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0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05화(505/1105)
505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33)
“대체 뭘 새겨듣고 계신 겁니까?”
“주교님께서는 대륙 각지로 불려 다니며, 머리를 써서 이단 심문관의 업무를 돕는 분이시잖아요. 그런 분을 곁에 두고 조언을 얻을 수 없다면, 그 기술이라도 배워 두어야 하지 않겠어요?”
르웰은 착각을 한 게 아니라, 에인젤 주교 설정에 속았을 뿐이었다.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정치가 아닌 아동의 복지에 관한 것뿐이거늘.
본의 아니게 르웰의 배움에 대한 열정을 기만해 버렸다.
어쩐지 떨떠름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르웰의 시선을 피했다.
그런 내 행동에 르웰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여러분께 동의도 구하지 않고, 기사들이 성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해 버렸네요. 죄송해요.”
“죄송하긴요. 오히려 적절한 대처였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손사래를 치며 르웰의 말을 부정했다.
유지스도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영주성의 출입을 통제하려 한 건, 소문이 변질되어 퍼져 나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사람들을 보호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기사들이 수다를 떨면서 소문을 퍼트리고 다닌다?
그건 기사도 뭣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르웰은 현재 아주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영향력을 키워나가며, 세라투 가문을 계승할 자로서 확고히 자리매김해야 할 때다.
르웰이 가문을 잇는 건 거의 확정된 사항이긴 하나, 앞으로 영지를 이끌어 나가는 건 또 다른 문제니까.
이런 상황에서 르웰이 마틴 경 앞에서 바깥출입 문제로 우리에게 동의를 구했다면. 마틴 경은 르웰의 역량을 미심쩍어했으리라.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그건 그렇고 제가 알아야 할 정보는 이걸로 정말 끝인가요?”
“어디 보자···. 첫째가 만나는 사람이 공왕이고, 성검 일행이 세라투 령에 와 있고, 시종장이 첫째의 수족이고, 그 외에는···. 우리가 이곳에 온 첫날. 제 방에 침입했던 놈과 딸기 젤리를 먹은 사람. 그리고 며칠 전 성벽을 뛰어넘어 사라진 사람. 그 셋이 사실은 동일인이 아니라는 것 정도?”
“네?”
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하자, 르웰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러고는 내가 한 말을 다시 곱씹어 보기라도 하는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별로 어려운 얘기도 아니었건만. 이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한가 보다.
“그 젤리를 먹은 게, 주교님이셨습니까?”
아직 누구라고 말하지 않았음에도, 베일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범인으로 나를 지목했다.
“주교님께서 젤리를 먹었다는 건, 그 기척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럴 것 같긴 했어요. 에인젤 주교님 외에 다른 사람이 젤리를 먹었다면, 프레이 님께서 그냥 넘어갔을 리가 없죠.”
세르펜스와 유지스는 진작 알고 있었다는 듯, 여상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저 둘이라면 이미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교님···. 젤리가 드시고 싶으면, 직접 사서 드세요. 아이 거 뺏어 먹지 말고요.”
마지막으로 에드나가 한심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나를 바라보는 에드나의 표정은 ‘아이 간식을 뺏어 먹는 철없는 아빠를 바라보는 표정’ 그 자체였다.
“뺏어 먹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애초에 그 젤리는 제가 산 겁니다! 공금으로!”
“맞습니다. 그 젤리는 주교님께서 저를 위해, 경비로 구매한 겁니다. 그렇기에 주교님의 것입니다.”
세르펜스가 내 주장에 동의하며 말을 얹었다.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에드나의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옮겨졌다.
돈의 출처가 교단이 아닌, 세르펜스의 주머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세르펜스의 돈으로, 세르펜스를 위해 산 물건이, 세르펜스의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세르펜스의 입을 통해 들었으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젤리보다 더 중요한 이야기가 있지 않았어요?”
에드나 말고도 어처구니를 잃어버린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르웰이 지금 다들 뭐 하는 거냐는 표정으로 우리를 둘러보았다.
