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3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34화(534/1105)
534회
68. 공작님과 가주님 (13)
‘그나저나 조금 의외네···.’
이런 식으로 뒤에서 소문을 이용하여 여론을 선동하는 건 베일의 방식이 아니다.
귀족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다소 놀란 표정으로 베일을 바라보았다.
[성검의 주인] 속 베일은 정의로워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 과도할 정도로 정정당당함을 추구했다.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르기 위해 왕실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당연하게도 그 과정에서 많은 피가 흘렀다.
베일이 그렇게 행동하게 된 배경에 ‘세라투 후작’의 존재가 있었다는 건, 말할 필요조차 없다.
‘하기야 베일이 바스툴 왕국을 탈출할 때, 불법 루트를 이용하기도 했잖아? 그런 걸 생각하면 융통성 없이 꽉 막힌 성격은 아니란 말이야?’
비록 저지르고 난 뒤 부끄러워하는 것 같긴 했지만. 그리고 지금도 조금 민망해하는 듯했지만.
베일이 정의롭고 올바른 사람이라는 건, [성검의 주인] 시기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결정적인 부분이 달랐다.
“그리한다면 대다수의 귀족은 왕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될 걸세. 그뿐만이 아니네. 어쩌면 내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들이 나를 지지하며 함께 싸워줄 가능성도 있네. 왕성의 병사들도 무기를 들고 저항을 하는 대신, 백기를 들겠지. 이게 내가 생각한···. 희생을 최소화하는 방법일세.”
현재의 베일에게 중요한 가치는 ‘남들에게 무결점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정의로운 사람으로 남기 위해 왕이 되려는 게 아니라, 바스툴 왕국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왕이 되려는 거니까.
그렇기에 베일의 정의는 변화할 수 있었던 걸 테다.
“나를 비겁한 겁쟁이라 욕해도 상관없네. 처음 내리는 지시가 이런 거라서 미안하지만, 다들 내 뜻에 따라 주길 바라네.”
문득 이번 작전을 우리에게 미리 말하지 않은 건, ‘순수한 프라시더스 공작’이 반대할까 봐 그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런 거라면 대단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세르펜스가 마음만 먹으면, 선동과 날조 및 이간질로 대륙을 어지럽히는 건 아무것도 아닌데. 고작 이 정도로 충격씩이나 받겠어?’
베일의 오해는 그뿐만이 아니다.
귀족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던 건, 어디까지나 ‘고지식한 왕자님’인 줄 알았던 베일이 융통성을 발휘한 까닭이다.
“저희에게 사과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을 어찌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겠나이까.”
“맞습니다. 실로 현명하면서도 자애로운 작전이 아닙니까?”
귀족들은 베일에게 실망하기는커녕, 들뜬 목소리로 신뢰를 보냈다.
자신들이 모시게 될 차기 국왕이 난세에 걸맞은 인물임을 확인했기 때문이리라.
베일과 귀족들은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으며, 계획을 점점 구체화 시켜갔다.
어떤 방식으로 어디에서부터 소문을 퍼트릴지. 베일의 생존을 언제 알려서 왕성에 쳐들어가야 할지 등등.
이야기가 착착 진행될수록 내 머릿속은 복잡해져 갔다.
‘아까 베일이랑 기도문 마무리 멘트를 두고 싸울 게 아니라, 세르펜스에게 조언을 들었어야 했는데···.’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 자리에서 성서를 펼쳐 놓고 벼락치기 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으니,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열심히 짜낼 수밖에.
모두를 감동하게 한다거나, 신앙심을 드높이는 기도문은 욀 수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베일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있지 않을까?
그런 고민에 빠져든 사이, 베일과 귀족들의 회의가 마무리되었다.
미래가 변화할 것이란 기대감 덕분일까? 모두의 표정은 밝았고, 눈동자는 희망으로 반짝였다.
“그럼 결전의 날이 올 때까지, 다들 건투를 비네.”
