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3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31화(531/1105)
531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10)
해일 같이 밀려드는 감동에 허우적거린 것도 잠시뿐.
그 뒤로도 세르펜스는 접시에 무언가를 하나 올리고 나를 바라보는 짓을 반복했다.
여기서는 뭘 집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자린고비가 천장에 매달아 놓은 굴비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일까?’
방금까지 너른 감동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나는 어느새 바짝 마른 굴비가 되어 있었다.
세르펜스가 일행들 곁으로 돌아온 건 접시 두 개를 채우고 나서다.
“다녀왔습니다.”
바로 요 앞에 다녀온 주제에, 세르펜스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자신의 귀환을 보고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접시를 내밀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자신이 담아온 디저트들을 심사해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뭐라고 심사를 하고 말고 하겠느냐마는 녀석이 뭘 담아 왔는지 궁금한 건 사실이라, 나는 세르펜스가 가져온 접시를 관찰했다.
뷔페에 처음 방문한 아이들은 으레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음식을 뒤죽박죽으로 산처럼 담아 오기 일쑤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디저트들을 참 정갈하게도 담아 왔다.
그렇다고 해서 녀석이 여백의 미를 살린 건 아니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빼곡하게 담아내어, 정리정돈과 공간 활용의 미학이 돋보였다.
“깔끔하게 잘 담아 오셨네요.”
나는 전체적인 음식 배치에 짤막한 평을 내린 뒤, 세부적인 구성을 살펴보았다.
다양한 맛의 마카롱과 각양각색의 쿠키.
한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타르트와 조그마한 유리컵에 담긴 푸딩.
가볍게 집어 먹기 좋아 보이는 봉봉 쇼콜라와 베이비 슈 등등.
이제껏 세르펜스가 먹어 봤거나, 그것의 미니 버전뿐이다.
‘준비된 디저트가 이런 것들뿐인 건지, 일부러 먹어 본 것만 담아 온 건지···.’
가만히 접시 위 내용물을 보다 보니,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가지씩 담으면 더 많은 종류의 디저트를 먹을 수 있을 텐데, 죄다 두 개···. 아니, 세 개씩 담은 것도 있네요?”
“주교님께서 주교님 몫까지 가져와 달라고 하셨잖습니까? 그리고 세 개씩 있는 건···.”
세르펜스가 말끝을 흐리며, 힐끔 유지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세 개씩 담긴 디저트는 모두 상큼해 보이는 노란색이었다. 유자가 들어 있는 건가 보다.
“이거랑 이거, 이거, 이거. 맛있어 보이는데, 제가 하나씩 먹어도 괜찮을까요?”
유지스가 세 개씩 있는 디저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세르펜스가 일부러 자신을 위해 챙겨왔다는 걸 눈치챈 거다.
당연하게도 세르펜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고, 유지스는 곧장 유자 마카롱을 집어서 한입에 쏙 넣었다.
“이대로라면 막내 신관님은 음식을 먹을 수 없으니, 자리부터 옮기죠.”
내가 접시를 하나 들면 세르펜스의 한 손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지만, 에인젤 주교의 꼰대 설정이 그걸 용납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음식은 역시 앉아서 먹는 게 최고니까.
우리는 연회장 가장자리에 마련된 빈 테이블에 둘러앉기로 했다.
“아 참. 다른 분들도 먹고 싶은 게 있으시면 가져다 드세요.”
“그럼 저는 샐러드를 가져올게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드나는 앉으려고 의자를 빼다 말고 샐러드 코너로 향했다.
아무래도 이런 연회는 처음이라서, 음식을 가져오겠다고 선뜻 말하지 못 하고 눈치만 보고 있었나 보다.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자리를 이탈한 에드나와는 다르게, 유지스는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저는 프레이 님께서 가져온 것만 먹어도 충분하답니다.”
유지스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는 듯. 행복감에 젖어 든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쁘띠 유자 타르트를 집어 들었다.
세르펜스가 자신 몫의 유자 간식을 챙겨 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감동했는가 보다.
