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9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491화(491/1105)
491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19)
“우리는 구면이지?”
“네. 오랜만입니다, 휴마누스 황태자 전하.”
휴마누스가 손을 흔들며 인사하자,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던 베일이 표정을 수습하며 대답했다.
예의를 차리는 베일의 모습에 휴마누스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전하라니, 그렇게 부르지 말게나. 나는 지금 제국의 황태자로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니까.”
자신이 베일을 돕더라도, 제국은 바스툴 왕국의 정치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면서도 황태자답게 고풍스러운 말투를 쓰고 있었는데, 그 또한 베일을 배려하기 위함일 테다.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허물없이 대하는 건 너무 무례하고, 그렇다고 존대를 사용하면 베일이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려는 무슨. 조금 인사가 늦었지만, 이쪽은 내 동료들일세. 룩스메아 교단의 주교인 ‘리에나 G. 프레클라루스’, 그 옆에는 용병인 ‘푸로르 베스티알리스’. 그리고 저쪽···은 마탑의 마법사인 ‘아니마 프루이토’라고 하네.”
휴마누스가 하하 웃으며 자신의 동료들을 하나씩 소개했다.
중간에 에드나에게 들러붙어 있는 아니마를 소개할 때 잠깐 머뭇거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통성명이 끝났다.
“그런데 두 분께서는 꽤 늦으셨네요? 적당히 거리를 돌아다니는 척하다가, 이내 오실 줄 알았는데.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아무 일도 없었소. 다만 약재상은 다 돌아봐야 할 것 같아서, 이곳과 정 반대 방향에 있는 곳까지 다녀오느라 오래 걸렸을 뿐이오.”
유지스의 물음에 윈스톤이 담담한 투로 대답했다.
윈스톤이 원체 성실한 사람이란 건 알았지만, 그 성실함이 설정 놀이에도 반영될 줄은 몰랐다.
“약재상? 거기는 왜? 누가 다쳤어?”
“아까 말씀드렸죠? 저희가 성에 머물게 된 첫날, 세라투 자작이 감시자를 붙였다고.”
“아, 기억난다. 그래서 세르펜스가 성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일부러 들켜서, 침입자를 수색한다는 명목으로 영주성을 나와 영지를 돌아다니는 중이라고 했었지?”
“네. 그런데 세라투 자작이 붙였던 감시자가 막내 신관님의 가방에서 젤리를 빼먹다가 들켜서 조금 다쳤거든요. 그래서 놈이 약재상을 들리지 않았을까 싶어서, 약재상을 돌아다닌다는 설정입니다.”
내 설명이 끝나자, 휴마누스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저나 참 웃긴 놈이네. 그걸 대체 왜 훔쳐 먹은 거래?”
“저야 모르죠. 배가 많이 고팠나?”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 * *
“이제 곧 저녁 시간이네요. 잠깐 나갔다 와야겠어요.”
유지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벗어 두었던 로브를 다시 입으며 말했다. 쪽문이 아니라 앞문을 통해 다시 들어오겠다는 얘기다.
에드나도 자신에게 달라붙은 아니마를 떼어내고, 유지스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우우우, 언니이···!”
아니마는 에드나가 곧 돌아올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처럼, 에드나가 앉았던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재밌어 보였는데, 신경 써야 할 게 꽤 많잖아? 귀찮은 건 별론데···.”
푸로르가 문 쪽을 쳐다보며, 아쉽다는 듯이 쩝 입맛을 다셨다.
리에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살짝 미련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잠시 후 유지스와 에드나가 방으로 돌아왔고, 배턴 터치라도 하듯 윈스톤과 베일이 나갔다 왔다.
“세르펜스는 아직인가?”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 순간.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고 외치니, 세르펜스가 어깨로 문을 밀면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그 짝이다. 같은 고양잇과라서 그런가 보다.
“죄송합니다. ‘그자’가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느라 늦었습니다.”
챈들러가 마인의 집에서 나오지 않아서, 미행하는 놈들까지 덩달아 마인 주변에서 죽치고 있는 바람에 이제서야 돌아왔다는 얘기다.
그렇게 말하는 세르펜스의 양팔에는 수상한 차림새를 한 사람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무사히 완수하고 왔다는 증거다.
나는 녀석이 들고 온 사람들을 방구석에 내려놓는 사이, 서둘러 로브를 갖춰 입고 문 앞에 섰다.
“그럼 저도 다녀오겠습니다!”
내가 먼저 복도로 나가자, 세르펜스가 일행들을 향해 가볍게 목인사를 하고는 뒤따라 나왔다.
쪽문을 통해 여관 밖으로 나간 뒤, 우리는 골목을 빙빙 돌다가 잠시 멈춰 섰다.
처음 여관을 나섰을 때 입었던 복장으로 갈아입기 위함이다.
세르펜스에게 휴마누스를 이름으로 부를 생각이냐고 물어보려면 지금뿐이다.
하지만 그게 강요하는 것처럼 비칠까 봐, 물어보지 않았다.
내가 시켜서 이름으로 부르는 건, 휴마누스도 내켜 하지 않을 테니까.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행분들이라면 먼저 와서 위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문을 통해 여관으로 들어오자, 여관 주인이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준비된 대사라는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게, 가장 먼저 나갔다 온 유지스가 이렇게 하라고 시킨 게 아닐까 한다.
