부추기기까지 했다.
성직자들 사이를 이간질한 거로도 모자라, 주교를 죽이려 계획했으니. 이 정도면 이단이라 불려도 손색없는 죄목이다.
그래서 챈들러를 단죄해야 하는데 그의 과거가 안타까워서,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려고 해서.
유지스는 심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애쓰고 있었던 거다.
‘어쩌면, [성검의 주인] 속 유지스가 어느 순간부터 은인에 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던 건···. 은인이 죽었다는 생각에 체념한 것이 아니라, 세르펜스가 그 은인이라는 걸 눈치채 버려서가 아닐까? 그래서 마음속 깊이 묻어두려고···.’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떨쳐냈다.
지금의 유지스가 챈들러와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것만으로, [성검의 주인]에 등장했던 유지스의 속마음까지 어림짐작하다니.
내가 떠올린 생각이라지만, 비약이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다.
그냥 잠자코 파르페나 먹어야겠다.
“그런데 우리 이거 다 먹고 나면 뭐 하죠? 원래 오후에는 마인의 거처를 찾으려 했는데, 벌써 찾아버렸잖아요.”
유지스가 짐짓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어두워질까 봐, 일부러 저러는 걸 테다.
그런 유지스의 마음을 알았는지, 세르펜스는 그녀가 챈들러를 ‘그 사람’이라고 부른 것에 대해, 일언반구조차 없이 그냥 넘어갔다.
“우선···. 베네볼렌 씨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저요?!”
세르펜스의 갑작스러운 부름에 ‘그 아이도 좋아할 맛인데···.’ 하고 중얼거리며, 파르페를 퍼먹던 에드나가 화들짝 놀라서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치 수업 시간에 딴짓하다가, 교과서 지문을 읽어보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당황하는 학생 같은 반응이다.
“혹시 베네볼렌 씨와 프루이토 씨. 두 분께서만 사용하시는 암호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우체국을 지나쳤을 때, 화단에 처음 보는 문자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만약 교단에서 보내준 지원군이 성검 일행이라면, 두 분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를 쓰지 않았을까 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세르펜스의 대답에 에드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니마와 헤어질 땐 단호하게 굴었지만, 에드나도 아니마를 아끼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오랜만에 아니마와 만날 생각에 들뜬 모양이다.
세르펜스는 내내 쥐고 있던 스푼을 파르페에 푹 꽂아 놓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어 알 수 없는 문자를 적었다.
에드나는 세르펜스가 써 내려가는 글을 가만히 보다가, 반색했다.
“맞아요, 이 문자! 저랑 아니마가 어렸을 때, 재미 삼아 만든 거예요! 그나저나 이걸 한 번 보고 외우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으음···. 저희가 그 앞에서 너무 오래 머물면 누군가 화단을 살펴볼 것 같아서, 대충 보고 기억해 두긴 했는데···. 모르는 문자라서 맞게 옮겨 적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르펜스는 에드나의 칭찬에도 자신 없다는 투로 말하며 종이를 내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르펜스의 장점으로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것도 짚어줄 걸 그랬다.
‘장점이 너무 많으니까, 장점이라고 알려주는 것도 힘드네.’
그나저나 암호를 재미로 만들었다니, 에드나와 아니마도 참 대단하다.
예전에 인형 놀이 마법 얘기를 들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놀이 스케일이 남다르다.
혹시 마법사들은 원래 다 이런 걸까?
내가 살던 세상에는 마법사가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네. 우체국 뒷길로 들어가서 열다섯 걸음째 되는 곳을 파 보라는데요?”
화단에 긴 문장을 써놓을 수는 없으니, 다른 곳에 약도라도 그려서 숨겨놓았나 보다.
“그나저나 편지를 보낸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도착했네요? 세라투 령 근처에서 머물고 있었나 봐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유지스의 목소리에도 반가운 기색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에 대답하는 세르펜스의 목소리는 대외펜스 연기 톤이었다.
‘그러고 보니, 휴마누스가 다음에 만날 땐 이름으로 불러 달라고 했었지?’
아무래도 휴마누스를 이름으로 부를 생각에 부담스러워서 저러나 보다.
세르펜스는 10년도 넘게 휴마누스를 ‘황태자 전하’라 불러왔다. 그 호칭을 한순간에 바꾸려니, 괜히 어색하고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 만도 하다.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실실 웃고 있자, 세르펜스가 발로 내 신발 옆면을 가볍게 툭 쳤다.
웃지 말라고 그런 것 같은데, 녀석이 민망해하는 게 느껴져서 더 웃음이 났다.
느닷없이 낄낄거리는 내가 이상해 보였는지, 맞은 편에 앉은 베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시온과 유지스, 베네볼렌 씨. 세 분께서는 성검 일행을 찾아 이곳으로 데려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윈스톤 경과 저하께서는 오전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며 ‘침입자’에 관해 조사하는 척하다가, 이곳으로 몰래 돌아와 주십시오.”
