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2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30화(530/1105)
530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9)
네퀴테 백작은 나와 더 많은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듯 보였으나, 커다란 괘종시계가 뎅뎅 울리며 정각을 알린 탓에 그의 목소리는 그대로 묻혀 버렸다.
르웰이 연회장에 나타난 것도 그때였다.
화려한 프릴은 없지만,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제작된 무채색 드레스를 입고. 깔끔하게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은 실제 르웰의 나이보다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어린 나이 때문에 무시당할까 봐, 일부러 저런 차림을 한 거겠지.’
그녀가 연회장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고 나자, 사용인들이 활짝 열려 있던 연회장의 문을 닫았다.
쿵.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괘종시계의 종소리가 멈췄고, 연회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일부러 문 앞에서 괘종시계가 울리길 기다리다가, 짠 하고 나타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타이밍이다.
내가 잠시 감탄하는 사이, 시녀 한 명이 르웰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건넸다.
그걸 따라하기라도 하는 건지, 세르펜스가 내 귀에다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금 있었던 소란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네퀴테 백작과 우리가 대화한 내용을 설명하는 시녀의 행동을 세르펜스가 설명했다.
무슨 릴레이 같은 건가?
“축하연이라고 들어서 찾아왔는데,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조촐해 보이는구려.”
연배가 지긋한 귀족 하나가 연회장을 휘둘러보며, 느릿한 걸음으로 르웰에게 다가가 말을 던졌다.
자못 안타깝다는 말투였으나, ‘어린 영애 혼자서 영지를 관리하며, 연회까지 준비하기는 버거웠나 보지?’ 하고 비꼬는 말이었다.
먼저 기선 제압을 하려는 시도다.
귀족 사회에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라고. 노귀족의 행동이 상당히 아니꼽게 느껴졌다.
“저런! 제 배려가 부족했군요. 이번 연회는 간략하게 진행될 예정이라고 초대장에도 적어 놓긴 했는데···. 다음번에 글리델 자작님께 초대장을 보낼 일이 생긴다면, 주의 사항을 꼭 큰 글씨로 적어드리겠습니다.”
르웰이 부채를 촤르륵 펼쳐 입가를 가리며, 눈웃음을 지었다.
노안이 와서 초대장에 버젓이 적혀있는 글도 읽지 못한 거냐고 비웃는 말과 행동이다.
그런 르웰의 모습에 노인이 ‘어쭈? 요것 봐라?’라는 의미가 담긴 듯한, 헛웃음을 터트렸다.
“가주가 된 걸 축하받고 싶다는 목적으로 우리들을 부른 것 같지 않아서 한 말이네.”
“어째서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자네는 열다섯부터 사교계에 출입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그동안 쌓아온 친분이 있었을 터인데···.”
글리델 자작이라 불린 노귀족이 말끝을 흐리며, 연회장에 모인 면면을 훑어보았다.
성직자 행세 중인 우리 일행과 르웰을 제외하면 죄 나이 든 사람들뿐이다. 그나마 젊어 보이는 사람도 한 삼사십 대쯤?
르웰이 초대장에 혼자 오라고 적어놓기라도 한 건지, 다들 파트너도 없이 혼자 왔다.
이래서야 ‘악단이 없어서, 손님들이 넓은 홀을 놔두고 춤도 못 추고 돌아갔다.’는 우스개에도 웃지 못한다.
연회는 인맥을 넓혀 이익을 추구하는 기회의 장이자, 친분을 다지는 사교의 장이다.
공적인 일의 연장선에 있지만, 동시에 사적인 자리이기도 했다.
특히 축하연이란 말 그대로 ‘축하를 받기 위한 자리’다.
그러니 글리델 자작의 행동은 아무리 작은 연회라 해도 그렇지, 친구들은 어쩌고 자신과 같은 가문의 수장들만 모아 놓은 거냐는 뜻이리라.
