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0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09화(509/1105)
509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37)
통신구에서 챈들러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유지스의 경고가 끝나고도 몇 초가량이 더 흐른 뒤였다.
{ 펴, 편지에 쓰인 내용을 믿으시는 거, 겁니까? }
{ 말 돌리려 하지 마십시오. }
챈들러의 물음은 유지스가 뽑아준 예상 질문에 있었던 내용이다.
하지만 윈스톤은 준비된 답안을 말하지 않았다. 대사가 너무 많아서 까먹었나 보다.
그래도 성기사 오르덴의 성격을 생각해 본다면, 지금처럼 을러대는 게 더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 에인젤 주교를 죽일 방법조차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그런 편지를 보낸 건 아니리라 믿습니다. }
{ 그, 그게···. }
{ 아무리 남이 시키는 대로 받아 적었다 할지라도, 대략적인 계획 정도는 들었을 것 아닙니까. 설마하니 자세한 계획조차 듣지 못한 채 그런 편지를 보낸 거였습니까?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존재한다니, 믿을 수가 없습니다. }
남은 대사를 까먹기라도 할 새라. 윈스톤이 텀을 둬서 말해야 할 대사를 한꺼번에 쏟아냈다.
“아, 조금 아쉽네요. ‘설마하니’부터는 상대방의 반응을 본 뒤에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유지스가 탄식하며 아쉬움 가득한 감상평을 말하였다.
하지만 이건 윈스톤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세르펜스가 얌전빼느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탓이다.
세르펜스는 ‘말을 할 때는 완급 조절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자연스러워 보이려면, 중간중간 끊어서 말하는 게 어떨까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협박을 할 때는 완급 조절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서서히 숨통을 조여오는 압박감을 느낄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였으면서 말이다.
‘내가 시켜서 고양이 흉내를 냈다는 사실도 당당하게 밝힌 주제에. 고작 취조 노하우 가지고 무슨 내숭을 떠는 거람?’
이제 에드나 앞에서도 연기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줄 알았는데.
그냥 자신도 아니마처럼 아직 아기라는 사실만 알리고 싶었나 보다.
“으음···. 그래도 감정이 담기지 않은 무심한 말투라, 상대방을 자극하기엔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정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는 뉘앙스라서, 자격지심이 있는 상대에겐 엄청난 모욕으로 느껴질 것 같아요.”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소곤소곤 의견을 주고받았다.
아주 연기 평론가가 따로 없다.
{ 누, 누가 멍청하게 남의 말을 받아 적, 적었다는 겁니까? }
{ 당신은 자신의 연인이 마인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잖습니까. 악마 숭배자도 아니면서, 남의 말을 받아적은 것도 아니라면. 어째서 제게 그런 편지를 보냈는지 말해 보십시오. }
{ 서, 성기사 단장이 될 정도의 능력을 갖췄으면서. 개처럼 부려지기만 하는 주제에···! 내, 내가 불쌍히 여겨, 구, 구해주려 했건만···. }
챈들러가 겁에 질려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건방진 소리를 해댔다.
진짜로 ‘성기사 오르덴’을 무시해서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아무렇게나 지껄이고 있는 것에 가까웠다.
도대체 자존감이 얼마나 떨어졌길래, 겁에 질린 상태로도 자격지심에 얽매이는 걸까?
{ 그 마인이 그렇게 말하며, 은혜를 베풀라고 말하였습니까? }
{ 어, 어째서 제가 남의 말에 휘둘렸다는 걸, 저, 전제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
{ 당신은 그저 우월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지 않습니까. 마인은 그 점을 눈치채고, 당신의 행동을 유도한 겁니다. }
윈스톤의 목소리에 혐오감이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챈들러가 ‘성기사 오르덴’을 두고 불쌍하다고 말할 줄은 몰랐기에, 저런 대사는 준비하지 않았다.
즉, 윈스톤은 본인이 느낀 감정을 말한 것이다.
{ 아, 아니···, 아닙니다! }
{ 그 증거로 당신은 공왕이었던 마인을 두고 한낱 평민이라 칭하였습니다. 그러니 인정하십시오. 당신이 그자에게 속아 휘둘렸을 뿐이라는 사실을. }
{ 저, 저를 무시해서, 성기사님께 좋을 건 없, 없습니다. 에인젤 주교를 주, 죽이고 싶은 거 아니었습니까? }
30분이라는 배터리 시간 때문에 끝까지 청취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챈들러가 알아서 본론을 꺼냈다.