“에잇, 기분이다! 오늘은 큰 성기사님도 함께 앉아서 드실래요?”
“사양하겠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담아 오세요. 저희가 언제 또 이렇게 귀족들의 연회에 참석하겠습니까?”
나는 연회라는 핑곗거리를 들먹이며 윈스톤에게 음식을 권했다.
곧 베일이 얼굴을 드러낼 예정이니, 윈스톤이 투구를 벗고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윈스톤은 우직하게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준비된 디저트 중, 오르덴 님의 입맛에 맞는 짠맛이 나는 건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르펜스가 바로 옆에 앉은 내 귀에도 들릴락 말락 할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윈스톤이 음식을 안 먹는 이유를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말이었다.
그 말의 효과는 퍽 대단하여, 윈스톤은 부랴부랴 자신이 먹을 음식을 가지러 갔다.
‘본래 연회는 친목질과 정치질이 주목적이라지만, 그딴 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르웰과 귀족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우리는 연회 음식들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세르펜스가 가져온 내 몫의 디저트를 반절 정도 먹었을 때.
고비가 찾아왔다.
세르펜스가 가져온 디저트들은 내게 너무 버거웠다. 과잉 섭취한 당분 때문에 속이 느글거리고, 머리가 살짝 어질해졌다.
‘하지만 이건 세르펜스가 나 먹으라고 직접 골라 온, 첫 디저트잖아? 이걸 남길 수야 없지!’
나는 에드나가 가져온 씁쓸한 풀떼기를 뺏어 먹고, 다시 한번 힘을 내어 전투에 돌입했다.
그리고 ‘이럴 줄 알았어요.’라는 말과 함께 지원군으로 나서 준 유지스 덕분에, 달콤한 적들을 모두 무찌를 수 있었다.
그렇게 승리를 자축하며 의자에 늘어져 있을 즈음.
“이제 슬슬 우리를 불러 모은 목적을 밝힐 때도 되지 않았소이까?!”
귀족들 사이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중년으로 보이는 귀족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별 관심 없다고 주장이라도 하듯. 여상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먼저 초조함을 드러낸 중년 귀족의 행동을 내심 반기는 듯 보였다.
그 증거로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르웰에게로 향했다.
‘르웰의 의중은 궁금하지만, 그녀가 나중으로 미룬 이야기를 캐물으며 안달 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그 알기 쉬운 반응에 르웰이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는 모습이 보였다.
“안델 남작님께선 오늘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일정을 모두 비워 놓고 연회에 참석해 주신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으신 분도 계신 듯하니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야겠습니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 르웰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로 인해 안델 남작은 ‘남의 연회에 참석해 놓고, 다른 일정을 잡아 놓은 무례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함부로 언성을 높이지 말라는 경고겠지.’
큰 목소리로 위협하듯 말한다고 해서 나는 기죽지 않는다, 그런 짓을 해 봤자 네가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런 의미가 담긴 말이 아닐까 한다.
르웰은 말을 마친 후 우리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로 걸음을 옮겼다.
모이라고 대놓고 말한 건 아니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먼저 걸음을 옮긴 게 르웰과 베일이었으니, 다른 귀족들은 자연스레 그 둘의 뒤를 따라 걷는 모양새가 되었다.
글리델 자작을 비롯하여 도중에 아차 싶은 표정을 지은 사람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다닥 달려서 르웰을 앞질러 가는 건 유치하다고 생각했는지, 인상을 와락 찌푸리기만 할 뿐이었다.
테이블 앞에 다다른 르웰은 의자에 앉지 않고 가만히 멈춰 섰다.
베일을 세워놓은 채, 자기 혼자 앉을 수는 없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귀족들은 그러한 사정을 알 리가 만무했다. 그들은 르웰과 베일을 지나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귀족들이 모두 착석하고 나자, 한눈에 인원수가 파악되었다.
‘대충 서른 명 남짓인가?’
딱 한 명만 빼면 죄다 자작이나 남작뿐이라는 걸 고려해 봤을 때, 반역을 도모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다.
