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2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23화(523/1105)
523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2)
“그럼 본격적인 얘기를 하기에 앞서, 황태자 전하께서는 언제까지 이곳에 머무실 예정인지 듣고 싶습니다.”
르웰이 휴마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중한 태도로 보아, 성검 일행을 내쫓고 싶어서 묻는 건 아닌 듯하다.
앞으로 진행될 계획에 그들을 끼워 넣을 수 있는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어제는 쉬느라 아직 일행들과 얘기하지 못했지만, 늦어도 오늘 오후 중에는 떠날 생각이네.”
휴마누스가 ‘그래도 괜찮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아니마가 비탄에 잠기긴 했지만, 나머지 두 사람. 리에나와 푸로르는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3 대 1로 휴마누스의 의견이 통과되었고, 다수결의 원칙에 의해 아니마의 불만은 묵살 당했다.
인생의 쓴맛을 본 아니마는 달콤한 에그 타르트를 먹으며, 공포 영화의 음산한 효과음처럼 ‘우우우’ 하는 소리를 냈다.
에드나와 더 붙어있고 싶다고 시위하는 거다.
“아니마, 우리는 마인을 쫓아야 해. 마물들이 날아간 방향으로 가다 보면, 목격자도 있을 거야.”
“알아. 더 늦으면 행적을 완전히 놓쳐버린다는 얘기를 하려는 거잖아?”
“이해해 줘서 고마워.”
휴마누스의 말에 아니마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홱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니마에게 있어 에드나는 황금 같은 휴가나 다름없고, 공왕을 쫓는 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업무와 마찬가지다.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고대하고 고대하던 휴가를 반납하고 출근해야 한다면. 이 세상 그 누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으랴.
갑자기 휴마누스가 악덕 사장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휴마누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아!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인 러스티의 성향을 생각해 봤을 때. 일부러 우리가 이곳을 떠나도록 왕국 밖으로 유인해놓고, 바스툴 왕실과 결탁하여 무언가 일을 벌일 가능성은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내가 휴마누스를 바라본 이유와는 눈곱만큼도 상관없는 딴소리였다.
[성검의 주인]에서 타락펜스가 바스툴 왕국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얘기해 준 게, 공왕의 다음 계획을 짐작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서 다행이다.휴마누스의 집 나간 눈치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건, 조금도 다행스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더 있었다.
“아무튼 마침 잘됐네요. 첫째를 신전에 넘기러 직접 다녀와야 하나 고민했는데. 혹시 가시는 길에 신전이 있다면, 첫째를 데려가 주실 수 있습니까?”
세라투 가문의 기사와 병사들에게 챈들러의 이송을 시키는 건, 여러모로 불안 요소가 크다.
악숭 세력의 습격을 받는다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뿐더러.
아주 만약에.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챈들러에게 동정을 느껴서 사고를 가장하여 일부러 풀어주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웃 영지에 있는 신전에 연락해서, 와서 사람 좀 데려가라고 할 수도 없다.
‘뭐, 부르면 오긴 오겠지만.’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건 교단에서도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 대외적으로 우리 일행의 리더는 세르펜스였다.
여차하면 성직자들 사이에 ‘제국의 프라시더스 공작은 교단 소속도 아닌 주제에 성직자들을 오라 가라 한다더라.’라는 소문이 돌지도 모르는 만큼.
고작 챈들러 따위를 이송하기 위해, 그들을 부르기에는 조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
“물론입니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고.”
휴마누스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겸사겸사 자작 부인과 클로반도 데려가라고 말할까 하다가, 챈들러의 얼굴을 보기 껄끄러워할 것 같아서 그만뒀다.
‘두 사람은 르웰이 알아서 호위를 붙여 신전으로 보내겠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무의식중에 시선이 르웰 쪽으로 향했다.
대화에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았다면 모를까. 도중에 옆길로 샜지만, 처음 말문을 연 사람은 르웰이었다.
그렇기에 서류를 보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일에는 손도 못 대고 애꿎은 펜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마저 얘기해도 될까요?”
“아, 넵. 하세요.”
“사실 성검의 주인 일행분들께서 내일까지 머물러 주시길 바랐으나, 마인을 쫓기 위함이라 하니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르웰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본래라면 휴마누스가 떠나겠다고 말하자마자 나왔어야 하는 말이다.
아니마의 우우우 하는 소리에 밀리고 밀려. 언제 말을 시작해야 하나 기다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내가 다 미안하다.
그래서 나는 르웰의 말에 집중하고 있다는 티를 팍팍 내기로 했다.
“왜 하필 내일이죠? 내일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내일 영지민들 앞에서 연설할 예정입니다.”
“오, 그래서 그랬군요!”
“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어쩌다가 돌아가셨는지. 그에 관해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진 않더라도, 다음 영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밝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고 말고요!”
“그리고 어제 발생한 전투에 관한 것도 이야기할까 합니다. 그때 성검의 주인이신 황태자 전하께서도 한말씀해 주시길 바랐지만. 어쩔 수 없으니, 주교님께서···.”
“거절하겠습니다.”
나는 르웰의 말이 끝맺음 되기 전에, 그녀의 말을 끊고 정색했다.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르웰이 연설을 한다고 모든 영지민들이 우르르 몰려들진 않겠지만, 적어도 수십 명은 족히 모일 거다.
어쩌면 백 명이 넘을지도 모르고.
‘너무 부담스럽잖아! 무슨 얘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런 건 나보다 세르펜스가 제격인데, 어째서 프레이는 막내 신관인 거지?’
나에게 주교라는 직책을 부여한 교황이 원망스러울 지경이다.
할 수만 있다면 세르펜스와 역할을 바꾸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르펜스를 쳐다보자, 세르펜스가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딴청을 부렸다.