베일이 귀족들을 향해 믿고 있다는 시선을 보낸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의의 끝을 알리는 말이자, 연회를 즐기든 집에 돌아가든 알아서 하라는 의사 표현이기도 했다.
그런 베일의 행동에 귀족들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고, 르웰은 당황하며 베일을 붙잡았다.
“저하···? 주교님께서 저희의 성공을 기원하는 기도를 올리시겠다고···.”
“흠, 흠! 그랬었지. 회의에 집중하느라, 잠시 깜박했네.”
베일이 헛기침을 하며 제자리로 돌아왔고, 귀족들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어쩐지 베일의 표정은 멋쩍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 내가 기도해 주는 게 싫었냐?!’
상의도 없이 기도문을 맡겨서 고심하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은근슬쩍 없던 일로 만들려 하다니.
괘씸한 마음에 랩으로 기도문을 외워 버릴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연습도, 비트도 없이 랩을 하는 건 무리다. 너무 부담스럽다.
그래서 이해심 많은 어른인 내가 참기로 했다.
“뭐, 괜찮습니다. 무언가에 집중하다 보면 깜박할 수도 있죠. 지금 이 시각에도 왕실은 악마 숭배 세력과 작당 중일 테고, 죄 없는 누군가는 괴로움에 신음하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이 왕국을 아끼시는 정의로운 왕자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급하셨겠습니까? 다 이해합니다. 올바른 마음으로 나아간다면, 제 기도가 아니어도 신의 은총은 여러분과 함께할 겁니다. 그러니 제 기도 같은 건, 얼마든지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에인젤 주교님께서 기도를 올려주신다면, 마음이 든든해질 것 같습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생각 또한 마찬가지일 겁니다.”
베일도 벌써 정치인이 다 되었나 보다.
도망가려 할 땐 언제고, 마음이 든든해진다 어쩐다 하는 거짓말을 쉽게 내뱉는 걸 보니 말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차마 ‘든든해진다.’라고 확언은 못 하고, ‘든든해질 것 같다.’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골라 썼다.
그게 더 나빴다.
‘정황을 모르는 귀족들이 보면, 내가 기도문을 외고 싶다며 떼를 쓴 거라고 생각할 거 아냐? 엄연히 부탁받아서 하는 건데!’
다른 누구도 아닌 베일에게 이런 중상모략을 당할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건만.
나는 속으로 베일이 어디서 이런 몹쓸 행동을 배워 왔는지 모르겠다고 툴툴거리며, 천천히 일어섰다.
“그럼 시작할 테니, 다들 눈을 감아 주세요.”
내 말이 끝나자, 모든 이들이 양손을 맞잡으며 두 눈을 감았다.
아니, ‘모든 이’라고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왜냐하면 눈을 감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베일은 모두가 눈을 감은 걸 확인한 후, 나를 바라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내게 세르펜스처럼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능력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베일의 표정과 대략적인 입 모양으로, 그가 내게 사과하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었다.
나는 입 모양으로 ‘안 삐졌어요.’라고 소리 없이 대답했고, 그제야 베일의 눈이 감겼다.
“어둠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찬란한 빛이시여. 당신께서는 어둠을 물리치며,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둠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배울 수 있었나이다. 모두의 가슴 속에 빛이 스미어,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나이다.”
세르펜스가 말하길, ‘어둠을 물리친 빛’은 기도문 단골 메뉴라고 했다.
룩스메아의 탄생과도 맞닿아 있고,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구원을 원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기도회를 주관할 때면, 주로 ‘대지를 비추는 따사로운 빛’으로 서두를 열었다.
‘어둠을 물리친 빛’이 요즘 자주 쓰이는 말이라니까, 괜히 유행을 좇는 것 같아서 반발심이 든다거나.
‘대지를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평화로워 보인다거나.
그런 소소한 이유도 있긴 했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절대적인 구원’을 바라는 건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러한 구원이 간절하다는 건 알고 있다. 그래도 그 구원에 매달리진 않았으면 한다.