저리도 우쭐거리며 말하는 걸 보면, 아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 방법이 있습니까? }
윈스톤이 곧장 관심을 보였다. 챈들러의 말이 끝난 지 3초도 채 지나지 않았건만.
순진하기 그지없는 반응 속도에 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이고, 거기서는 한 번 튕겨 줘야죠!”
“동감합니다. 아까처럼 위협을 하거나, 하다못해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그러게나 말이에요. 저러다 자칫 잘못해서 주도권을 빼앗기기라도 한다면, 상대방의 말에 끌려다니게 될지도 모르는데···. 괜찮겠죠?”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이거 무슨 테스트 하는 거예요? 연기 실력이라든가, 상황 대처 능력이라든가···.”
나와 세르펜스, 유지스, 에드나가 한마디씩 하는 동안.
통신구에서는 챈들러의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고 생각하나 보다.
{ 그만 웃고, 어서 설명하십시오. }
{ 좀 더 간절하게 부, 부탁해 보시죠. }
{ 사실은 그 마인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아닙니까? 편지에는 저 대신 에인젤 주교를 죽여 주겠다고 쓰여 있던 거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럴 능력은 없어 보이고···. 다른 사람을 이용할 수밖에 없을 텐데, 시종장 말고도 당신을 따르는 자가 있기는 합니까? }
다행히 윈스톤은 챈들러의 말에 끌려다니지 않았다.
그리고 챈들러에게 줄을 댄 사람이 있는지 질문하며, 르웰이 부탁한 일까지 수행했다.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오르덴 님은 정말 훌륭한 성기사예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유지스가 감탄하자, 세르펜스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거리며 동의를 표했다.
윈스톤을 자신의 기사로 받아들인 만큼, 그가 일을 잘하는 모습을 확인하니 내심 뿌듯한 모양이다.
“지금 이게 성기사라는 직업과 관련 있는 일인가요? 성기사든 일반 기사든, 아무래도 상관없어 보이는데···.”
에드나가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실은 나도 에드나와 같은 생각이다. 세르펜스가 뿌듯해하는 기색을 보이지만 않았어도, 내가 먼저 따졌을 거다.
하지만 애가 저렇게 좋아하니까, 초 치고 싶지 않아서 조용히 있기로 했다.
{ ···니다. }
방금 챈들러가 무어라 말한 것 같은데, 제대로 못 들었다.
일행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세르펜스를 보며 흐뭇해하느라, 통신구에서 나오는 소리에 집중하지 못한 탓이다.
“잠시 딴생각하느라 놓쳤는데, 누구 들은 사람 없어요?”
“주제넘게 자신을 동정한 시종과 시녀들만 있을 뿐. 기사나 병사 중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세르펜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값싼 동정조차 절실했던 녀석에겐 챈들러의 말이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졌나 보다.
“거 엄청 꼬였네! 아니, 그 전에···. 따르는 기사나 병사가 없다고요? 어쨌거나 공왕이 에인젤 주교를 죽일 계책이 있다고 했으니까, 챈들러가 혹해서 그런 편지를 쓴 걸 텐데···. 용병을 구하면 된다고 꼬셨나?”
“세상 어떤 용병이 성직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겠습니까? 저자가 아무리 어리석다고 한들, 마인이 그런 계획을 말했다면 귀담아듣지 않았을 겁니다.”
확실히 그도 그러하다.
실제로는 악숭이들을 동원할 생각이었다 하더라도, 챈들러는 제 연인이 마인이라는 걸 몰랐으니까 말이다.
{ 정말 생각 없이 받아 적기만 한 것 아닙니까? }
통신구 너머로 들려온 윈스톤의 목소리에 의심이 가득했다. 진심으로 챈들러가 받아쓰기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무, 무슨 그런 소리를···. 에인젤 주교에게 성기사님께서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서, 서로 싸우게 할 계획이었습니다. }
챈들러가 욱하며 계획을 떠벌렸다.
