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0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10화(510/1105)
510회
67. 공작님과 계승자들 (38)
어차피 들어야 할 얘기는 전부 들었으니, 더 이상 여기서 뭉개고 있을 이유는 없다.
우리는 집무실에서 나와 챈들러의 방으로 이동했다.
세르펜스는 노크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예고도 없이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오셨습니까?”
윈스톤이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방금까지 ‘에인젤 주교’를 살해할 방법을 캐묻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태연한 모습이다.
우리야 그게 연기였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챈들러는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상태였으니.
그는 손톱을 물어뜯던 것도 멈춘 채, 멍한 눈으로 윈스톤을 쳐다보았다.
‘통신구에서 들었던 목소리로 대충 짐작했지만, 직접 보니 상태가 더 안 좋네.’
세라투 자작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한 것도 아니요, 자신이 클로반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도 아니요.
그 어떤 만족도 얻지 못한 채, 파국을 맞이해 버렸으니.
자신의 어리석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공왕의 잘못이라 말하고 싶은데. 그러자니 자신이 남의 말에 휘둘린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고.
이래저래 정신이 혼미해질 만도 했다.
챈들러가 물어 뜯어댄 엄지는 물론이거니와. 지혈해 놓았던 손바닥에서도 붉은 피가 배어 나오며 붕대를 물들이고 있었다.
“쯧! 저런 자에게 신성력을 쓴다는 건 대단한 낭비지만, 상처를 치료하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재판을 받기 전에 과다 출혈로 죽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가까이 가시면 위험합니다. 제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내가 쯧쯧 혀를 차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나서서 챈들러에게로 다가갔다.
챈들러는 세르펜스가 치료를 마치고 다시 내 곁에 돌아올 때까지, 여전히 멍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내가 들이닥치자마자, 성기사 오르덴이 에인젤 주교를 죽이려 한다고 일러바칠 줄 알았는데.’
말하지 않고 숨길 생각인 건지, 아직 정신을 못 차려서 저러는 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다.
나는 챈들러에게서 시선을 떼고 윈스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튼 수고하셨습니다, 큰 성기사님. 아주 잘하셨어요.”
“···잘한 겁니까?”
윈스톤은 얼떨떨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신이 무사히 주역을 소화해 냈다는 게, 아직 실감이 안 나는 모양이다.
“물론입니다. 마인이 무슨 말로 첫째를 꾀어냈는지. 어떻게 저를 죽일 작정이었는지. 그리고 시종장 외에 따르는 사람이 있었는지. 그 모든 것을 알아내고, 저자가 마인에게 조종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셨잖아요? 막내 신관님도 큰 성기사님이 잘하셨다고 생각하죠?”
“네, 덕분에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오르덴 님께서 주교님께 도움이 되었다는 걸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 주교님의 칭찬을 받는 사람은 제가 될 겁니다.”
이 기회에 윈스톤을 칭찬해 주라고 옆구리를 찔렀더니, 세르펜스가 쓸데없는 말을 덧붙여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것도 칭찬은 칭찬이라고, 윈스톤은 세르펜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세르펜스’로서 저런 소리를 해댔다면 따끔하게 혼냈을 테지만.
녀석은 그저 설정 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이고, 윈스톤도 나름 만족한 듯하니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이게 대, 대체, 무슨···.”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챈들러가 얼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그러고는 나를 한 번 쳐다봤다가 다시 윈스톤을 바라보았는데, 흡사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다.
“어제 만났던 성검 일행의 마법사님께 아주 유용한 마법 도구를 받아서 말입니다. 벽이 아무리 두꺼워도 옆방에서 나는 소리를 엿들을 수 있는 물건인데, 마법사가 아니라도 사용할 수 있다지 뭡니까? 실은 그냥 재밌어 보여서 빌린 거였는데, 아주 요긴하게 잘 썼습니다. 자세한 작동 원리는 제가 마법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옆방에서 다 듣고 있었습니다!”