얄미운 그 모습에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세르펜스가 나를 외면했으니.
이제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가주님께서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날에, 어찌 제가 끼어들 수 있겠습니까? 저나 성검의 주인께서 나서서 연설한다면, 영지민들은 분명 안심하겠죠. 그리고 사람들은 가주님께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정말 가주님께 득이 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목소리를 깔고 짐짓 근엄한 척 말하며, 르웰의 표정을 살폈다.
빠져나가려고 헛소리하는 중이라는 걸 들키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르웰은 내 얘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신중한 낯으로 생각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나는 긴장되는 마음을 달래려 공연히 차를 들이켜며, 결과가 나오길 기다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르웰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렇군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이 자리에 올랐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으니. 주교님의 말씀대로 연설은 저 혼자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매우 반가운 얘기다.
나는 테이블 아래로 주먹을 꽉 쥐며, 속으로 ‘아자!’ 하고 쾌재를 불렀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계속 세라투 령에 머무르는 것도 아닌데, 그런 인식이 퍼지면 쓰나요? 제가 사람들 앞에 나서서 연설하기 싫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 가주님 잘되라고 이러는 겁니다. 이해하시죠?”
“방금 하신 말씀 때문에 조금 의심스러워졌지만···. 여기서는 모르는 척 넘어가 드려야겠지요?”
“아! 방금 그 말을 굳이 하지 않으셨다면 100점 만점이었는데!”
“동감입니다. 생각이 통했네요.”
르웰이 실소를 흘리며 여유롭게 내 말을 되받아쳤다.
그렇게 나와 르웰이 농담을 주고받고 있으니, 어째서인가 베일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저 얼굴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학교를 빛내야 할 우등생이 불량아와 어울리는 걸 목격해버린 선생님의 얼굴?
맞다. 딱 그거다. 내가 떠올렸지만, 이보다 적절한 비유는 없으리라.
지금 성적만 유지하면, 이름만 대면 남들 다 아는 유명 대학에 입학하는 건 따 놓은 당상이건만.
불량아와 어울리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을까. 혹은 이대로 공부를 손에서 놓아버리는 게 아닐까.
그렇게 노심초사하는 얼굴이다.
‘즉, 내가 르웰에게 나쁜 물을 들일까 봐 걱정된다는 거지?’
내가 베일에게 해준 게 얼마나 많은데, 돌아오는 대우가 이따위라니.
괘씸하기가 이를 데 없다.
마음 같아서는 베일이 혼자 삽질하던 흑역사를 들춰내고 싶었지만, 어른인 내가 참기로 했다.
“연설은 저 혼자 하겠지만. 그래도 축하연에는 참석해주길 바랍니다.”
“그야 당연하죠. 그보다 축하연이면 귀족들이 상당히 많이 모일 텐데, 거기서 바로 반란 얘기를 꺼내려고요?”
“현 바스툴 왕실에 불만이 있는 이들에게만 초대장을 보낼 생각입니다. 물론 제가 감당할 수 있는 가문에 한해서 말이지요.”
“그게 맘대로 되진 않을 텐데···.”
시작도 하기 전에 초 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부정적인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세라투 가문의 부는 온갖 사업들을 통해 축적된 결과물이다. 그러니 전대 세라투 자작의 인맥이 넓은 건 당연하다.
개중에는 세라투 가문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거대 가문도 있을 터.
예의상이라도 초대장을 보내야 하고, 초대장을 보내지 않아도 깽판 치러 찾아올 공산이 크다.
‘그들에게 르웰은 만만한 먹잇감일 테니까. 후견인을 자처하며 세라투 가문의 힘을 그대로 꿀꺽하려 들겠지. 만약 그런 놈들이 어쩌다 베일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그땐 진짜로 망하는 거다.
섭정 자리를 노리고 베일 쟁탈전을 펼치다가, 현 바스툴 왕실에 들켜서 다 같이 파멸을 맞이하는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 이유로. 사람을 모으는 건 좋지만, 세라투 가문보다 힘 있는 귀족 가문은 피하는 게 좋다.
르웰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가문들에만 초대장을 보내겠다고 말한 걸 테고.
“마물들 때문에 영지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사망자는 없지만,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들은 세상이 무너진 듯한 슬픔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영주셨던 아버지께서 불미스럽고도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죠.”
갑자기 르웰이 동문서답 같은 소리를 했다.
죽은 세라투 자작을 언급할 땐, 실로 수치스럽다는 듯. 손바닥으로 자신의 한쪽 뺨을 감싸며, 한숨을 내뱉기까지 했다.
과장된 저 동작으로 보아, ‘초대장을 보내지 않은 가문에는 이러이러한 변명을 댈 예정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첫째 오라버니는 마인에게 이용당해 존속 살해를 저질렀고, 둘째 오라버니는···. 제정신이 아니시죠. 이런 상황에서 어찌 제가 호화로운 연회를 열 수 있겠습니까? 이번 축하연은 정말 어쩔 수 없이. 관례를 따르기 위해 여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연회에 대단한 분들을 차마 모실 수 없어서, 초대장을 보내지 않겠다. 그거죠?”
“네. 고작 자작 작위를 이어받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요. 나중에 영주가 되고 난 후. 성대하게 연회를 열어, 귀하신 분들을 정중하게 모시고 싶다. 그런 식으로 편지를 쓴다면 다들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르웰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초대장을 보내지 않고도 상대방의 기를 세워주겠다는 얘기다.
르웰은 정식으로 영주가 된 뒤, 진짜로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긴 할 거다.
다만, 그때쯤이면 르웰은 그들보다 더 높은 신분과 강한 힘을 갖추게 된 이후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