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3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40화(540/1105)
540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5)
본래의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다.
만약 왕성에 악숭이가 나타난다면, 세르펜스가 신성력을 발휘하여 해치운 뒤. ‘악마 숭배자 처단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베일이 왕성에 들어가는 것만 보고, 신전에서 얌전히 기다릴 생각이었지···.’
설마 휴마누스는 자신이 직접 와서 말하면 이런 식으로 왕성에 끌려갈 것을 예상하여, 나에게 대신 말을 전달해 달라고 한 걸까?
잠깐 의심이 떠올랐지만, 이내 부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휴마누스가 그런 약아빠진 짓을 할 리가 없다.
괜히 생사람 잡지 말자.
‘그나저나 같이 들어가면 나한테 버프를 걸어 달라고 할 텐데, 어쩌지?’
나도 나지만, 유지스와 윈스톤. 그리고 에드나까지. 죄다 가짜다.
유일하게 성직자 흉내를 낼 수 있는 세르펜스는 베일의 호위 기사로 변장 중이다.
타들어 가는 내 속도 모르고 귀족들은 신 룩스메아 님의 가호가 함께 한다 어쩐다, 떠들어대기에 바빴다.
‘다들 언제부터 그렇게 신앙심이 대단했다고! 바스툴 왕국의 귀족들은 신전을 무슨 세입자처럼 여기잖아!’
아무것도 모르는 건 르웰도 마찬가지인지라, 나와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거리는데 정말 환장하겠다.
베일이 빨리 변명을 만들어서 빠지라는 눈빛을 쏘아 보냈다.
‘그게 어디 내 마음대로 되겠냐고!’
진짜 야단났다고 생각하는 그때. 뒤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열해있던 병사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눈에 띄는 새하얀 저 복장은 분명 성직자의 것이다.
다행히도 룩스메아 교단에서 지원을 나온 모양이다.
‘좋아! 저들한테 모든 일을 떠넘기고, 나는 보호 받으면서 그냥 따라다녀야지!’
에드나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떠올렸는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성기사는 대충 열댓 명쯤 되어 보이고, 신관도 두 명 있었다. 그리고 이단 처단이 목적인 만큼, 이단 심문관도 한 명 보였다.
“웨일리안 C. 칼립스입니다. 에인젤 주교님을 도와, 악마 숭배자와 손잡은 현 바스툴 왕실에 심판을 내리라는 명을 받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대업을 앞둔 상황이라는 건 알지만, 이단을 처단하는 숭고한 일이니만큼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단 심문관이 대표로 나서서 베일에게 말을 건넸다.
말투도 무뚝뚝하거니와, 푹 눌러쓴 후드 아래로 언뜻 보이는 하관이 꽤나 고집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고압적인 분위기가 풍겼···.
‘잠깐만. 나를 도와주라는 명령을 내린 건 역시 교황이겠지? 하지만 바스툴 왕실이 예의 그 주사기를 왕성에 반입한 건 최근 일 아닌가? 그렇다는 건 설마···. 우리가 제국을 떠나올 때, 이단 심문관 한 명을 미리 바스툴 왕국에 보내 놓은 건가?’
신의 사자인 내가 직접 나선 일이다.
교황이 이번 일의 중대함을 느끼고, 이단 심문관을 파견했대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님이시라면 그, 그, 그···! 그분이잖아요?! 프레이 님의 재능을 보고 후계자로 점찍어 이것저것 가르쳐 주었다던!”
에드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내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외면할 수 없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에드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굳어 있는 상태였다.
“예, 맞습니다. 결국 막내 신관님은 저를 가까이에서 모시고 싶다는 이유로 신관의 길을 택했지만···.”
나는 너스레를 떨며 칼립스 이단 심문관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팔꿈치로 그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
“뭘 그렇게 굳어 있습니까? 설마하니 제가 막내 신관님···. 그러니까 프레이 님을 가로챘다고 생각해서 아직도 꽁해 계신 건 아니죠? 저도 몰랐다고요, 그 녀석이 저를 따라 날름 신관이 되어 버릴 줄은···. 개인적으로는 성기사가 되었으면 했는데, 어휴! 그 고집 대체 누가 말려?”
“그,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가 그러니까, 꽁해 있었던 건 아닌데···. 프레이 님께서 제 얘기를 많이 하신 건가 싶어서···. 네, 그게 조금 놀라워서 잠시 당황했을 뿐입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얼떨떨한 목소리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카리스마 넘치던 등장이 무색해질 정도로 어벙한 모습이다.
상당히 당황한 것 같은데 맞장구를 쳐 주는 거로 보아, 무조건 우리의 말에 맞춰 주라는 지시라도 받은 게 아닐까 한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
“지금 막내 신관님도 여기 계신 거 아시죠? 여기 계신 분들이야 믿을 수 있으니까 대놓고 얘기하는 건데, 지금 왕자 저하 곁에 있는 기사님이 막내 신관님입니다. 악마 숭배자의 허를 찌르려고, 갑옷을 입혀 놨죠.”
“···당장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으니, 사사로운 대화는 나중으로 미루는 게 어떨까 합니다.”
더는 알지도 못하는 설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는지,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억지로 대화를 이어 나가고 싶지 않은 건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칼립스 이단 심문관에게서 시선을 떼고, 베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참. 아까 성검의 주인께서 말씀하시길, 악마 숭배자들이 제작한···. 좀 위험한 물건이 왕성으로 들어가는 걸 봤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어떠한 물건도 반출되지 않도록 통제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베일은 신성력을 억제하는 주사에 관해 알고 있었지만, 일반인들에게 알려져서 좋을 건 없다.