슬슬 악마 숭배 세력에게 ‘이간질’이란 대체 뭘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서로 간에 믿음이 확고하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거늘.’
[성검의 주인]에서도 이간질로 재미를 많이 보더니, 그게 무슨 만능키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다.하기야 [성검의 주인] 속 대륙은 불신이 팽배했고, 믿음은 배신을 당하기 일쑤였으니.
마왕이 이간질 만능주의에 사로잡혔대도 이상할 게 없긴 하다.
“주교님과 오르덴 님이 싸우게 해서, 두 분께서 지쳤을 때 급습하여 신성력을 못쓰게 만드는 주사를 맞힐 생각이었나 봐요.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런 작전을 세워서 알아내야 할 만큼, 대단한 건 없네요.”
유지스가 허무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 그 말대로다.
뭔가 대단한 게 더 있는데, 공왕이 챈들러에게 말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 아까는 저를 불쌍히 여겨서 구해주겠다더니, 이제는 에인젤 주교에게 위험을 알려주겠다니···. 말의 앞뒤가 심하게 맞지 않는데, 정말로 계획을 들으신 게 맞습니까? }
통신구에서 흘러나온 윈스톤의 목소리도 어처구니없다는 뉘앙스가 가득했다.
어찌 들으면 즉석에서 되는대로 지어낸 것 아니냐고 따지는 것 같기도 했다.
{ 소, 솔직히 성기사님···. 다, 당신도 그 주교를 직접 죽이고 싶잖습니까? 남의 손을 빌려 그를 죽인다면. 성기사님은 남은 펴, 평생을 그자에게 묶여 사는 거나 다름없는 삶을 사시게 될 겁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어, 성기사님이 주교를 주, 죽였다면. 분명 제게 감사를 표했을 겁니다. }
{ 당신은 그런 충동질에 넘어가서, 세라투 자작을 직접 죽인 것입니까? }
{ 저, 저는···, 제 의지로···. }
{ 그래서 이제는 만족하십니까? }
윈스톤이 무덤덤하게 질문했다.
그 말을 듣고 났더니,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떠올랐다.
‘윈스톤은 복수에 성공한 뒤 만족했을까?’
그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눈빛이 맑아진 것을 보고 잘 해결됐나보다 생각하며 넘겼었는데.
그 뒤로도 한참이나 세르펜스에게 버려질 것을 염려하던 걸 떠올려보면, 썩 그런 것도 아니었나 보다.
‘복수와 마음속 상처를 지우는 건 다른 영역의 문제였던 거겠지.’
과하게 나를 치켜세우며 선배로 모시겠다고 한 것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의견을 배제하려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다.
어쩐지 취직만 시켜 놓고, 오랫동안 방치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이제는 솔직하게 의견을 낸다거나, 자신의 판단대로 움직여도 괜찮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 지금 감금된 꼴을 보고도 마, 만족하느냐는 말이 나옵니까? 하···. 아버지를 주, 죽일 때만 해도 좋았는데···. 아니, 너무 쉽게 죽어서, 허무했나? 좀 더 고통스럽게 죽였어야 했는데···. 나를 올려다보며, 절절매며 사과하고···. 내가 클로반 그 자식보다 더 낫다는 걸 인정하게 하고 죽였어야 했는데! }
{ 그러게 계획대로 따르지 그랬습니까? }
{ 지, 지금 저를 조롱하시는 겁니까? 스칼렛이 아버지와 손을 잡고 배신하려 했다고···, 아까 그렇게 말했으면서···. }
{ 그 말을 한 건 제가 아니라, 프레이 님입니다. }
그 얘기를 누가 한 것인지는 중요한 것도 아니었건만.
윈스톤은 구태여 챈들러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세르펜스의 업적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지기라도 했는가 보다.
{ 스칼렛, 그 여자의 말은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가 왜, 그런 하찮은 평민의 말에 넘어가서···. 아, 아니. 공왕, 러스티라고 했던가? 그녀가 시킨 대로 해, 했다면···. 계획에 따라 아버지를 죽였더라면. 하지만 그 여자는 아버지의 편을 들어 나를 배신하려고···. }
정신이 나간 듯한 챈들러의 독백을 끝으로 통신구의 불이 꺼졌다.
반대쪽 통신구의 마력이 바닥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