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8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88화(488/1105)
488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6)
나는 세르펜스가 뛰어넘은 담벼락에서 시선을 떼고, 유지스와 에드나를 돌아봤다.
둘 다 나와 비슷한 갈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다만 흰 바지를 그대로 입고 있는 나와 다르게, 두 사람은 바짓단을 철저하게 숨기고 있었다.
유지스가 입은 로브는 정강이 아래까지 내려오는 길이였는데, 무릎 위로 올라오는 긴 부츠를 신고 있었다.
그 안에 바지를 넣으니, 겉으로 봤을 때 무슨 색 바지를 입었는지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에드나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치마 아래로 슬쩍 맨 발목이 드러난 거로 보아, 원래 입고 있던 바지는 접었거나 벗었거나 한 것 같다.
‘나만 변장을 너무 어설프게 했나?’
유지스뿐만이 아니라, 에드나까지 바짓단에 신경 썼을 줄이야.
지금이라도 바지를 갈아입어야 하나 갈등이 떠오르긴 했으나, 나 하나쯤은 흰 바지를 그대로 입어도 괜찮지 않을까 한다.
“우리도 어서 가요.”
유지스도 내 차림새에 대해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철저하게 준비해서, 일루미나티의 수장으로서 모범을 보여야겠다.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며 얼마나 걸었을까?
앞장서 걷고 있던 유지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이 건물이 우체국 건물이니까, 여기서부터 걸음 수를 세면 돼요.”
유지스가 제법 큰 규모의 회색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처음부터 우체국 뒷길과 이어진 좁은 길을 따라 우리를 안내한 모양이다. 길 안내 솜씨가 세르펜스 못지않다.
“자, 그럼···.”
나는 ‘열다섯 걸음’의 기준으로 추정되는 사람을 바라봤다.
에드나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바람에 내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사람마다 보폭이 다른데 열다섯 걸음째 되는 곳을 파보라니···. 직접 걸음 수를 세 보는 것보다, 유지스 님께서 정령으로 찾아내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데, 아무래도 그건 안 될 것 같아요. 땅이 파헤쳐진 흔적이 꽤 많아요. 누군가 암호를 해석할 것을 우려해서, 가짜 쪽지도 함께 묻어둔 게 아닐까요?”
유지스가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에드나의 말에 대답했다.
어쩐지 ‘쓸데없이 뺑뺑이 돌기 싫으면, 언니를 데려와!’라는 아니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다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에겐 ‘열다섯 걸음’의 정확한 지표가 있으니까. 그 암호를 남긴 건 아니마 씨잖아요? 그러니까···.”
“그 아이의 보폭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되는 거죠?”
“아니요! 열다섯 걸음이나 되는 거리를 잴 만큼 긴 자도 없으니까, 우선 에드나 씨께서 열다섯 걸음을 세면서 걸어 주세요.”
나는 당장 계산을 시작할 것처럼 구는 에드나를 말렸다.
문득 에드나는 아니마의 보폭을 알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아니마도 에드나의 보폭을 알고 있는 것 같으니, 깊이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에드나는 자신이 아닌 아니마의 보폭이 기준일 거라고 생각하는지, 한숨을 푹 쉬면서 골목 끝에 섰다.
그러고는 한 발짝씩 떼며, 천천히 숫자를 셌다.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여기예요.”
에드나가 방금 땅을 디뎠던 발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러자 유지스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작은 모종삽을 꺼내어, 정확하게 에드나가 디뎠던 땅을 파냈다.
저 작디작은 모종삽으로 어찌나 빠르게 땅을 파내는지, 그 속도가 대형 삽 못지않다.
‘나도 군대에서 삽질깨나 했는데···. 유지스 앞에서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모종삽 끝에 무언가가 걸렸는지 유지스가 삽질을 멈췄다.
땅속에 묻혀있던 건 손바닥만 한 상자였다.
