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49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00화(500/1105)
500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28)
“어째서 저를 지탄하시는 겁니까? 죄를 지은 사람은 제가 아닌 아버지입니다!”
내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챈들러가 웃음기를 지우고, 정색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린아이가 떼를 쓰는 듯한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저는 죽은 영주님···. 아니, 자작의 죄를 부정한 적은 없습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죄가 깊은 사람은 그자가 맞습니다. 다만, 첫째님께서는 지금 잘잘못을 가리고 싶은 게 아닌 듯 보여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저는 클로반이 아버지께 속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저 녀석은 저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챈들러의 표정에서는 미안한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욱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야 할 클로반이 웬일로 조용했다. 그는 초점이 나간 눈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넋이 나간 듯 보였다.
나는 클로반을 붙잡고 있는 기사를 바라보며, 손날로 목덜미를 치는 시늉을 했다.
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클로반과 챈들러를 번갈아 보았다.
“주, 죽이라고요? 누구를···.”
“둘째님을 기절시키라는 뜻이었습니다.”
내가 말을 하고 나서야, 기사는 ‘아.’ 하고 짧은 탄성을 흘린 뒤 클로반을 기절시켰다.
그래 봤자 현실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클로반이 받은 충격은 이미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계속 깨어 있어 봤자 충격이 더해질 뿐이니, 차라리 기절해 있는 편이 낫다.
‘부디 신성력을 동원해야 할 수준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정 안되겠다 싶으면, 세르펜스에게 부탁해야겠다.
인위적으로 정신을 안정시키는 게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막아서는 최후의 방어선 역할은 수행할 수 있을 테니까.
“주교님께선 무엇이 우선인지 모르시나 봅니다. 지금은 악마 숭배자의 계획을 무산시킨 저를 치하해 주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그러는 첫째님은 눈치가 없으시고요. 저희가 자작의 계획을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알고···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러니까 제가 첫째님의 말을 끊어 먹을 수 있었던 거겠죠.”
내 대답을 들은 챈들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클로반이 무너지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져서, 다른 사람의 반응 같은 건 제대로 살피지 못했던 게 아닐까 한다.
다른 상황이라면 꼰대답게 ‘고지를 눈앞에 둔 순간이야말로, 가장 조심해야 할 때’라고 훈계를 두었겠지만.
지금은 설정 놀이를 할 기분이 아니라서 관뒀다.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이제까지 가만히 계셨던 겁니까?!”
“그건 제가 설명할 수 있어요, 큰 오라버니.”
스륵, 착. 부채가 펼쳐졌다가 접히는 소리와 함께 르웰이 입을 열었다.
챈들러에게 집중되었던 시선들이 르웰에게로 옮겨갔다.
르웰은 긴장한 표정으로 부채를 꽉 움켜쥐고,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휘이 둘러보았다.
“설명? 네가 뭘 안다고?”
짧은 정적을 인내하지 못하고, 챈들러가 르웰을 재촉했다.
그 표정과 목소리에서 그가 르웰을 무시하고 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요, 모르니까 질문 하나만 할게요. 큰 오라버니께서는 아버지가 악마 숭배자와 거래했다는 증거. 혹은, 아버지에게 접근한 악마 숭배자의 정체를 알고 계시나요?”
“아버지가 클로반에게 자신과 똑같은 말투와 행동을 강요한 것만 봐도, 충분히 증거가 될 텐데?”
“그건 어디까지나 ‘아버지께서 그런 계획을 세우셨다.’라는 것뿐이지, ‘악마 숭배자와 거래했다.’라는 증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비아냥거리는 챈들러의 말에도 르웰은 차분하게 제 할 말을 꺼냈다.
“물론 자식의 인생을 빼앗으려 한 건 인륜에 반하는 일이고, 악마의 힘을 이용할 마음을 먹었다는 것만으로도 명백한 이단이에요. 그 사실은 부정할 수 없죠. 하지만 아버지는 아직 악마 숭배 세력과 접촉하지 못한 것 아닌가요?”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건 없어요.”
르웰이 챈들러의 말허리를 자르고,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자못 단호하기까지 했다.
“큰 오라버니께서는 아까 주교님께 아버지의 계획을 알면서, 어째서 가만히 계신 거냐고 물으셨죠? 이유는 간단해요. 악마 숭배자가 아버지에게 접근하면, 그자의 뒤를 쫓아 악마 숭배 세력의 근거지를 찾아낼 계획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큰 오라버니께서 이런 짓을 저지르셨으니···.”
탁, 탁, 탁. 르웰이 부채로 손바닥을 치면서, 챈들러와 그의 발치에 쓰러진 세라투 자작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 지금 나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가요. 제가 어찌 가족인 큰 오라버니를 한심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그저 안타까워했을 뿐이에요. 큰 오라버니께서도 ‘저처럼’ 주교님께 상담하셨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결국 악마 숭배자를 유인해 낸다는 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네요.”
르웰이 다시 한번 한숨을 푹푹 내쉬며 말했다.
자신은 챈들러를 한심하게 생각한 적 없다고 말문을 연 것과는 다르게, 이어진 말은 듣는 이로 하여금 챈들러가 한심해 보이도록 유도하는 내용이었다.
‘···이거, 주도권 싸움이네.’
현재 세라투 가문의 분위기는 뒤숭숭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가주인 세라투 자작이 큰아들의 손에 죽었을 뿐 아니라, ‘아버지는 악마 숭배자였다.’라는 고발이 이어졌으며, 낱낱이 까발려진 세라투 자작의 야욕은 인륜에 대한 모욕 그 자체였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가만히 있으면, 가주가 될만한 그릇인지 그 역량을 의심받게 될 터다.
‘어쩌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챈들러에게 가주 자리가 넘어갈 수도 있고.’