“그럼 바로 저녁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여관 주인이 머쓱하다는 표정으로 말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름 용기를 내어 연기를 펼친 걸 텐데. 황당해하다가 반응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괜스레 미안해졌다.
“헤세드 님. 안 올라가십니까?”
“그 이름은···. 아니, 됐습니다.”
나는 세례명을 그렇게 막 불러도 되는 거냐고 따지려다가, 어쩐지 세르펜스가 자주 하던 말 같아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평소 나에게 당하던 것을 그대로 갚아줬다는 생각에 고소했는지, 세르펜스가 쿡쿡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녀석을 한 번 흘겨준 뒤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 왔어?”
방에 돌아오자, 휴마누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세르펜스가 들고 왔던 놈들은 아직 기절한 상태였는데, 일부러 깨우지 않은 듯했다.
그 증거로 방음 마법으로 추정되는 푸른색의 투명한 막이 그들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세르펜스, 정말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어?”
휴마누스가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라는 소리를 할 거면 아까 세르펜스가 방에 막 왔을 때 했어야 한다.
그때는 벙벙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불과 몇 분 만에 재회해서 할 소리는 아니다.
“네, 잘 지냈습니다.”
“응, 그래. 잘 지냈구나. 그럼 됐지···.”
세르펜스의 대답에 휴마누스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으며 대답했다.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실망하는 휴마누스의 모습에 베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세르펜스가 잘 지냈다는데 휴마누스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영문을 몰라 당황하는 모습이다.
‘아직 실망하기엔 이른 것 같은데?’
나는 슬쩍 허리를 숙여서 후드로 가려진 세르펜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가, 달싹이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으, 으음···. 그, 휴마누스···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어, 어?! 그야 물론이지! 완전 잘 지냈어!”
이것저것 고민하느라 잘 못 지냈을 게 분명한 휴마누스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휴마누스의 독백이 떠올랐다.그는 검게 물들어버린 세르펜스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모르는 사람이라고 규정했었다.
그랬던 휴마누스가 지금은 더없이 기쁘다는 듯 활짝 웃고 있다.
마음의 문을 더욱 단단히 걸어 잠가, 마지막에는 가식적인 표정조차 지워버렸던 세르펜스는 민망하다는 듯 열없이 웃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이거,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를 친구로 받아들인 거라고 봐도 되는 거지?’
유지스도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윈스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입꼬리를 미미하게 끌어올린 상태였다.
에드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긴 했는데,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는 듯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원래 애들은 싸웠다가 화해하면서 자라는 거지.’ 같은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한다.
아니마는 그런 에드나의 어깨에 기대며,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푸로르는 검지로 자신의 코밑을 쓱 문지르며 ‘잘됐네.’하고 중얼거렸으며, 리에나는 양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잡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훈훈한 분위기에 동참하지 못하는 건, 오로지 베일 한 사람뿐이었다.
방구석에 기절한 채로 축 늘어진 사람들까지 포함해도 세 명밖에 안 된다.
“으음···. 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시간이 좀 남았으니, 저자들을 깨워보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민망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이 납치해온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절대 안 될 말이다.
나는 재빨리 세르펜스의 로브 자락을 잡아채, 녀석을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
“신관 프레이에 관해서 설명해야죠.”
“아.”
내 말에 세르펜스가 짧은 탄성을 흘렸다.
어떻게 이런 중요한 일을 까먹을 수 있는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반응이다.
녀석은 후드를 젖혀 변장한 얼굴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저는 현재 ‘프레이 A. 글라우벤’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습니다. 나이는 스물둘이며, 어렸을 적 에인젤 주교님의 손에 키워졌다는 설정으로,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주교님의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누구의 뭘 든다고?”
“에인젤 주교님의 수발을 든다고 하였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어차피 설정일 뿐인데, 뭘 그리 예민하게 구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이 말이다.
“참고로 입가에 점을 찍어준 것과 모노클을 씌운 건 제 작품입니다!”
“저는 도도하고 오만한 성격이라는 설정으로, 도발적인 분위기를 내 달라고 요청했어요! 그리고 머리카락도 만져줬죠!”
나와 유지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앞다퉈 ‘신관 프레이’ 설정에 지분을 내세웠다.
성직자에게 도발적이라는 설정을 부여한 게 너무 파격적이었던 탓일까?
성검 일행의 시선이 유지스에게 집중되었다가, 일시에 세르펜스를 향했다.
“으, 으음. 사람들이 저를 보고 ‘프라시더스 공작’을 떠올리지 못하도록 설정을 짜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세르펜스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어색한 웃음을 꾸며내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번에 맡은 배역이 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저를 믿고 뽑아 주셨으니, 기대에 부응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라는 인터뷰 멘트가 이어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한 멘트가 세르펜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 그래···. 그런 이유라면 어쩔 수 없지···.”
휴마누스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그리 말한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아···, 그리고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해, 정식 신관이 되기 전에는 수련 성기사였다는 설정도 있습니다.”
“이번 건 좀 평범하네.”
덧붙인 세르펜스의 설명에 휴마누스가 별것 아니라는 감상을 내뱉었다.
수련 성기사 설정에 ‘이단 심문관 제안을 받았다.’라는 하위 설정이 붙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