“세르펜스는요?”
“저는 마인의 거처로 가 볼 생각입니다.”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다시 파르페를 떠먹으며 여상하게 대답했다.
유지스에게는 정령을 돌려보내라고 했던 주제에, 자기는 직접 가서 살펴보고 오겠다니.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제 목표는 마인이 아니라, 첫째 공자를 미행하는 자들입니다.”
세르펜스가 눈동자를 굴려, 좌우에 앉은 나와 유지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유지스도 나와 같은 타이밍에 세르펜스를 노려보았나 보다.
내 기준에서는 마인 근처에 간다는 건 매한가지니까, 이거나 저거나 그게 그거로 느껴졌다.
하지만 아이의 말을 도중에 끊고 무작정 안된다고 말하는 건, 아이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지름길이다.
나는 일단 계속 얘기해 보라는 뜻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흠, 흠! 아무튼···. 조금 전 유지스는 그자들이 건물 가까이 다가갔다고 하셨잖습니까? 저는 그자들이 세라투 자작에게 돌아가는 도중에···. 이곳으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세르펜스는 굉장히 평화로운 표현을 사용했으나, 데려온다기보다는 납치에 가까운 과정이 동반될 게 분명하다.
“아! 그렇게 하면 세라투 자작은 악마 숭배 세력이 자신의 부하들을 죽였다고 생각하겠네요?”
유지스가 짝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그 말 속에는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납치해 온 놈들을 가둬 놓겠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윗사람의 명령 때문에 악숭 세력과 엮이는 불쌍한 사람들을 구해내서, 보호한다고 생각하자.’
어쨌거나 세르펜스가 제시한 방법은 상당히 괜찮았다.
챈들러와 마인이 나눈 대화 내용을 알 수 있으면서, 세라투 자작이 악숭 세력과 접촉하는 것도 막을 수 있으니까.
“좋은 방법이긴 한데···.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도 크게 지장 없으니까, 무리하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그냥 와요. 어차피 휴마누스도 왔겠다, 마인에 관한 건 그쪽에 맡겨도 되잖아요?”
“예, 알겠습니다.”
내 말에 세르펜스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 * *
“잠깐! 이대로 다 같이 뭉쳐 다니는 건 효율이 떨어집니다.”
“동의해요. 이럴 게 아니라, 둘씩 나눠서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주···, 아니. 헤세드 님을 모시는 건 접니다.”
나와 유지스와 세르펜스는 여관을 나오자마자, 연기를 시작했다.
상황으로 보아 세르펜스가 언급한 ‘헤세드’는 나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에서 튀어나온 가명인지 모르겠다.
‘설마 에인젤 주교의 세례명인가? 어째서 나도 모르는 에인젤 주교의 세례명을 세르펜스가 알고 있는 거지?’
가장 가능성이 큰 건, ‘H’로 시작하는 단어 중 녀석이 내키는 단어를 맘대로 골랐다는 설이다.
아무리 가명이라 할지라도 세례명은 세레명이다. 그런데 그걸 멋대로 정하다니.
정말 엄청난 월권행위다.
“저는 우리 중 가장 강하니까, 연약한 분을 지켜드리는 게 좋겠죠?”
이단 심문관 역할을 맡은 유지스가 당당하게 말하며 에드나의 팔을 끌어당겼다.
이로써 자연스럽게 윈스톤과 베일이 한 조로 묶였다.
“그럼 저녁 즈음에 다시 이곳에서 모이는 거로 해요.”
유지스는 그 말을 남긴 채, 에드나를 이끌고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나는 세르펜스와 함께 대로를 따라 두 블록을 지나친 후, 오른쪽으로 꺾었다.
그렇게 몇 번 모퉁이를 돌아 걷다 보니,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으슥한 뒷골목에 다다랐다.
그제야 세르펜스는 발걸음을 멈추고 회색 로브를 벗어서, 들고 있던 가방과 함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검은색 바지를 꺼내어 하얀 신관복 바지 위에 덧입고, 신발을 검정 워커로 갈아 신어 바짓단을 그 안에 넣었다.
거기에 검은색 로브까지 걸치니, 누가 보아도 수상한 사람이 되었다.
‘암살자 복장의 하위 호환인가?’
나는 그냥 신발만 갈아신고 로브는 갈색으로 꺼내 입었다.
그러고 잠시 기다리자, 유지스와 에드나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세르펜스가 후드를 푹 눌러쓰며 말했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가 싶다.
“그냥 휴마누스를 만나러 가는 건데, 조심은 무슨.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내 대답에 세르펜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옆에 있던 담벼락을 뛰어넘어 사라졌다.
수상한 복장을 했다고, 퇴장하는 방법까지 저렇게 수상할 필요가 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