“주, 주교를 죽이고 시, 싶었던 게 아니었습니까?!”
챈들러가 내 말에는 들은 척도 안 하고 윈스톤을 향해 소리쳤다.
그 마법 도구가 뭐냐고 관심을 가지면 어쩌나 했는데.
막상 열심히 준비한 대사가 깔끔하게 무시당하니 조금 섭섭해졌다.
‘그나저나 윈스톤이 에인젤 주교를 죽일 방법을 물었을 땐, 진심이냐고 의심하더니. 이번에는 에인젤 주교를 죽이지 않을 거냐고 묻는 건가?’
사람이 줏대가 없어도 너무 없다.
“아니었습니다.”
“저, 저를···, 소, 속인 겁니까? 어, 어떻게···. 저는 성기사님을 거, 걱정해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감히!”
“동정받는 건 싫지만, 동정하는 건 좋아하시나 봅니다.”
“······!”
무심하게 던져진 윈스톤의 일침에 챈들러가 할 말을 잃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는 윈스톤의 예리한 일면에 감탄하는 한편.
세르펜스가 ‘동정하길 좋아한다니, 착한 사람인가?’라는 오해를 하기 전에, 바로잡아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
“막내 신관님. 지금 큰 성기사님이 말하는 ‘동정’은 타인을 가엾이 여기며,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못한 처지에 있다고 깔보며, 자신을 위안함으로써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비열함을 말하는 겁니다.”
“어쩐지···. 구해주려 했다거나 걱정했다고 말하면서, 오르덴 님을 경시하는 모습이 모순적이라 느껴지긴 했습니다. 그저 비아냥거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동정해서 하는 말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세르펜스가 이제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챈들러의 목소리에 담긴 건 세르펜스가 아는 동정과는 너무 동떨어진 감정이라서.
그것이 동정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비꼬면서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는 사교계 화법이라고 착각해버린 듯하다.
순수한 아이에게 어른의 더러움을 묻힌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저자의 기준에서 동정이란 상대를 무시하는 행위라서, 그토록 동정받길 거부했던 겁니까?”
“아마도 그런 거겠죠.”
“어째서 그런 착각을 한 건지···.”
“첫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분명 있었습니다. 자작 부인만 해도 그를 아끼고 있는 게, 눈에 보였으니까요. 그런데도 동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건, 자격지심 때문이겠죠.”
세르펜스와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챈들러의 눈빛이 매섭게 날아와 꽂혔다.
나와 세르펜스가 자신을 조롱하려고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오해했나 보다. 본의 아니게 사람 면전에 대고 험담을 한 꼴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동정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얘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안 좋은 예시로 들먹여져서 기분이 나쁜 건 알겠지만, 그럼 안 좋은 행동을 하지나 말던가.
나는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당당하게 폈다.
“어쨌거나 속인 건 죄송합니다. 평범하게 물어본다면 솔직하게 대답해주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이죠. 그래도 괜한 고집을 부리다가 이단 심문관에게 고문당하는 것보다, 이편이 그쪽에게도 낫지 않아요?”
“주교님의 하해와도 같은 자비로움에 감사하십시오.”
세르펜스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잽싸게 간신배스러운 말을 더했다. 어째 굉장히 신나 보였다.
순간 이래도 괜찮은 걸까, 성격을 버리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얘가 언제 이렇게 까불거릴 수 있겠어?’라는 생각에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래도 이번 일을 마치고 제국에 돌아가면, 두 번 다시 아첨꾼 설정을 못 쓰게 해야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세르펜스의 뒷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내가 아첨꾼 설정을 압수하려는 줄도 모르고. 세르펜스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챈들러는 나와 세르펜스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느닷없이 고개를 홱 돌려 윈스톤을 노려보았다.