르웰이 에인젤 주교와의 친분까지 내세우며 나선 건, 바로 그 점을 경계했기 때문이리라.
분명 많이 놀랐을 텐데.
그런데도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여, 우리가 악숭이를 유인하려 했다는 계획을 즉석에서 짜 맞추다니 실로 대단하다.
“네가, 주교님과 상담을 했다고? 아버지의 일로?”
“제가 말한 게 아니라면 이곳에 오신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교님께서, 어떻게 아버지의 계획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겠어요?”
“르웰, 네가 그걸 대체 어떻게 알고?”
“오라버니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는···. 솔직히 말해서 정상이 아니잖아요. 그것 말고도 과거에 주변의 땅을 사들여 영지를 넓힌 거라던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만들어 둔다거나. 그런 것들도 의심의 불을 지피는 데 한몫했죠.”
르웰은 자신이 알고 있던 정보와 함께, 은근슬쩍 세라투 자작의 태도를 운운하며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이를 악다문 르웰의 얼굴에 세라투 자작을 향한 혐오가 짙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혐오 속에는 미약한 분함이 섞여 있었다.
르웰은 세라투 자작의 신분 세탁 계획을 모르고 있었다.
그걸 남의 입을 통해 듣고 나서야, 모든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게 분했던 걸까?
어쩌면 아버지가 그 정도는 아닐 거라고 믿었던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진실을 알게 된다면, 오라버니들이 상처받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 알리지 않았던 건데···. 아. 큰 오라버니께서는 작은 오라버니가 상처받길 원해서, 일부러 주교님께 상담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혹여라도 그런 거라면 실망스럽네요.”
“나, 나는···, 그저···.”
“그런 게 아니라면 영웅 심리에 도취하기라도 한 건가요? 그렇지 않고서야. 교단에서 오신 성직자분들과 일말의 상의도 없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게, 저로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요.”
장내에 모여 있던 기사와 사용인들이 르웰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모두가 르웰의 말에 동조하자 챈들러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사라지고, 불안함이 깃들었다.
그를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이다.
애초에 챈들러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우리가 르웰과 한편이라는 점을 떼어놓고 보더라도 말이다.
챈들러는 제 아비를 죽여놓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충격에 빠진 동생을 절망으로 몰아가며 한껏 조롱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소름 끼쳐 하는 게 보통이다.
반면에 르웰은 교단에서 온 나에게 협조를 구했다고 밝히며, 두 오라버니를 걱정했고 그들이 충격을 받지 않길 바랐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누구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지는 뻔하지.’
챈들러가 이렇게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한 건, 사회성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교계에서 따돌림을 당한 탓에 제대로 사람을 사귀어 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보통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공포를 느끼고, 어떤 행동에 이질감을 느끼는지 알지 못했던 거다.
“네, 네가 뭘 안다고···!”
“그럼 설명해 주시겠어요? 어째서 아버지의 계획에 ‘악마 숭배자’가 필요하다는 걸 눈치채 놓고도, 성직자분들께 알리지 않으셨는지.”
“그, 그건···. 내, 내 말을 믿어주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그것도 그, 그러할 게, 저 주교는 아버지와 치, 친하게 지냈잖아!”
“두 분이 친해 보였나요? 제 눈에는 서로를 견제하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르웰이 부채 끝으로 자신의 턱을 톡톡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챈들러의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 담긴 동작이다.
“그리고 설령 주교님께서 아버지와 친했다고 하더라도, 교단에서 오신 분 중에는 이단 심문관님도 계시잖아요.”
“맞아요. 이단을 처단하는 데, 친분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르웰이 자신을 거론하자, 유지스가 챈들러를 향해 한 걸음 성큼 앞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도 질문하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물어봐도 되나요?”
“혹시 얘기가 길어질까요? 어머니와 작은 오라버니가 걱정되어서요. 하다못해 침대에 눕혀 두기라도 하고 싶은데···.”
“제가 배려가 부족했네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어요.”
유지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르웰이 사용인들에게 자작 부인과 클로반을 방으로 모시고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르웰의 명을 거부하거나 어물쩍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가족들을 아끼는 르웰 님께 애석한 얘기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사용인들이 자작부인과 클로반을 업고 식사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유지스가 안타깝다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평소 자신을 무시하던 동생에게 앙갚음해 주고 싶었다거나, 영웅 심리에 취했다거나. 그런 이유 말고, 우리는 제삼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답니다. 아, 여기서 ‘우리’란 이단 심문관들을 말하는 거랍니다.”
“제삼의 가능성이요?”
르웰이 유지스의 TMI를 가볍게 무시하며 질문했다.
“얼마 전에 정체불명의 침입자가 영주성에 나타났었다는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그자가 성을 떠나기 전에 세라투 자작과 만났을 가능성은 정말 없는 걸까요? 그 전에 그자가 성에 침입한 게 언제인지 아는 사람이 있기는 한가요?”
“그건···, 아무도 모르죠.”
“맞아요. 어쩌면 우리가···. 아, 여기서 ‘우리’는 저와 이곳에 와 계신 성직자분들이랍니다. 아무튼 우리가 성에 오기 전에, 이미 세라투 자작과 약속을 잡아 놨을지도 모르죠. ‘어디에 사는 누구를 찾아와라.’ 같은 식으로 말이죠.”
유지스의 말이 길어질수록, 르웰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져 갔다.
그 말속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것이리라.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세라투 자작을 의심하고 있다는 걸, 악마 숭배 세력에서 눈치챘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당연히 세라투 자작을 죽여서 입을 막으려 하겠죠.”
식사실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시에 챈들러에게로 쏟아졌다.
챈들러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지만, 유지스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 질문하죠. 챈들러 세라투 공자. 당신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세라투 자작을 죽인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