유지스는 그 상자를 손수건에 감싸서 에드나에게 건네준 뒤, 자신이 판 땅을 도로 메꿨다.
“약도가 들어있네요.”
에드나가 쪽지를 펼쳐서 나와 유지스가 볼 수 있게 들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봐도 어딘지 모르겠다. 이곳 지리도 모르는데 약도를 본다고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거기라면 여기서 별로 안 멀어요.”
유지스가 손바닥을 탈탈 털고 일어나, 발로 땅을 다지며 말했다.
평소에도 유지스는 믿음직한 엘프였지만, 오늘은 평소 이상으로 든든하게 느껴졌다.
‘가만 보면 유지스도 세르펜스 못지않게 만능이란 말이지?’
나는 앞장서 걷는 유지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감탄했다.
유지스를 따라 도착한 장소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폐가였다.
곧 무너질듯한 외관을 보고 있자니, 우리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는지 의심스럽다.
‘에드나의 말대로 아니마의 보폭을 기준으로 열다섯 걸음을 셌어야 하나?’
하지만 그 후회도 잠시.
아니마가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몽실몽실한 하늘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튀어나왔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에드나의 품으로 돌진했다.
“언니이, 보고 시펏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혀 짧은 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나는 그런 아니마에게서 신경을 끄고, 그녀가 튀어나온 문 쪽에 시선을 두었다.
휴마누스가 살짝 고개만 내민 채,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 손짓하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 계세요?”
“아무한테도 들키지 말고, 몰래 와서 숨어 있으라고 편지에 적혀 있길래···.”
내가 가까이 다가가서 질문하자, 휴마누스가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세르펜스를 찾고 있는 것 같다.
“세르펜스라면 같이 안 왔습니다. 마인의 거처를 찾아서, 그쪽을 살펴보고 있어요.”
“벌써 찾았어?”
“편지에도 써놓았다시피, 마인이 챈들러···. 그러니까 세라투 가문의 첫째 공자의 연인 행세를 하는 중이라서요. 마침 챈들러가 오늘 마인을 만나러 갔거든요.”
“아, 맞다. 그랬댔지?”
내 설명에 휴마누스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휴마누스가 비록 눈치는 없을지언정, 기억력까지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뛰어난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편지 내용을 깜박한 걸 보면···.’
과연 세르펜스가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며, 친구로 받아들여 줄지. 아니면 계속 남으로 대할지.
걱정하고 긴장하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휴마누스가 짠해 보였다.
“그럼 지금 바로 쳐들어가면 되는 겁니까, 보좌관 나리?”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보니, 푸로르의 모습이 보였다.
손가락 관절을 꺾어 우두둑 소리를 내는 모습이 굉장히 호전적으로 보였다.
“아니요, 우선 상황을 좀 보고요. 저희도 준비 중인 계획이 있거든요.”
“그 왕자 나리인가 뭔가 하는 사람 때문에?”
“네, 맞습니다.”
내 대답에 푸로르가 김샜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으며, 쳇 하고 혀를 찼다.
성정이 불같기는 해도 누구와 달리 눈치가 빨라서 그런가. 말을 길게 늘어놓지 않아도 이해가 빨라서 좋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자리부터 옮기는 게 어때요? 세르펜스가 여러분께서 지내실 장소를 구해 뒀거든요.”
어느새 다가온 유지스가 자리를 옮기자는 얘기를 꺼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이 폐가를 떠나고 싶지만, 그러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일이란 눈치 없는 휴마누스에게 우리의 현재 설정을 알리는 것이다.
자세한 설명 없이 그를 바로 여관에 데려갔다가는, 여관 주인 앞에서 ‘눈 밑에 그건 뭐 묻은 거야?’ 같은 소리를 해댈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폐가 안으로 한 발짝 더 들어선 뒤, 푹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뒤로 젖혔다.
“그 전에! 교단을 통해 들으셨을 것 같지만, 혹시나 해서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에인젤 H. 셀레스트’입니다. 편하게 ‘에인젤 주교님’이라 불러주세요.”