나는 서둘러 손가락으로 베일을 가리켰다.
“작은 성기사님이 시작했습니다!”
“예? 아, 아니, 그건 주교님께서 갑자기 젤리 얘기를 꺼내셔서···.”
“그래도 그냥 넘어갔어야죠, 일부러 자연스럽게 지나치려고 중간에 끼워 넣어 고백한 건데!”
“자연스러울 리가 없잖···!”
베일이 울컥 성을 냈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닫았다.
뒤이어 투구의 이마 부근을 손으로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는데, 소리를 지른 게 부끄러워졌나 보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젊은이들은 다들 어느 정도 치기가 있는 법이죠. 어른인 제가 그 정도도 이해 못 하겠습니까? 하하하하!”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르웰도 동석하고 있으니, 이제 베일에게 장난을 치는 건 그만해야겠다.
나는 베일에게서 관심을 끄고 다시 르웰에게 말을 붙였다.
“저희 어디까지 이야기했죠?”
“주교님의 방에 침입한 자와 성벽 너머로 사라진 자가 다른 사람이라는 얘기까지 했어요.”
르웰은 딸기 젤리에 관한 내용만 쏙 빼고 말했다. 그것을 더 이상 화제에 올리지 말라는 뜻이 아닐까 한다.
나는 그녀의 뜻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방에 들어왔던 놈은 세라투 자작의 부하가 맞을 겁니다.”
“그렇다는 건, 두 번째로 나타난 침입자의 정체는···!”
“네, 바로 여기 계신 막내 신관님입니다.”
“···악마 숭배 세력에서 보낸 사람이 아니고요?”
내가 옆에 앉은 세르펜스의 등을 토닥이며 말하자, 르웰이 얼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원래는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정원에서 보니까, 르웰 님은 세라투 자작이 꾸며낸 거라고 믿고 계신 것 같아서 특별히!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저희가 영주성 밖으로 나갈 구실을 만들려고, 공작한 거 였습니다.”
“하지만 글라우벤 신관님은 알리바이가 있지 않았나요?”
“그냥 성벽을 넘는 모습을 보여준 후, 재빨리 방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알리바이는 무슨. 르웰 님은 영주가 되시면, 성 경비에 좀 더 신경을 쓰시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별것 아니라는 투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세르펜스는 뿌듯한 표정으로 어깨를 쫙 펼쳤고, 르웰은 입을 떡 벌렸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프레이 신관님은 무려 칼립스 이단 심문관님께서 후계로 점찍어 둔, 인재 중의 인재거든요. 결국 그냥 신관이 되어 버렸지만···.”
유지스가 거짓 한숨을 푹푹 내쉬고는 아쉬움을 가장하며 말했다.
그냥 이단 심문관이라고 말해도 될 텐데. 유지스는 이번에도 ‘칼립스’라는 이름을 팔아먹었다.
얼굴은커녕 실존 여부조차 모르는 그가 친숙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이단 심문관님이 그렇게 대단하신 분인가요?”
르웰이 ‘칼립스 이단 심문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나는 유지스가 이번엔 어떤 설정을 만들어낼까, 기대 반 걱정 반의 심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유지스의 입에서 나온 설명은 내 예상 밖의 것이었다.
“당연하죠! 애초에 ‘칼립스’라는 성을 이어받는 건, 이단 심문관 중에서도 무예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 분만 가능한 일인걸요!”
굳이 설정을 만들어 낼 것도 없이 현존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니,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할 것 같지만.
“다른 이단 심문관들은 보통 한 가지 무기를 다루는 데에 특화되어 있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보조 무기로 단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그건 활이라는 무기 특성상 그렇게 된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칼립스’라는 성을 계승하는 이단 심문관들은 달라요. 주 무기로 검을 쓰긴 하지만, 그 외의 모든 무기를 수준급으로 다룰 줄 알아야 하죠.”
“그렇군요. 이단 심문관의 이름을 기록에 남기는 일은 드물기도 하고, 거기까지 공부하는 일은 없다 보니···.”
