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8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90화(490/1105)
490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8)
‘세르펜스는 성검과 접촉하면 안 된다는 전언을 받았다는 건···. 얘기하지 않는 게 낫겠지?’
얘기해 봤자 괜히 부담감만 줄 게 뻔하다.
안 그래도 휴마누스는 성검의 주인으로서. 그리고 세르펜스의 친구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다시 일행들이 기다리는 방으로 돌아왔을 땐, 여관 주인이 왔다 갔는지 테이블 위에는 와플과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와 휴마누스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궁금할 법도 한데, 그에 관해 질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리에나가 그동안의 근황을 물어왔다.
“이제 휴마누스도 돌아왔으니,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 맞다!”
휴마누스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무래도 나를 따로 불러내어 성검에 관해 물어볼 타이밍을 잡느라, 베일이나 마인에 관한 건 깜박해 버렸나 보다.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 속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을 읽는 건, 가슴이 벅차오르는 일이었는데.
실재하는 사람이 시련을 마주하고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바스툴 왕실이 악마 숭배 세력과 손을 잡은 게 맞는지 확인하고, 베일 왕자가 세력을 모으는 걸 돕겠다면서? 그런데 느닷없이 마인을 찾았으니, 지원을 와 달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마누스가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비록 성검에 관한 건 아는 게 없어서 대답해줄 수 없었지만, 이번 질문에 답하는 건 어려울 것 하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긴데···, 우선 모든 일이 원흉이 되는 세라투 자작에 관한 것부터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되도록 친절하고 상세하게 세라투 령에서 있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리고 모든 설명이 끝났을 때.
성검 일행의 표정에 떠오른 감정은 분노와 경악이었다.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제 자식들에게 그런 짓을···!”
“완전 인간 말종 쓰레기잖아?!”
리에나는 탄식했고, 푸로르는 격분했다.
타인의 일에 관심 없어 하는 아니마조차 인상을 찌푸리며 에드나의 옷자락을 꼬옥 쥐었다.
그리고 휴마누스는 착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세상에는 자식을 자식으로 대하지 않는 부모들이 많구나···.”
“세라투 자작 말고 그런 부모가 또 있어?”
“어? 왜, 바스툴 국왕도 그렇잖아? 제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베일 왕자를 죽이려고 한 걸 보면 말이야.”
푸로르의 물음에 휴마누스가 황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감이 좋은 푸로르는 휴마누스가 다른 뜻으로 한 말임을 눈치챈 듯하지만, ‘그건 그렇지.’라고 대답하며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그나저나 교단의 주교 신분으로 이상한 설정을 잡고 다닌다고 생각했는데···. 다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였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해서 죄송해요.”
분노가 좀 가라앉았는지, 리에나가 겸연쩍다는 표정으로 내게 사과를 했다.
설명 도중에 내가 윈스톤과 반목하는 척. 악숭이와 손잡은 누군가를 꾀어내려 했고, 실제로 수상한 편지까지 받았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저러는 걸 테다.
하지만 에인젤 주교에게 꼰대 설정이 붙었던 건, 성직자 신분증을 받은 날이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리에나는 무턱대고 비난했던 자신의 행동이 경솔하다 여겨졌는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악숭이 후보를 가려내는 것과 에인젤 주교의 꼰대 설정은 관계가 없다고, 사실대로 얘기해야 하나?’
사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중. 어느 쪽이 리에나의 마음을 편하게 할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난감함에 눈동자를 굴려 유지스에게 구조 신호를 보내려는 그때.
마침 문 쪽에서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앗, 누가 왔나 봐요!”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그곳에는 윈스톤이 서 있었다.
윈스톤은 방 안으로 들어온 후. 자신의 뒤에 가려져 있던 베일이 들어올 때까지 문 옆에서 기다렸다가, 쿵 하고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후드 때문에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윈스톤? 왜 그렇게 보세요? 사람 불안하게.”
“그건 내가 할 말이오. 문밖에 있는 사람이 누군 줄 알고, 이렇게 겁도 없이 문을 여는 거요? 주군께서 아시면 크게 경을 치실 것이오.”
“안전한 사람이니까, 제가 문 앞까지 오는 걸 아무도 안 막은 거겠죠.”
“선배라면 방에 혼자 있었어도 문을 여셨을 것 같아서 한 말이오.”
윈스톤은 그렇게 말하며, 걱정스럽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쩐지 하루가 멀다 하고, 장난치다 다치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그런 아이를 돌보는 어린이집 교사에 가까우려나?’
세르펜스가 나를 과보호하며 싸고도니까, 이젠 윈스톤마저 나를 과보호하기에 이르렀다.
그냥 문 한 번 열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혼이 날 줄이야.
윈스톤은 아이를 혼내기에 앞서, 아이가 창피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기본적인 지식도 모르는가 보다.
내가 다 큰 어른이기에 망정이지.
어린아이였다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지도 모른다.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꼭 누군지 확인하고 열겠습니다. 그 대신 윈스톤도 저랑 약속 하나 해요.”
“무슨 약속 말이오?”
“앞으로 절 혼낼 일이 생긴다면, 평소 멤버들만 있는 자리에서 혼내주세요. 많은 사람 앞에서 혼나는 건, 아이를 주눅 들게 만드는 원흉 중 하나입니다.”
“알겠소. 참고하리다.”
윈스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제안을 수용했다.
