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2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29화(529/1105)
529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8)
기도문 마지막 구절을 바꾸냐 마느냐를 두고, 베일과 한창 옥신각신하다 보니 어느새 연회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르웰의 명을 받은 시종이 찾아온 것도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베일은 나에게 ‘제발 진지하게 임해 달라.’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을 쏘아 보낸 뒤 투구를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거 말고는 적당한 마무리 문구가 떠오르지 않는 걸 어떡해?’
자기가 정해줄 것도 아니면서 무조건 빼라고만 하니, 괜히 반항심만 커졌다.
나는 베일의 시선을 못 본 척했다.
“주인님의 명을 받고, 여러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이 르웰을 ‘주인님’이라 칭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르웰이 진짜 가주가 되었다는 걸 실감하게 하는 호칭이다.
우리는 응접실을 나와 시종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축하연이 열리는 곳은 우리가 인원수 문제로 응접실 대신 이용했던 작은 연회장이 아닌, 넓은 홀이 있는 메인 연회장이라고 했다.
그래 봤자 악단을 부르지 않아서, 무도회 같은 건 즐길 수 없겠지만.
“연회장 근처에 주교님을 위한 개인 휴게실을 준비해 두었으니,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으시면 됩니다.”
앞장 서 걸어가던 시종이 고개만 돌려서 나를 바라보며 설명했다.
그럴 거라고 예상했던 터라,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보통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연회장 근처에는 참석한 손님들이 음료를 쏟는 등. 불의의 사고로 인해 옷을 갈아입거나, 화장을 고칠 수 있는 휴게실이 여럿 준비되어 있기 마련이다.
황실 연회장에도 그러한 장소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휴식 공간이라기보다는 파우더 룸에 가까워서 실제로 이용해 본 적은 없다.
“이 방을 쓰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다른 일행분들을 연회장으로 모셔다드린 뒤, 다시 오겠습니다.”
“연회장이 바로 코앞인데, 다시 오긴 뭘 다시 옵니까? 다 갈아입으면 제가 알아서 연회장으로 갈 테니까, 번거롭게 그러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꼰대 설정에 어울리게 일부러 툭툭거리며 말했는데도, 시종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보니 르웰이 시종장을 새로 뽑을 예정이라고 하던데, 그 후보 중 한 명이려나?
시종은 일행들을 데리고 연회장으로 향했고, 나는 문이 열린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내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오며 휴게실 문을 닫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따라 들어오는 거 아닙니까?”
“주교님의 수발을 드는 건,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세르펜스가 그리 말하며, 들고 있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리고 가방을 열어 예복을 꺼냈다.
내 예복이 자신의 손에 있는데, 따라 들어오지 않았으면 뭘 어쩌려던 거냐는 뜻이다.
“뭐, 그것도 그렇네요.”
나는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고, 세르펜스가 건넨 예복을 집어 들었다.
녀석은 진짜로 옷 시중을 드는 대신에 내가 벗은 옷가지를 개켜서 가방에 넣었다.
“그런데 제 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 그렇게 이상합니까? ‘룩스메아 님이 보우하사, 우리 대륙 만만세’가 대체 어떻다고, 베일은 학을 떼며 싫어하는 거죠? 도통 이해가 안 가네?”
내가 소매에 팔을 집어넣으며 질문하자, 세르펜스가 정말 몰라서 묻는 거냐는 눈빛을 보내왔다.
진짜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숙하기만 한데, 대체 뭐가 문제지?
옷을 갈아입는 것도 멈추고 깊이 생각해 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세르펜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전부터 생각해 오던 건데, 혹시 그 마지막 구절은···.”
세르펜스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멈칫하더니, 가방을 닫은 후 내게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귓속말로 하다 만 얘기를 마저 했다.
“선우가 살던 세상의 노래에서 따온 건가?”
“엇?!”
내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세르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다시 한 번 한숨을 푹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세르펜스가 ‘애국가’의 존재를 알고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도 그 구절이 노래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제가 그 구절을 말할 때, 노래 부르는 것처럼 들렸습니까?”
“노래까지는 아니지만, 운율이 조금 섞이긴 했습니다.”
“······.”
기도를 하다 말고 노래를 불렀으니. 장난처럼 느껴질 만도 했다.
나는 겸허히 내 잘못을 인정하며, 반대편 소매에도 팔을 끼워 상의를 마저 입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만세’나 ‘만만세’ 같은 감탄사를 기도문에 넣는 건, 진지한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진작 말씀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주교님의 독특한 성정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잖습니까? 그리고···, 정말로 주교님께서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도문을 외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어차피 일행들은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기도문에 운율을 넣든 프리 스타일로 랩을 하든, 신경 쓰지 않을 거로 생각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는 얘기였다.
‘진짜 마지막 구절을 바꾸긴 해야 하나···?’
내가 기도문을 외는 건, 귀족들을 설득하고 난 뒤. 가장 마지막에 하게 될 테다.
그러니 그때까지 고민해 보고 정 떠오르는 게 없으면, 최대한 음을 넣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옷을 다 갈아입고 세르펜스와 연회장으로 향하니, 그곳에는 처음 보는 귀족들이 다수···.
‘아니, 잠깐만. 아는 얼굴도 하나 있는데?’