“네퀴테 백작님을 제외한 나머지 분들께서는 아버지께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대강 짐작하고 계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르웰의 말에 몇몇 귀족이 흠칫 어깨를 떨었다.
세르펜스만해도 전대 세라투 자작을 만나보기도 전에, 그가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니 전대 세라투 자작과 가까이 지냈던 이들 중, 반역 계획을 눈치챈 자가 있대도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더군다나 르웰의 말에 따르자면 전대 세라투 자작은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고 했다.
어쩌면 전대 세라투 자작에게 ‘자작님 같은 분께서 왕이 되셔야 할 텐데···.’ 하고 아부를 떤 사람이 이들 중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전대 세라투 자작이 준비하던 일이라니···?”
반면에 순진하게도 ‘반역 같은 건 꿈도 꾼 적 없어요.’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어리둥절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은 건 단연코 네퀴테 백작이다.
그는 이곳에 모인 귀족들 중, 유일하게 전대 세라투 자작과 접점이 없는 인물이다.
특히나 이제껏 영지 내에서 영지민들의 고혈을 쥐어짜내며 살다가, 최근 들어 정신을 차렸으니.
반역 같은 걸 떠올려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리라.
“지금 그 얘기를 꺼낸 저의를 물어도 되겠는가?”
글리델 자작이 잔뜩 경직된 표정으로 르웰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으로 보아, 글리델 자작은 전대 세라투 자작이 반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르웰은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여유롭게 부채를 펼쳐 입가를 가리며 후후 웃음을 흘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아버지와 다르게, 직접 왕이 될 생각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직접 왕이 될 생각이 없다는 말은 곧,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왕위에 올리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놓고 반역을 입에 담는 그녀의 발언에 좌중은 혼란에 휩싸여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그렇다는 건 혹시···?’라고 중얼거리며, 네퀴테 백작을 바라보았다.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두 명은 네 명이 되고.
그렇게 모든 이들이 네퀴테 백작을 쳐다보게 되는 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이러지들 말게나! 나 같은 건 왕이 될 자격이 없네!”
다행히도 네퀴테 백작은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채로 손을 마구 내저었다.
마치 이런 무서운 얘기를 하는 곳에서 벗어나,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다.
르웰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저렇게 열심히 한담?’이라고 말하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네퀴테 백작을 무시했다.
“이곳에 모이신 분들은 모두 현 바스툴 왕실이 불만스러울 겁니다.”
“그···렇긴 한데···.”
어디선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난 방향을 쳐다보자, 비교적 젊어 보이는 귀족 하나가 제 입을 틀어막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글리델 자작이 그런 젊은 귀족을 흘겨보며, 못마땅하다는 목소리로 ‘요즘 젊은 것들은···.’ 하고 중얼거리며 쯧쯧 혀를 찼다.
나 같은 가짜 꼰대는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꼰대의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네에게 우리를 모을 힘이 있다고 생각하나?”
“어째서 없다고 단정 지으시는 겁니까?”
“자네는 운 좋게 가문을 이어받았을 뿐이지 않은가? 큰 힘이 손아귀에 들어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은 알겠지만. 거기까지일세. 분에 넘치는 욕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네. 아직 어린 나이에 화를 자초하여 죽음을 앞당기지 말게나.”
언뜻 들으면 르웰을 걱정하는 것처럼 들리는 말이다. 아니, 글리델 자작은 르웰을 걱정해 주는 게 맞긴 맞다.
하지만 그 걱정은 무시를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너는 안 될 거야.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못 해.
그러한 확신 속에서 자라난 걱정이었다.
“운이면 또 어떻습니까?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다가온 운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다가, 그것을 놓쳐 버리곤 합니다. 그러니 운을 잡는 것 또한 개인의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저는 숨을 죽인 채, 기회가 찾아오길 기다렸습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어쩌면 평생 찾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그 기회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었던 겁니다.”
르웰은 부채를 접으며, 비웃음으로 글리델 자작을 마주했다.
그딴 걱정은 개나 주라고 말하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