내가 적당히 에둘러 설명하자, 베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귀족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왕성의 물건이 반출되는 건 막아야 합니다.”
베일이 짐짓 사무적인 투로 대답했다.
타국의 황태자인 휴마누스나 교단의 말에 따르는 것처럼 보일까 봐, 조심하는 게 아닐까 한다.
어느새 냉철한 얼굴로 돌아온 베일이 서둘러 회의를 마무리 지었다.
“지금부터 왕성으로 돌입한다! 우리의 적은 현 바스툴 왕실과 대륙의 공적인 악마 숭배자들이다! 그저 왕실의 명에 따를 뿐인 가엾은 병사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최대한 그들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어 제압하는 걸 목표로 삼아라!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대들의 목숨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이 무기를 놓지 않고 우리를 위협한다면, 그들 또한 우리의 적이다!”
베일이 검을 뽑아 들며, 한껏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드디어 출발하려나 보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도 출정에 앞서, 성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려 나와 일행들을 보호하도록 대형을 바꿨다.
“주교님께서 나서야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쩍 내게 귓속말을 했다.
그 말투가 상당히 정중하다. 베일에게 말할 때도 고압적으로 굴었던 사람이 이러는 걸 보면,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교황에게 들은 게 아닐까 한다.
하기야 유지스의 설명대로라면, ‘칼립스’ 성을 이어받은 이단 심문관은 그냥 교단 최강자라고 봐도 무방했으니.
교황의 신임 또한 대단하겠지.
“그래요, 열심히 해 보세요. 혹시 압니까? 오늘 이단 심문관님께서 싸우는 걸 보고, 막내 신관님께서 막내 이단 심문관으로 직종을 바꾸고 싶어 할지?”
“···최선을 다할 이유가 생겼군요. 사지타 님. 악마 숭배자가 나타난다면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오늘은 나서지 말아 주십시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내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단 심문관 복장을 한 유지스에게 말했다.
꼰대 설정에 따른 빈정거림을 다른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네! 힘내세요, 칼립스 님! 우리의 막내를 되찾는 거예요!”
가만히 왕성 쪽을 노려보던 유지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칼립스를 향해 기세 좋게 소리쳤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그 응원에 힘을 얻기는커녕, 힘없이 고개를 푹 숙이며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현타가 찾아왔나 보다.
하지만 그에게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베일이 기사들과 함께 선두에 서서 왕성으로 진격했다.
우리 일행과 교단 소속 성직자들은 최전방까진 아니지만, 꽤 앞쪽에서 베일의 뒤를 따랐다.
굳게 닫힌 왕성의 문을 부수고, 그것을 통과했을 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 공격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요?”
“눈치 못 채고 계셨어요? 아까부터 성벽 위에 아무도 없었잖아요.”
유지스가 목소리를 잔뜩 낮춰서 대답했다.
어쩐지 설정 놀이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있더라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껴져서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나 보다.
그러고 보면 왕성 바로 앞에서 회의하고 있었는데도, 화살 하나 날아오지 않고 잠잠했다.
‘사람이 안 보이는 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당연히 숨어서 활을 겨누고 있는 줄 알았지! 저격의 기본은 은폐잖아!’
공격이 없으면 서로를 견제하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적이 자리를 비웠을 거라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성벽 위의 인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자들은 평생 가도 이 억울함을 모를 거다.
베일과 귀족들은 이런 상황을 미리 보고 받았는지, 동요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했다.
기사들이 목소리에 오러를 담아, 병사들에게 긴장을 풀지 말라고 외치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그렇게 10분가량 나아갔을 때.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이 날아가는 화살처럼 쏘아지듯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선두의 발밑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선두에는 실력 있는 기사들만 모아 놓은 건지, 다들 어찌어찌 잘 피한 것 같다.
덧붙여 베일은 세르펜스로 추정되는 기사에게 들려진 상태였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들려졌을 때, 남들이 보면 저런 느낌이라는 거지?’
나는 앞으로 작작 들려 다녀야겠다고 생각하며, 방금 땅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를 확인했다.
거무튀튀한 빛깔과 묘하게 번들거리는 표면. 그리고 꿈틀거리는 기분 나쁜 움직임.
‘저거 그거네. 거대 지렁이 마물.’
볼타 산맥과 바스툴 왕국의 수도가 얼마나 먼데, 여기까지 땅을 파서 왔다니. 대장정이 따로 없다.
칼립스 이단 심문관은 지렁이 마물의 노고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검에 신성력을 가득 담아 휘둘렀다.
저대로 싹둑 잘려서 싸움이 끝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일이 그렇게 간단하게 풀릴 리가 없다.
백 년도 넘게 살아온 마물의 몸체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한껏 응축된 신성력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는 없었는지, 지렁이 마물이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저거 [성검의 주인]에서도 진짜 힘들게 잡았던 건데···.’
저 지렁이 마물이 특별히 강해서라기보다는 잘 죽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반으로 잘려도 죽기는커녕, 분열하는 특성 때문에 성검 일행이 얼마나 고전했는지 모른다.
진짜 지렁이는 시간이 지나면 꼬리 부분이 죽기라도 하지. 저 마물 지렁이는 그딴 것도 없다.
게다가 점액질 때문인지 불이 잘 붙지도 않아서, 잘게 잘라 마법으로 일일이 태우거나 수분을 증발시켜야 했다.
나는 고민하다가, 근처에 있는 진짜 신관 한 명을 붙들고 질문을 던졌다.
“저거, 성화로는 못 태우겠죠?”
“아무래도 저렇게 큰 건 좀···. 혹시 주교님은 가능하신가요?”
“······.”
아무래도 내가 진짜 주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신관인가 보다.
나는 신관의 물음을 못 들은 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