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1화(51/1105)
51회. 공작님과 취미 활동 (5)
기준점을 미리 낮춰둔 덕일까?
보통 이하의 수준임에도 세르펜스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불만족스러워서 그렇지···.’
매일 세르펜스의 집무실이 있는 4층까지의 계단을 오르내린 덕분에 체력이 꽤 붙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도 자동차도 없는 이 세상의 평균은 좀 다른 모양이다.
“고, 공작···님. 헉, 허억-.”
“예, 말씀해보십시오.”
병 주고 약 준다더니, 세르펜스가 물을 건네며 답했다.
“사, 살려···.”
“이것도 약식으로 진행한 겁니다. 병영 쪽으로 갔으면 지금처럼 쉬지도 못했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체력 측정이 끝나자마자 좌우로 굴러다니고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 아니다. 절대 취미가 될 수 없다!
“저, 하아─. 벌써, 재미없어졌는데···.”
“아직 검은 잡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반만 채워진 물잔 같은 얘기다.
그가 한 말을 달리하자면 검을 쥐기도 전에 나가떨어진 상태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그를 쏘아보자, 세르펜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후우···. 그래서, 공작님은 좋아서 검을 드십니까?”
건네받은 물을 마시고 조금 쉬었더니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렸지만, 말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거 보십시오! 역시 이건 그만두죠?”
기회다 싶어 기세등등하게 말하니, 세르펜스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 한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슬쩍 ‘그것’이 올 듯 말 듯함이 느껴진다.
“죄송합니다, 제 아집 때문에 당신까지···.”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당신’이’가 아니라 당신’까지’라고 말하는 걸 봐서, 그동안 원치 않던 배움을 강요당했던 자신의 과거와 겹쳐보고 있는 모양이다.
‘요즘 상태가 워낙 좋아서 잠시 까먹었는데, 지뢰밭인 건 여전하구나.’
그래도 그 말속에서, 세르펜스가 자신이 당한 일의 불합리성을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성장했구나!
“그냥 오래간만에 운동했다 치면 되죠, 뭘.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정말입니까?”
“아니, 이 공작님이 어디 속고만 사셨나!”
“적어도 당신에겐 많이 속았지.”
그렇게 말하면 또 할 말이 없어진다. 침 먹은 지네처럼 입이 자동으로 다물린다.
반대로 세르펜스는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나직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보다 이제 제대로 생각해봅시다! 좋아하는 음식 물었을 때 방금 먹은 토마토 리조또를 말하질 않나. 가명 좀 떠올려 보랬더니, 눈앞의 제 이름을 쓰시고. 이번엔 취미까지···.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아셨으면 이제부터는···.”
“그게 아니다.”
세르펜스의 표정이 몹시 단호하게 변했다.
단호박을 박력분에 버무려놓아도, 이보다 단호하고 박력 넘칠 수 없었다.
“‘미트볼’이 빠졌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 맞습니다.”
“···그, 그래 보이시네요.”
“이번 취미도 그냥 해본 소리는 아니었습니다.”
아니었으면 뭐였을까.
내가 바닥을 구르며 고생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었던 건가? 이런 서스펜스?
“반쯤 충동적이었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세르펜스가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고개가 살짝 갸우뚱한 것이 고민이 있다기보다는 의문이 생긴 듯한 모습이다.
풀릴 듯 말 듯, 부족한 마지막 공식을 떠올리려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갑자기 왜 저러지?’
세르펜스는 안경을 고쳐 쓰기도 하고, 다시 침음을 흘렸다.
그러다가도 이따금 고개를 반대쪽으로 기울였다.
어쩐지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멀뚱멀뚱 그 모습을 구경했다.
드디어 생각을 정리한 듯, 세르펜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아무래도···.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
“······.”
세르펜스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믿기지 않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표정은 연기가 아닌데?!’
세르펜스의 폭탄 발언에,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세르펜스였다.
“···리벨론 경?”
무슨 말이라도 해달라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너무 놀라워서 말이 안 나오는 상태다. 그 내용이 조금 이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히 경탄스러웠다.
혼자 낑낑대며 노력하다가, 눈앞에서 결과를 내놓았다.
아기가 처음으로 뒤집기 하는 순간을 본 부모의 마음이 이런 것일까?
진한 감동의 물결이 밀려들었다.
‘세르펜스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발견해내다니!’
우리 아이가 달라져도,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 없었다.
너무나도 기특하여 머리라도 쓰다듬어주면서, ‘참 잘했어요’ 도장을 몇 개라도 찍어주고 싶을 정도다.
‘그건 그렇고···.’
그나저나 세르펜스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니, 전혀 생각도 못 했다.