누군가가 은혜를 베풀어 주면, 그것에 감사하며 그냥 자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한다.
긴긴밤이 끝나고 어둠이 걷혀, 하늘에 태양이 떠오른다면.
그 따스함에 반가워하고 즐거워할지언정.
온종일 해만 바라보며 숭상한다거나, 그것이 언제 다시 사라질까 불안에 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오늘 기도문에서 ‘어둠을 물리친 빛’으로 서두를 연 까닭은,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이보다 적절한 인용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곳에 당신의 뜻을 따라, 어둠이 드리워진 한 나라를 구원하는 빛이 되고자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당신의 뜻을 이어갈 수 있도록 보살펴 주시옵소서.”
베일을 비롯하여 이곳에 모인 이들이 바라는 건, 누군가의 구원이 아닌 세상을 바꿔 나갈 힘이다.
그러니 나는 룩스메아에게 비슷한 업무를 선행한 선배로서, 이들을 잘 봐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부디 이들이 그 목적을 이루길 바라옵나이다. 그리고 이들을 가엾이 여겨, 그 과정에서 이들이 피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아량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승리를 거머쥔 그 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함께 웃을 수 있도록 가호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올린다고 룩스메아가 들어주는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이들이 서로를 동료로 생각하며, ‘다 같이 살아서 목표를 이룬다.’라는 의지를 다지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들의 정의가 언제나 영예롭게 빛날 수 있도록 항상 지켜봐 주시옵고, 이들이 나아갈 길에 영광이 함께 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기쁨이 남길 바라나이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권력 맛을 본 뒤, 타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슬쩍 끼워 넣어 보았다.
베일의 성정을 생각해 봤을 때, 알아서 잘 솎아 낼 것 같긴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악숭이 문제에 기존의 부패한 귀족들까지 잡아내느라 바쁠 텐데, 일거리가 늘어나서 좋을 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이 바스툴 왕국을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의 나라를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기를. 그런 나라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하나이다.”
이쯤 했으면 기도를 마쳐도 되겠다는 생각에 마지막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무언가 임팩트가 부족했다. 끝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난 뒤, 닦지 않고 그냥 나온 듯한 묘한 찝찝함이 나를 괴롭게 했다.
“또한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들에게 벌을 내리시고, 자신들이 지은 죄를 깨닫게 해 주시옵고, 부끄러움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귀족 두엇이 눈을 떴다가, 기도문이 이어지자 황급히 눈을 다시 감는 모습이 보였다.
아까 그만뒀어도 괜찮았던 걸까? 사람들은 그런 심심한 마무리로 만족할 수 있는 건가?
“더불어 스스로 왕관의 무게를 짊어지려 하는 어린 영웅이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도록, 그의 곁에 인재가 넘쳐나게 해 주시옵소서. 끝으로 이들의 국가가 혼란 속에서도 굳건하게 버틸 수 있도록 돌보아 주시옵소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한, 더불어, 끝으로, 그리고, 그리하여, 또, 그로 하여금 등등.
내가 한 문장을 끝내고 다음 문장을 입에 올릴 때마다 사람들이 계속 움찔거렸다.
나도 그들의 성원에 보답하여, 얼른 끝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더는 쥐어짤 말도 없고.
그렇게 기도문이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자, 베일이 또다시 입을 벙긋거렸다.
두 손을 꽉 맞잡고 미간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눈을 꼭 감은 채, 연신 입을 움직이며 기도하는 모습이 매우 간절한 무언가를 바라 마지않는 듯 보였다.
‘아, 아, 이···, 아, 에, 으, 애···?’
설마, ‘차라리 만세를 해’라고 말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끝을 바라는 마음에서 나 좋을 대로 해석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을 믿어 보기로 했다.
“룩스메아 님께서 보우하사, 우리 대륙 만만세이옵나이다.”
“······.”
“······.”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사람들이 하나둘 눈을 떴다.
그리고···.
“마, 만세!!”
이름 모를 한 귀족을 시작으로, 연회장 안에 만세의 물결이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