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2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22화(522/1105)
522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1)
본인이 정한 설정이 그렇다는데 억지로 후드를 벗으라고 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무엇보다 유지스는 얼굴이 너무 튀어서, 후드를 벗는 순간 ‘변장 및 잠입’이 주 전공이라는 설정에 오류가 생겨 버린다.
그리고 설정 하나가 깨지면 다른 설정까지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한 연쇄 작용이다.
나는 설정 유지를 위해 유지스의 후드에는 신경 끄고, 그 대신 다른 것을 신경 쓰기로 했다.
가령 열한 명이라는 인원수에 맞지 않는 찻잔의 개수라던가.
[성검의 주인]에서 성검 일행은 종종 야영을 하며, 간단한 음식을 해 먹곤 했다.지금도 그건 마찬가지겠지.
“그보다 성검의 주인께서는 여행하려면 이것저것 많이 챙겨 들고 다녀야 할 텐데. 짐이 없는 걸 보면 아공간 주머니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지금도 가지고 계시면 컵 두 개만 꺼내 주실래요? 베일 저하랑 우리 큰 성기사님 차 좀 드리게.”
당연히 휴마누스가 아공간 주머니를 가지고 있을 줄 알고, 그를 향해 말을 했건만.
엉뚱하게도 아니마가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투박하지만 튼튼해 보이는 컵을 두 개 꺼냈다.
‘세르펜스가 개인적으로 건넨 첫 선물을 뺏긴 건가···?’
그렇다고 해도 아니마가 가지고 다니는 건 굉장히 의외다.
일행들을 잘 챙기는 리에나도 아니고.
나는 어떻게 된 거냐는 표정으로 휴마누스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굳이 내가 눈치를 주기도 전에, 휴마누스는 이미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리는 중이었다.
세르펜스를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정작 세르펜스는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흠, 흠! 아공간 주머니는 제 것이긴 한데, 아니마가 연구해 보고 싶다고 해서 잠깐! 빌려주게 되었습니다. 새 아공간 주머니를 만들어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나···?”
휴마누스가 헛기침과 함께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세르펜스는 휴마누스의 변명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애초에 설정 때문에 뭐라 반응할 수도 없다.
세르펜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아니마가 꺼내준 잔에 차를 따라, 윈스톤과 베일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아···, 잘 마시겠습니다.”
둘 다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다.
그래도 그들은 막내 신관이라는 세르펜스의 설정을 이해하고, 얌전히 차를 받아 마셨다.
‘그나저나 아니마가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에드나일 텐데···.’
에드나에겐 이미 그녀 몫의 아공간 주머니가 있다는 걸 아직 모르나 보다. 아니면 직접 만들어 준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거나.
엄연히 따지자면 에드나가 지닌 아공간 주머니는 빌린 것에 가까우니까,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클 것 같기도 하다.
비록 공격용 마법은 아니지만, 아니마가 먼저 마법 연구에 관심을 가진다는 건 매우 좋은 현상이다.
특히나 아공간 주머니에 적용된 마법 수식은 매우 무시무시한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면, 물건을 꺼내려다가 호로록 빨려 들어가서 영영 나올 수 없게 된다고 했던가···?’
아니마도 그 위험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을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드나에게 줄 선물이니, 어련히 안전하게 잘 만들겠지.
“듣기로는 꽤 위험한 마법이라서, 현재는 연구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던데···. 괜찮은 거예요?”
설정 놀이가 부담스러워, 본의 아니게 묵언 수행을 이어 나가던 에드나가 자진해서 입을 열었다.
아니마의 마법 실력을 믿긴 하지만, ‘호로록’이 무섭긴 무서웠나 보다.
걱정 가득한 에드나의 물음에 아니마의 표정이 행복에 젖었다.
“일부러 소매치기를 당하면, 마법이 제대로 적용됐는지 안전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까 괜찮아요.”
정의의 편인 성검 일행 소속 마법사가 저런 얘기를 웃으면서 해도 괜찮은 걸까?
소매치기가 범죄인 건 맞지만, 지은 죄에 비해 ‘호로록’은 너무 과하다.
에드나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짐짓 인상을 찌푸리며, 엄하게 아니마를 혼냈다. 아니, 그럴 줄 알았다.