하지만 되짚어 생각을 해보면, 그는 내가 던진 질문들에 참 성실히도 알려줬던 것 같다.
‘특히 암흑가에서는 관광 가이드가 따로 없었지.’
그냥 가이드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수학여행 인솔 교사 같은 느낌이었나 보다.
이렇게 되면 시간이 남을 때마다 병영에 찾아갔던 것도···.
‘이미지 메이킹이 아니라, 자기만족이었나?’
나름대로 자각 없이 취미 활동을 즐겼는데, 그들이 불편해하는 바람에 실망했었나 보다.
어쩐지 조금 걱정되는 취향이다.
그것이 취미가 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잘하면 선생님이지만, 삐끗한 순간 훈수충으로 전락해 버린다.
‘이유가 뭘까?’
보고 있기 답답해서라면, 처음부터 내게 검술을 가르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보다 못한 남들을 보며 우월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전 공작님을 그렇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예? 누가 당신에게, 그. 으음···.”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 치려던 세르펜스가 중간에 말끝을 삼켰다.
그 자신도 무언가 느끼는 점이 많았나 보다.
“그래도 내가 상사라는 사실은 잊지 않았길 바란다.”
세르펜스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턱 끝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 태도가 오만하기 짝이 없었지만, 부정할 생각은 아예 접은 모양이다.
접은 정도를 지나서, ‘앞으로도 나를 키우는 것을 허락해 주도록 하지.’라고 말하는 것 같은 기묘한 상황.
‘쟤는 자기가 한 말이 어떤 식으로 해석될지 알고서 저러는 거야?’
원래 이런 남의 흑역사는 모아놔야 한다.
그러다 잊을만할 때쯤 언급해서 떠올리게 하고, 그 후로 두고두고 놀려 먹는 게 친구 사이의 정이다.
“그보다,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
“육아선언이요?”
“······.”
“아! 어째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시게 된 건가, 궁금해져서 말입니다.”
“그걸 대체 어떻게 표현하면 그따위로···.”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가 이마를 짚었다.
앞으로 세르펜스는 시온어를 좀 더 익혀야겠다.
나는 척하면 척인데, 저쪽은 아직 수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듯싶다.
“굳이 말하자면, 당신이 저를 보며 느끼는 것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하는데···.”
“길냥이가 알고 보니 유기냥이었는데, 간택 받아 키워보니 개냥이었다?”
“···냥?”
이 세계에서는 저런 줄임말을 안 쓰나 보다.
시온어가 부족한 그는 무슨 암호라도 들은 표정으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군···. 하지만 어조 상으로 보아, 성장의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게 맞는가?”
“결과적으로는, 네. 그렇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는 건 세르펜스가 누군가를 가르치며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인가?
‘나와 비슷한 이유일 거라 말한 게 좀···. 혹시 이것도 나 따라 하는 건 아니겠지?’
살짝 걱정되긴 했으나, 참된 스승을 만나서 인생이 바뀌고. 그를 존경하게 되어 장래 희망을 교육자로 잡는 경우는 흔한 일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나 자신을 엄청 추켜세우는 것 같나?’
그래도 그에게 인간적인 삶과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 등을 가르쳐 준 사람이 한 명도 없었으니···.
“이걸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아, 천천히 편하신 대로 말씀하셔도 됩니다.”
계속 그를 올려다보려니 목이 슬슬 뻐근해져서,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세르펜스는 주저하다 옷이 더러워지지 않게 추스르며, 쪼그려 앉았다.
“그러게 저처럼 편하게 갈아입고 오시지, 폼 잡다가 그게 뭡니까?”
“······.”
“죄송합니다, 어서 말씀하시죠.”
삐져서 그가 입을 다물어 버리기 전에 얼른 사과했다.
나의 말을 그냥 못 들은 걸로 치부하기로 했는지, 세르펜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의 검을 봐주는 것은, 어디까지나 겉치레였습니다.”
“그럼 언제부터 바뀐겁니까?”
“이전에 다 같이 노력하고, 또 서로 도와야 한다고. 제게 그리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내가 기차에서 했던 이야기다. 기억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책임이며, 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함께 싸워나가야 할 우군이라고 생각하니···. 그들이 성장하고, 강해지고. 벽을 깨고 기뻐하며 내게 감사를 표하는 모습들이 이전과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취감과 보람 또한 느끼게 된 것 아닌가 합니다.”
세르펜스의 말 속에서. 그동안 내가 했던 말을 그가 얼마나 깊이 생각하고, 되뇌고, 고민했는지.
그런 것들이 느껴졌다.
‘그냥 어깨의 짐을 조금 덜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했던 말인데···.’