나는 눈가에 찍은 점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눈을 비볐다. 그런다고 해서 아는 얼굴이 모르는 얼굴로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도 나를 발견했는지, 반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 에인젤 주교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네퀴테 령의 영주입니다.”
“아, 예···.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악수를 청하는 네퀴테 백작의 손을 무시했다.
친절한 세르펜스는 네퀴테 백작의 손이 무안하지 않도록, 짝 소리 나게 그의 손을 쳐냈다.
세르펜스가 전력으로 후려쳤다면 네퀴테 백작의 손이 남아나질 않았을 테니까. 매우 친절하고도 상냥한 처사라 아니 말할 수 없다.
“어디서 감히 주교님께 손을 내미십니까?”
세르펜스의 도도한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악수를 권했다가 무시당한 건 네퀴테 백작인데도, 곱지 않은 시선이 네퀴테 백작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졌다.
세르펜스의 외모 효과인가? 아니면 여기에 모인 귀족들은 전부 네퀴테 백작을 싫어하기라도 하는 걸까?
르웰이 ‘현 바스툴 왕실에 불만이 있는 귀족’들만 불러 모았다고 했으니.
부패한 관리의 표본 같은 네퀴테 백작이 싫어서 그런 것 같다는 의견에 무게가 실렸다.
‘잠깐만. 그럼 네퀴테 백작도 현 왕실에 불만이 있다는 뜻인가? 죽이 잘 맞아서 짝짜꿍할 것 같은데, 왜지?’
의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네퀴테 백작은 말 그대로 ‘백작’으로, ‘자작’인 르웰보다 신분이 더 높았다.
재력으로 따지자면 쨉도 안 되긴 하겠지만. 그래도 네퀴테 령은 신전이 세워질 만한 조건을 갖췄을 정도로, 어느 정도 기반이 닦여 있다.
게다가 욕심은 또 얼마나 많은지···.
‘초대장 잘못 보낸 거 아냐?’
짧은 순간.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르웰의 사람 보는 눈이 의심스러워졌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자, 네퀴테 백작은 붉어진 손등을 반대 손으로 매만지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하, 하하···. 이해합니다. 그땐 제가 너무 어리석고, 탐욕적이었습니다. 주교님께서 그렇게 영지를 떠나신 후, 저는···. 네. 그때까지도 저는 더 큰 탐욕을 쫓았습니다. 처음에는 투자였습니다. 주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영지의 외관이 보기 좋아진다면 돈과 사람이 몰리겠지. 그런 욕심으로 말입니다.”
네퀴테 백작의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 말을 진짜 따랐단 말이야?!’
되면 좋고, 안 되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뱉은 말이었는데.
누가 주식을 추천해 주면, 제대로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전 재산을 쏟아붓고 파산할 것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영지민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고, 감사하다며 저를 칭송하는 소리를 듣고 났더니···.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 복받쳐 오르면서, 그들에게 너무···. 너무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을 괴롭혀 온 저인데, 이런 저를 용서하고 믿어준다는 게 정말 고맙고 또 기뻐서···. 그제야 제가 얼마나 몹쓸 사람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네퀴테 백작이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참회의 말을 꺼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다른 귀족들도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으로 네퀴테 백작을 바라보았다.
“어, 음···. 이제라도 아셨다니, 다행입니다.”
“주교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저는 평생토록 메워지지 않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제 소중한 영지민들을 수탈하며 살았을 겁니다. 그리고 베푸는 기쁨도 평생 알지 못했겠지요. 이런 어리석은 저를 위해, 저의 수준에 맞는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네퀴테 백작은 자존심도 내려놓고, 나를 향해 깊이 허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의 영지에 들렀던 게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의 일인데, 한 달 만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 있다니.
‘어떤 깨달음은 한순간에 찾아오기도 하니까, 완전 불가능한 일은 아니긴 한데···. 머리가 나빠서 그렇지, 천성이 나쁜 사람인 건 아니었던 걸까?’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기도문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머리 용량이 부족한데, 네퀴테 백작의 개과천선 스토리까지 신경 쓰긴 벅차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개새끼 하나를 사람 자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야겠다.
“막내 신관님, 백작님 손 치료해 주세요.”
“···네.”
세르펜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네퀴테 백작의 멀쩡한 손목을 잡고 신성력을 쏟아부었다.
손등이 살짝 부어오른 것 정도는 눈 깜빡할 시간에 치료할 수 있을 텐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굳이 이마를 짚지 않아도, 시간을 들이면 신성력 스캔이 가능한가 보네.’
하기야 갑자기 네퀴테 백작이 180도 돌변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의심스러울 만도 했다.
평소 같으면 참 유난스럽다 하겠지만, 이번만은 인정하는 바다.
“어?! 갑자기 몸이 가뿐해졌는데, 이건···.”
“다짜고짜 손을 쳐내서 죄송했다는 사과의 뜻입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네퀴테 백작을 향해, 세르펜스가 새침하게 말하고는 부끄럽다는 듯 조르르 내 옆으로 와서 붙었다.
아무래도 신성력으로 전신을 스캔했다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자잘한 지병이나 피로 등을 회복시켜 주었나 보다.
“잘하셨습니다. 자고로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줄 알아야죠.”
나는 세르펜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세르펜스가 칭찬받아서 기뻐하는 것 말고 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네퀴테 백작에게서 흑마력의 기운은 감지되지 않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