“다, 당신은···, 성기사라는 사람이 광대 노릇이나 하고. 부,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이런 짓을 한다고 해도, 주교는 당신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습니다! 성기사님은 평생, 에인젤 주교에게 개처럼 부려지며, 무시 받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거란 말입니다!”
내가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보고, 클로반의 머리를 쓰다듬는 세라투 자작의 모습이라도 떠올렸나 보다.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없다는 말도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일 테다.
혹은 공왕이 그에게 한 말이거나.
“당신이 노력에 보답받지 못한 건 안 됐다고 생각합니다. 부당한 대우에 화가 나는 것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를 당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마십시오. 적어도 제게는 긍지가 있습니다.”
윈스톤이 일말의 동요 없이 차분하게.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부당한 대우를 언급하는 걸 보면, 말 뭐시기 백작가에서 지내던 시절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세르펜스가 지레 찔려서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잘못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니, 녀석이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게 느껴져서 기쁘다.
그리고 녀석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준 윈스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주군인 세르펜스가 자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듯 행동할 때마다, 마음이 꺾였을 텐데.
이렇게 굳건한 모습을 보니 감동적이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큰 성기사님, 정말 잘 크셨네요. 훨씬 어린 막내 신관님을 키우느라, 제가 제대로 신경을 못 써 드렸는데.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프레이 님이나 잘 돌봐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말에 담아 전달하자, 윈스톤이 질색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감격에 겨운 목소리로 ‘오르덴 님···!’하고 소리쳤다.
나는 힐끔 곁눈질로 옆에 선 세르펜스에게 시선을 던졌다.
녀석은 양손을 입가로 가져다 댄 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윈스톤이 내 관심을 자신에게 양보해 줬다고 생각하는 거다. 누가 봐도 모를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다.
그러나 윈스톤은 세르펜스의 착각을 정정해 주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침묵을 깬 것은 챈들러였다.
자신을 무시한 거냐며 화낼 법도 한데, 어째서인가 멍해 보이는 기색이다.
“뭐긴 뭐겠습니까? 누군가의 관심을 받지 못해 열등감에 시달리는 댁이랑은 다르게, 큰 성기사님은 스스로의 가치를 믿는 어른으로 자랐다는 걸 증명하는 거죠.”
“중간부터 들어서 어떤 대화가 오고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의 관심과 애정을 독차지한 큰 오라버니께서 관심을 못 받아 열등감에 시달리셨다니···. 어쩐지 억울해지는 얘기네요.”
통통,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르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열려 있는 문 옆에 나란히 서 있는 르웰과 베일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 챈들러가 딴말하지 않도록 문을 닫지 않고 놔뒀었는데, 복도를 지나던 누군가가 소란을 듣고 르웰을 불러온 모양이다.
“가족분들은 괜찮으신가요?”
“···지금 어머니께서 작은 오라버니를 돌봐주고 계세요.”
유지스의 물음에 르웰이 쓸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다는 말은 없었으니. 자작 부인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클로반이 걱정되어, 그의 곁을 지켜주고 있나 보다.
“르웰 님은 괜찮으세요?”
“누군가는 괜찮아야죠. 아 참. 그리고 마물들을 무사히 처치했다는 보고를 받았어요. 몰려든 마물의 수가 꽤 되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어요. 다친 분들도 성검의 주인과 함께 온 성직자님께서 전부 치료해 주셨다나 봐요. 정말 다행한 일이죠.”
다시 한번 유지스가 질문했고, 르웰은 쓸쓸한 표정을 지우고 밝은 목소리로 기쁜 소식을 전했다.
그런 르웰의 모습에 유지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에 관해서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건, 음···. 성검의 주인께서 오시는 중이라고 하니, 직접 들으시는 게 좋겠어요.”
제대로 된 답변을 피하는 거로 보아, 아무래도 놓친 듯하다.
[성검의 주인]에서 타락펜스를 여러 번 놓친 것에 단련이 되어, 이번에 공왕을 놓치더라도 실망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건만.맥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