기왕 얘기를 꺼낸 김에 윈스톤은 덩치가 커서 아이를 겁먹게 할 수 있으니까, 자세를 낮춰서 눈높이를 맞추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지 않기로 했다.
높은 확률로 나에게 써먹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커흠!”
난데없이 들린 헛기침 소리에 쳐다보니, 어느새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베일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눈동자만 굴려서 성검 일행 쪽을 눈짓했다.
“아차! 여기 계신 이분은 바스툴 왕국의 2왕자이신 베일 바스툴 저하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렉스···. 뭐더라?”
“‘렉스 R. 윅토르’요. 그리고 윈스톤 님은 ‘오르덴 J. 비괴르’예요.”
내가 잠깐 멈칫하자, 유지스가 시의적절하게 두 사람의 가명을 알려주었다.
“네, 아무튼 그런 가명을 쓰고 있습니다. 에인젤 주교는 두 사람을 ‘작은 성기사님’과 ‘큰 성기사님’이라고 부르죠. 덧붙여 작은 성기사님은 무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설정입니다. 그래서 에인젤 주교는 작은 성기사님의 부족한 실력을 들먹이며, 선배인 큰 성기사님을 트집 잡곤 합니다.”
“렉스 님께서는 오르덴 님께 죄송스러우면서도, 에인젤 주교님의 말에 반항 한 번 하지 않는 오르덴 님이 답답해 보였겠죠? 처음에는 에인젤 주교님이 싫었겠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는 것이 ‘오르덴 님이 에인젤 주교님의 폭거에 순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유지스가 베일에게 새로운 설정을 부여했다.
열정 많고 순수했던 성기사가 점차 속세에 물들어, 타락해 간다는 줄거리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베일이 어버버하며 나와 유지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맡고 있던 배역에 돌연 무거운 설정 주어지자, 부담스러워진 모양이다.
“언니, 언니! 그래서 ‘오르덴’이라는 성기사는 어째서 에인젤 주교의 말에 따르고 있는 거야?”
잠시 대화가 끊긴 틈을 타, 아니마가 눈을 반짝거리며 에드나에게 질문했다.
그 모습이 동화책을 읽다 말고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는 어린애처럼 보였는지, 에드나가 부드럽게 웃었다.
“글쎄에~? 오르덴 님은 항상 투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언니는 잘 모르겠는데? 아니마는 왜 그럴 것 같다고 생각해?”
“성기사니까 무지무지 착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래서 잇짜나, 막 참고 있는 거야! 주교가 일반 성기사보다 윗사람이기도 하고!”
“역시 우리 아니마는 참 똑똑해~!”
에드나가 아니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고, 아니마는 ‘에헤헤’ 하는 웃음소리를 냈다.
성기사니까 착한 사람이라는 대답부터 웃음소리까지.
아니마의 행동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계산된 것이었다.
“맞아요! 신 룩스메아 님을 향한 오르덴 님의 신앙은 독실하다는 말로도 모자라죠. 그렇기에 에인젤 주교님의 모욕에도 참을 수 있었던 걸 거예요!”
유지스가 아니마의 설정을 공식으로 채택했다.
그보다 독실함을 넘어선 신앙이면 광신도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닐지, 굉장히 신경 쓰였다.
“그리고 에인젤 주교님이 권력에 욕심이 많긴 해도, 교단에 해를 끼칠 인물은 아니란 걸 알고 있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인젤 주교님 또한 신 룩스메아 님을 모시는 성직자니까요.”
“처음엔 저게 뭔가 싶었는데, 듣다 보니 좀···, 재밌어 보이는데? 우리도 저런 거 할까?”
유지스가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고르는 사이, 푸로르가 작은 목소리로 리에나에게 질문했다.
리에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성검의 주인]에서도 리에나는 종종 저런 식으로 거절의 뜻을 내비치곤 했다.“무엇보다 오르덴 님은 정체도 밝히지 않은 누군가가 보낸 편지 따위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에요. 악마 숭배 세력은 그런 오르덴 님의 성정을 파악하지 못했고, 에인젤 주교님과 오르덴 님 사이를 이간질하려던 계략은 되려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는 패착이 되고 말았죠.”
유지스는 기어이 악숭 세력에도 배역을 부여하고야 말았다.
불쑥 이야기 속 주역인 ‘오르덴’ 역할을 맡은 윈스톤의 감상이 궁금해졌다.
윈스톤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대사가 어울릴 법한. 모든 것에 초탈한 듯,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세르펜스의 설정도 궁금해지는데?”
휴마누스도 우리의 설정 놀이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유지스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금 설명해 드릴 수 없어요.”
“네, 설정 지분 때문에 당사자 없는 자리에서는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설정 지분? 그건 또 뭐야?”
휴마누스가 의문을 표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세르펜스는 ‘신관 프레이’ 역할을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자기가 애착하는 배역에 관한 설정을 맘대로 떠든 걸 알면, 녀석은 분명 삐질 거다.
“그보다! 이제 슬슬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리에나가 말의 첫마디를 강조하여,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킨 뒤. 평소의 음색으로 목소리를 낮추어 말을 끝마쳤다.
성검 일행은 좋게 말하면 개성이 넘치고, 나쁘게 말하면 성격이 따로 놀았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하다 보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 각자 떠들고 있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곤 했다.
말의 첫마디를 강조하는 화법은 리에나가 정신없이 떠드는 일행들을 제어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럴 땐 조용히 입 다물고 있는 게 상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