“저는 ‘마테리아 S. 사지타’랍니다. 그리고 저쪽에 계신 분은 ‘레반다 C. 아이트라’라고 한답니다.”
유지스가 내 의도를 파악하고, 자기소개와 더불어 아니마와 놀고 있는 에드나의 소개까지 마쳤다.
무심코 뒤를 돌자 아니마가 에드나의 후드 안쪽으로 손을 넣어, 자신과 똑같이 하늘색이 된 에드나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저 두 사람은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며 호기롭게 말했다.
“덧붙여 저는 사람 이름을 잘 못 외워서, 여러분을 이름 대신 특정 단어로 부른다는 설정입니다. 성검의 주인, 용병 님, 마법사 님···. 아, 리에나 님을 주교님이라 부르면 저랑 포지션이 겹치는데···. 에라 모르겠다, 그냥 주교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저는 쾌활한 성격 같아 보이지만, 알고 보면 냉혹한 이단 심문관이랍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이지요!”
유지스도 나 못지않게 호기로운 소리를 해댔다.
세르펜스가 들었다면, 제발 그렇게만 되어 줬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빈정거릴 것 같은 설정이다.
“뭐야, 그게···?”
“굳이···,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사람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않는 주교는 너무···. 그렇지 않나요?”
휴마누스와 푸로르, 리에나. 세 사람이 중구난방으로 감상평을 내놓았다.
특히 룩스메아 교단의 진짜 주교인 리에나의 감상이 내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그때 등 뒤에서 아니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관 언니, 언니는 어떤 사람이에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설정 놀이 방면으로는 아니마가 에드나보다 한 수 위인 듯하다.
* * *
여관 건물 뒤쪽으로 난 쪽문을 통해 들어가자, 바로 주방이 보였다.
여관 주인의 말로는 자신이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때 말고는 사용하지 않는 문이라더니, 그 쓰레기가 음식물 쓰레기였나 보다.
“누구···십니까?”
우리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는지, 카운터 앞에 서 있어야 할 여관 주인이 주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표정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갈 때와는 다른 색 로브를 입고 나타난 데다가, 구성원까지 바뀌었으니. 긴가민가한가 보다.
내가 후드를 젖히고 나서야, 여관 주인이 긴장을 풀고 안도하는 낯을 했다.
“손님들 데려왔어요.”
“아! 이분들이 바로 말씀하셨던 그분들입니까?”
“맞긴 맞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글쎄! 교단에서 성검의 주인과 그 일행분들을 보내주셨지 뭡니까? 하하하! 대륙의 운명을 짊어진 분들이시니, 정말로 잘 모셔야 될 겁니다.”
내 말에 여관 주인이 다시 바짝 긴장하며, 후드를 뒤집어쓴 성검 일행을 바라보았다.
휴마누스가 가장 먼저 후드를 벗었고, 다른 일행들도 따라서 얼굴을 드러냈다. 에드나에게 들러붙느라 정신없는 아니마를 빼고 말이다.
“이분들이 여기에 와 계신다는 건, 그 누구도 알면 안 돼요. 비밀 엄수, 아시죠?”
“아,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이 밖으로 새어 나간다면, 악마 숭배자를 잡는 일에 큰 지장이 생기니, 저는 이단 심문관님께 즉결 처분을 당하게 되는 거잖습니까?”
“어···, 그, 그렇···죠.”
여관 주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주절주절 떠드는 말을 들으며,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세르펜스가 식후 디저트를 가지러, 1층으로 내려갔을 때. 입막음을 아주 단단히 해놨나 보다.
슬쩍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성검 일행이 묘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협박이라도 한 줄 아나보다.
“그럼 저희는 위에 올라가서 대화를 나누고 있을 테니까···. 거, 뭐야. 주인장은 차라도 가져와 주세요.”
나는 애써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들을 무시하고, 무사히 내 역할을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