“그런 실험을 하려거든 악마 숭배자들을 이용하세요. 소매치기가 나쁜 짓이긴 하지만, 개중에는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으니까요.”
“앗! 그렇네요, 신관 언니 말이 다 맞아요.”
아니마가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움직임에 따라, 몽실몽실 솜털 같은 아니마의 하늘색 곱슬머리도 함께 흔들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보였는지, 에드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마에게 에그 타르트를 내밀었다.
“아니마 님···이라고 하셨죠? 혹시 단 거 좋아하시면, 제 것까지 드실래요?”
“좋아하고 말고요! 그런데 신관 언니는 안 드셔도 괜찮아요?”
“제가 요즘 살이 쪘는지, 아침에 일어나기가 부쩍 힘들어진 느낌이라···. 아니마 님께서 대신 먹어주시면 기쁠 것 같아요.”
에드나가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한 윈스톤이나 엘프인 유지스. 그리고 그냥 안 찌는 세르펜스만 보고 지내다가, 에드나의 말을 들으니 이다지도 반가울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나 말고도 살이 찌는 사람이 존재한다니! 갑자기 에드나를 향한 친근감이 마구마구 샘솟기 시작했다.
“그거 알아요, 신관 언니? 신관 언니를 보고 있으면 우리 언니가 생각나요. 특히 그 라벤더 같은 다정한 연보랏빛 눈동자가···. 그래서 그런가,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이인데도 엄청 친근하게 느껴지는 거 있죠?”
원래 친근한 사이인 주제에. 아니마가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듯, 호들갑스럽게 떠들어댔다.
평소대로 에드나와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설정 놀이도 즐기고 싶어서 나온 타협점이 바로 저건가 보다.
‘그나저나 바쁜 사람 앞에 두고, 이렇게 잡담만 떠들어대도 괜찮은 건가?’
불현듯 걱정되어, 나는 르웰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르웰은 서류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할 듯이 고개를 처박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에드나와 아니마가 무어라 떠들든 신경도 안 쓰는 모습이다.
베일은 그런 르웰의 옆에 앉아, 자료를 뒤적거리다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짚으며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말했다.
언뜻 비용이 어쩌고 하는 얘기가 들렸다.
‘마물로 인한 피해 복구에 관한 사안은 진작 처리했을 줄 알았는데, 아직 다 못했나? 아니면 돈 나갈 데가 더 있나?’
건물이고 땅이고 멀쩡한 게 하나도 없을 테니. 하루 이틀 만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긴 했다.
하지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당장 처리할 수 있는 서류 작업은 최대한 빨리 끝내고, 복구에 필요한 자재부터 공수해 와야 한다.
이후 들어갈 비용은 차차 산정해 나가야 할 부분이고.
그것 말고도 신경 써야 할 일이 산더미일 테니까. 복구 작업과 관련된 일로 시간을 많이 뺏겨서는 안 된다.
세라투 령의 행정 업무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해야 하고, 죽은 세라투 자작이 운영하던 사업들도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세대교체로 인한 혼란을 틈타, 기사들이 허튼 생각을 하기 전에 군권을 휘어잡아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반란도 준비해야 하니까···.’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 아래에서 내 옆구리 살을 잡는 은밀한 손길이 느껴졌다.
이 방향은 세르펜스가 앉은 쪽이다.
에드나가 살 얘기를 운운하니까, 나도 살이 쪘는지 확인하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내 에그 타르트를 탐내고 있거나.’
어림도 없다.
에그 타르트가 배정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뭣 하러 세르펜스에게 내 몫을 준단 말인가.
윈스톤이야 단 것을 안 좋아하니 상관없겠지만.
누군가에게 내 에그 타르트를 줘야 한다면, 밤새 열심히 일했고 지금도 일하고 있는 베일에게 주는 게 맞다.
“저하, 이거 드세요. 일할 땐 당분을 섭취해 줘야 머리가 잘 돌아가는 법입니다.”
“아, 감사합···.”
“막내 신관님은 신경 쓰지 마세요.”
“···네.”
베일은 자신을 노려보는 세르펜스의 눈빛에 잠시 위축되었지만, 그냥 설정이려니 생각했는지 순순히 내가 건넨 에그 타르트를 받았다.
그에 세르펜스는 설정의 힘을 믿고 시무룩한 기색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다음부터는 디저트를 준비할 때, 넉넉하게 준비해 오라고 해야겠네요.”