그는 그 말 속에서, 그 이상의 의미를 발견하고. 또,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었다.
스스로 보람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하니, 생각 없이 따라 하는 건 아닌 듯하다.
그런 이유라면 안심해도 되겠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저는 역시 당신이 검을···. 본격적이라 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단련을 했으면 합니다.”
“네?”
“저번에는 내가 미리 도착한 상태라 괜찮았으나,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잖은가.”
“늦게 나오셔서 전 별로 안 괜찮았습니다.”
“···어쨌든. 적어도 제가 도착할 때까지, 도망은 무리더라도 조금이나마 시간을 끌 수 있었으면 한다. 물론 강요는 아니니, 싫으시다면 거절하셔도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씁쓸하게 웃는 그의 모습을 보니, 싫다는 말이 안 나온다.
가끔 내가 걱정된다는 투로 얘기하긴 했으나, 그때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다.
이전의 걱정들이,
‘너, 그따위로 살다간 한 방에 훅 간다?’
···라는 식이었다면, 이번은 그냥 진심으로 나의 무사를 기원하고 있었다.
“당신은 제게 있어 가장 믿을 만한 우군이잖습니까···? 그러니. 아, 부담감 느끼시라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거부하셔도 되니 편히 말씀해주십시오.”
이건 내가 아니라, 그 누가 들어도 완벽한 ‘답정너’식 말하기였다.
“역시, 취미는···.”
“···취미는?”
그다음은 어떻게 되느냐는 듯, 세르펜스가 어딘가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하나···.’
어린이집에서 공용(公用)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어린아이가 집에 돌아가기 전.
그것을 두 손으로 꼬옥 쥐고, 하루만이라도 빌려 가면 안 되느냐고 물어오는 듯한 표정이다.
그래, 딱 그거다.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취미는 검술이 최곱니다. 그보다 훌륭한 취미는 이 대륙에 존재하지 않죠.”
세르펜스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 * *
세르펜스가 조건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수련은 재개되었다.
기본적인 검술을 배우긴 했지만, 실전에서의 공격은 과감히 포기했다.
‘어차피 안될 거라나?’
그의 가르침은 주로 체력 단련과 회피를 위한 순발력과 방어 위주로 진행됐다.
수련의 취지가 ‘검술을 배우자’에서 다른 것으로 바뀌어 버린 탓에, 자세는 기본만 배우고 실전 대응을 위한 대련 위주였다.
‘오히려 이걸 대련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
나는 그냥 세르펜스의 공격을 피해내거나 막을 뿐.
못 해내더라도 그가 휘두른 목검은 내게 닿기 직전에 멈췄고, 그것에 대한 충고나 조언을 들었다.
“리벨론 경의 신체 능력으로 봤을 때, 방금의 공격은 충분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
“예? 안되던데요?”
“다시 해봅시다. 아까 위치와 자세가···. 네, 그 상태로 무게 중심을 왼발에, 그리고 허리를 살짝 비틀어서···.”
“이야, 이게 되네?!”
내 몸을 내가 움직이는 것이 아닌 것 같은 신기한 감각이다.
원거리 대응책으로는, 세르펜스가 원거리에서 신성력을 뭉쳐 쏘아내는 것을 피해내는 연습을 했다.
오러가 없는 나에게, 쳐내는 것은 의미가 없기에 철저하게 뛰고 바닥을 굴러야 했다.
공격을 맞을수록 체력이 회복되었고, 회복된 만큼 더 굴렀다.
‘이거 뭔가···. VR 게임 같은데?’
똑같이 바닥을 굴러도, 뚜렷한 목적 없이 구를 뿐인 군대식 얼차려와는 확실히 다르다.
공격을 피해낸다는 명확한 목표가 제시되었고, 내 실력에 맞춰가며 아슬아슬하게 쏘아지는 것이다 보니 완전···.
“탄막 회피 게임하는 느낌인데? 그것도 레벨링이 아주 잘 되어있는···.”
“탄막 회피···게임? 그건 어디의 불법 투기장에서 행해지는 겁니까? 레벨링은 또 뭐지?”
나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에, 세르펜스가 얼굴을 굳히며 물어왔다.
그의 머릿속에서 화살과 마법이 빗발치는 공간에 갇혀서,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 다니는 아수라장이 그려진 모양이다.
“그, 그건···. 그것도 선택의 날 이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설명할 수 없을 땐 미루는 게 상책이다.
그리고 요 며칠 동안 세르펜스에게 검을 배우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마법을 익히는 것에만 천재성을 발휘하던 아니마와 다르게, 만능형 천재인 세르펜스는 가르치는 것에도 재능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