르웰이 고개를 주억이며, 의문 가득한 눈으로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대체 왜 이러고 있나 싶은 눈빛이다.
“사실 이단 심문관들의 성은 테라룸 왕국의 도시 이름과 연관이 깊답니다. 제 성인 ‘사지타’만 해도, 활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소규모 도시인 ‘사지타’에서 따온 거랍니다. 그리고 ‘칼립스’는 ‘무기’를 주로 만드는 대도시인 ‘칼립스’에서 비롯된 거죠.”
[성검의 주인]에서는 언급된 적 없는 정보다.유지스의 설명이 생소하기 그지없는 걸 보면 ‘시온’도 모르고 있었나 보다.
과연 나이가 세 자릿수에 다다른 엘프라 그런지, 지식의 총량 자체가 남다르다.
나는 유지스의 지식에 놀라워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입을 열었다.
“참고로 성벽을 넘은 게 이 녀석이라는 건 비밀입니다. 교단 이미지상 조금 그렇기도 하고. 막내 신관님의 실력은 알려지지 않는 편이 적들의 허를 찌르기에 유리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알죠?”
“성벽을 넘어 영주성을 빠져나간 침입자는 끝까지 찾아낼 수 없었다. 정황상 악마 숭배 세력의 끄나풀로 추정된다. 이거면 되는 거죠?”
“좋아요, 바로 그겁니다!”
박수가 절로 나오는 훌륭한 정리다.
세르펜스는 내가 이렇게 해 주면 기뻐할 텐데. 르웰은 내 칭찬이 부담스러운지, 사교용 눈웃음을 지으며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렸다.
“어쨌거나 정보에서 뒤처졌을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되는지, 몸소 경험하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비꼬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가르쳐 준 사람은 없는데, 배운 사람만 있는 이상한 상황이다.
이놈의 집구석에서 어떻게 르웰 같은 사람이 튀어나왔나 했더니. 이런 학구열을 통해 꾸준히 자기 계발을 해왔나 보다.
“······.”
“······.”
대화가 끊기고 정적이 찾아왔다.
우리의 정체를 제외하고는 숨김없이 모든 걸 털어놓았고,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윈스톤이 돌아오길. 그리고 성검 일행의 전투가 끝나길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르웰 님은 계속 여기 계셔도 됩니까?”
“그러면 안 되나요?”
“아뇨. 영지 업무를 파악하려면 바쁘실 텐데, 여기서 이러고 계셔도 되나 싶어서 물어본 겁니다.”
“지금은 다들 얼떨떨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데다가, 여러분께서 이곳에 계신 덕분에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에요. 진짜 혼란은 늦으면 내일, 이르면 오늘 오후 즈음이 되겠죠. 그러니 그 전에 미리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르웰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바빠지기 전에 할 수 있는 모든 업무를 처리해 두려는 사람의 보좌관 노릇을 하다가, 알아서 휴식을 취하려는 사람을 보니 기분이 새롭다.
“쉬려면 방에 가서 편히 쉬시지.”
“지금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제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한 것이 아니라면, 그냥 여기서 쉴 수 있게 해주세요.”
사건 발발 이후. 줄곧 의연해지려 노력했던 르웰이 간접적으로나마, 힘들다고 말해왔다.
이곳은 세라투 영지의 영주성이었고, 르웰은 영주 대리였으니. 그녀가 어디서 쉬든 내가 허락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이다.
“뭐, 그게 편하시다면야.”
나는 짐짓 태평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르웰은 눈을 감았으나, 잘 생각은 아니었는지 부채를 쥔 손을 까딱거리며 소파 손잡이를 두드렸다.
무언가 깊이 생각하는 모습이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정리하며,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계획하기라도 하는 걸까?
우리는 그녀의 휴식 아닌 휴식을 방해하지 않고, 두런두런 작은 목소리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렇게 삼십여 분이 지났을까?
– 똑, 똑, 똑
응접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르웰이 눈을 떴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윈스톤과 두 명의 발꾼이들. 그리고 처음 보는 사내까지 총 네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