르웰이 펜을 내려놓으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자꾸 떼쓰는 걸 받아주면 애 버릇만 나빠지니 그러지 말라고 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뭔가 먹을 때마다 베일과 윈스톤이 인원수에서 제외되니까. 르웰의 말대로 넉넉하게 준비하는 게 낫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제 얘기를 시작해도 될까요?”
“되고 말고요.”
내 대답에 르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말을 꺼내는 대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어깨를 쭉 편 모습이 무척이나 당당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세라투 가문은 제가 이어받기로 결정됐습니다. 어제저녁 어머니께서 계승에 관련된 서류들을 전부 작성해 주셔서, 이젠 임시 가주가 아닌 진짜 가주입니다. 물론 영지에 관한 건 왕실의 허락이 필요하니, 서류를 올리고 그게 처리된 후에야 영주라 불릴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리 중요하지 않겠지요.”
마지막 한마디를 입에 담으며, 르웰은 사뭇 영악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의 바스툴 왕실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그녀가 따라야 할 군주는 현 바스툴 왕실이 아니라 자신의 옆에 있으니. 그들의 허락 따위는 받지 않겠노라는 선언이다.
“그럼 이제는 르웰 님이 아니라, ‘세라투 자작’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요?”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불리는 게 맞긴 하죠.”
“뭔가 죽은 세라투 자작이 떠올라서 기분이 되게 찝찝한데···.”
직접 만나 본 적 없는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은 ‘현 프라시더스 공작’과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앞에 ‘전대’라는 단어가 붙지 않는 이상. ‘프라시더스 공작’이라 하면 세르펜스의 얼굴이 먼저 떠오르니까.
하지만 ‘세라투 자작’은 다르다.
전대 세라투 자작과는 얼굴을 보면서 기 싸움도 하고, 뒤에서 욕도 하고, 속으로 화도 내고.
안 좋은 쪽으로 강렬하게 인식된 터라, 르웰을 보면서 ‘세라투 자작’이라 부르려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도 그 호칭은 별로 내키지 않는군요. 기왕이면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제가 모시는 분에게 받은 직위로 불리고 싶으니.”
“그러려면 빨리 베일 저하를 왕위에 올려야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가주가 되었으니, 축하연을 핑계로 뜻을 같이할 만한 귀족들을 불러들일 생각입니다. 방금도 그것에 관한 서류를 보고 있었고요.”
아까 베일과 둘이서 비용이 어쩌고 하며 속닥거렸던 게, 연회에 관련된 얘기였나 보다.
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듯해서 다행이다.
“축하연에 관한 얘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저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물으셨죠? ‘세라투 자작’이라 불리는 건 저도 내키지 않고, 부르는 여러분께서도 내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계속 이름으로 불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아무리 ‘여러분’과 제가 가까운 사이라고는 하나, 남들은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르웰이 은근슬쩍 성검 일행까지 한데 묶어, 친분을 확정시했다.
그러면서 연회장에 모인 이들을 한 번씩 슥 둘러보았다.
여기서 ‘나는 아직 데면데면하니까, 빼 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분위기 파악 능력이 떨어지는 거다.
다행히도 이 자리에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저를 보고 운 좋게 가문에 일어난 화를 피해서 가주가 된.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귀족 영애라고 생각하겠지요. 제가 여러분께 이름으로 불리고, 그것을 묵인한다면. 그런 인식은 더욱 강해질 겁니다.”
르웰의 말대로다.
세상에는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보면서, 누군가를 쉽게 얕잡아보고 무시하려 드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녀는 아직 스무 살도 채 안 되었고, 정식으로 후계자 수업도 듣지 못했으며, 그렇게 이어받은 작위는 고작 자작에 불과했다.
‘반면에 세라투 가문의 힘은 누구라도 탐낼 수준이었으니···.’
르웰에게는 작은 흠조차 허락되지 않으리라.
그녀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 하거나, 이용하고자 접근하는 자들이 넘칠 테니까.
“그러니 지금은 ‘영주 대리’ 혹은 ‘세라투 가문의 가주’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르웰의 태도는 부탁을 한다기보다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깔끔하게 그냥 ‘가주님’으로 갑시다!”
“그래 주셔도 되고요.”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의견을 내자, 르웰이 마음에 든다는 듯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