“다들 축하보다는 다른 목적으로 오신 줄 압니다. 저기 계신 네퀴테 백작님을 제외하면, 모두가 돌아가신 저의 부친께서 진행하시던 사업과 관련된 분들이 아닙니까? 오늘은 그 사업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는 자리가 될 것이 뻔하여, 제 또래의 지인들에게는 양해를 구해 놓았습니다. 불러 놓고 신경을 못 써주면 미안하지 않습니까?”
르웰이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는 투로 말했다.
어차피 나도 축하를 받고 싶어서 이 연회를 연 게 아니고, 너희도 나를 축하하러 온 것이 아닐 테니까.
이게 무슨 좋은 잔치라고 친구들을 부르느냐는 말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나를 구슬려, 죽은 아버지가 진행하던 사업 일부를 꿀꺽하려고 온 것 아니냐고 비아냥거림과 동시에.
백작급도 가만히 있는데, 자작인 네가 뭔데 나서서 난리냐고 쏘아붙이는 말이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보안 얘기를 말하는 대신에 저렇게 둘러대는 걸 보면, 반역 얘기는 조금 이따가 할 생각인 건가?’
하기야 다짜고짜 입에 올리기에는 많이 무거운 주제였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세르펜스가 내 소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내가 고개를 돌려 눈을 맞추자, 녀석은 먼저 연회장에 도착해 있던 우리 일행들을 눈짓했다.
네퀴테 백작이 다른 데에 신경 팔린 사이 일행들 곁으로 가자는 뜻이다.
“그보다 먼 길 오시느라 시장하셨을 텐데 준비한 음식들부터 드시고, 사업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합시다.”
르웰은 그렇게 말하며, 연회장에 모인 인사들과 한 명씩 눈을 맞췄다.
넓은 연회장이 무색할 정도로 적은 인원수만 모인 터라, 그녀가 모두와 눈을 맞추는 데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나와 세르펜스는 별일 없이 일행들과 합류했다.
“지금 ‘그 얘기’를 꺼내면, 자칫 글리델 자작이라는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세라투 가주님께서는 그 점을 우려하여, 용건을 나중으로 미루신 듯합니다.”
네퀴테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과 거리가 벌어지자, 세르펜스가 또다시 귓속말하며 르웰의 의중을 해석해 주었다.
귀족들은 참, 알면 알수록 번거롭게 사는구나 싶은 생각밖에 안 드는 소리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들이 사는 방식에 신경 끄고 베일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나저나 작은 성기사님은 최근 가주님을 호위하셨으니, 저 백작님이 온다는 거 알고 계셨죠?”
“그야···.”
베일이 무언가 말하려다가, 갑자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남의 눈치를 보면서 몰래 말해야 할 얘기인가 보다.
나는 귓속말로 하라는 뜻으로 왼쪽 귓바퀴에 손을 가져다 붙였다.
하지만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 건 엉뚱하게도 오른쪽 귀였다.
“세라투 가주님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그저 머릿수 채우기 용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힘이 있으면서도, 주교님께 마음의 빚이 있고,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는 네퀴테 백작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합니다.”
세르펜스가 내 오른쪽 귀에다 대고, 베일이 하려는 말을 추측하여 설명했다.
얘는 오늘 하루 걸어 다니는 설명서가 될 생각인가 보다.
고맙긴 고마운데, 이번에는 나 좋으라고 인간 설명서를 자처한 게 아닌 것 같아서 덜 고마웠다.
그래서 나도 녀석에게 반만 좋은 짓을 하기로 했다.
“막내 신관님. 저기 디저트들 많은데,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주교님께서는 같이 안 가십니까?”
“막내 신관님이 있는데, 제가 뭐 하러요?”
내가 ‘당연히 세르펜스가 제 몫까지 가져와야죠.’라는 뜻을 전하자,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얼굴에 얼마나 짙은 좌절감이 어렸는지, 누가 보면 내가 녀석에게 밑 빠진 독에 물이라도 채우라고 시킨 줄 알겠다.
고작 테이블에 준비된 요깃거리를 접시에 담아서 가져오라고 했을 뿐이거늘.
심지어 황궁 연회에 참석할 때마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늘 해 온 것이기도 했다.
르웰이 준비한 연회 음식은 황궁 연회에 비하면 그 가짓수도 월등히 부족하건만.
도대체 무얼 그리도 어렵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막내 신관님께서는 제 수발을 드는 걸 삶의 기쁨이라 여기시는 줄 알았는데···. 설마 귀찮은 걸 억지로 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만 하셔도 됩니다. 시킬 사람이 막내 신관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주교님을 가까이에서 모시고자 하는 제 마음은 진심입니다!”
“아, 됐어요. 작은 성기사님한테 시키면 되니까.”
“지금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세르펜스가 울상을 지으며 서럽게 말하고는 죄 없는 베일을 한 번 노려봐 준 뒤, 디저트들이 가득한 테이블로 원정을 떠났다.
녀석이 어떤 음식들을 담아올지 매우 기대가 된다.
너무 많이 담아서, 일행들이 다 같이 나눠 먹어도 먹지 못할 양이어도 좋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주체하지 못한 채, 빈 접시를 들고 디저트 테이블 주변을 서성거리는 세르펜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프레이 신관님은 디저트를 가지러 가신 모양입니다?”
르웰이 드레스 자락을 끌며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잠깐 세르펜스의 뒷모습을 향한 거로 보아,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고.
손님들 앞에서 나와의 친목을 과시하고자, 가볍게 말을 붙이기 위한 용도로 언급한 듯하다.
“녀석은 단것을 좋아하니까요.”
“후후. 어차피 여러분들 외에는 다들 음식 생각이 없는 듯하니, 마음껏 즐겨 주시길 바랍니다.”
르웰의 말대로 세르펜스 외에는 준비된 음식에 다가가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기껏 무언가를 입에 댄다고 해 봤자, 시종들이 쟁반에 들고 나르는 샴페인을 한 잔씩 손에 든 게 전부다.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느라 바빠 보였는데, 그 사이에는 네퀴테 백작도 자연스럽게 끼어 있었다.
네퀴테 백작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전대 세라투 자작의 사업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하니.
르웰이 자신들을 불러 모은 목적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냐는 질문 세례라도 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뭐,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지만.’
사람들이 간혹 르웰을 힐끔거린다거나, 네퀴테 백작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는 것으로 보아.
꽤 높은 확률로 내 추측이 맞을 거다.
아무튼 손님들이 음식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세르펜스에게 잘된 일이다.
경쟁자가 없으니 느긋한 마음으로, 남을 배려 할 것 없이 제 욕심껏 음식을 담아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저는 손님분들과 인사를 나눠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잠깐만요. 아까 보니까, 그 누구더라? 시력 나쁜 귀족 하나가 시비를 거는 것 같던데···. 작은 성기사님이라도 빌려 가실래요?”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구실을 대며 베일을 데려가는 게 어떠하냐고 조심스럽게 질문하자, 르웰이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호위를 대동하고 인사를 나누러 다니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는 겁쟁이라며 손가락질할 텐데도 말이다.
‘어차피 베일의 정체를 밝히면 사라질 이미지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려나?’
반대로 베일이 정체를 드러냈을 때를 염려한 걸지도 모르겠다.
까딱하면 베일은 허수아비일 뿐이고, 르웰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까.
비록 베일이 직접 대화에 참여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르웰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귀족들은 베일이 ‘자신들을 몰래 지켜보며 평가하고 있었다.’라고 생각하게 될 테다.
‘그나저나 세르펜스는 어쩌고 있지?’
나는 귀족 무리에 다가가는 르웰과 베일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세르펜스의 상태를 살폈다.
여전히 디저트 테이블 주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러다가 살짝 뒤를 돌아 내 쪽을 쳐다본 후. ‘나 이거 집는다? 집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접시에 올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녀석의 행동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잘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매우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