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5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51화(551/1105)
551회
69. 공작님과 패륜 왕 (16)
* * *
나는 윈스톤과 함께 베일과 르웰이 일하고 있는 왕의 집무실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윈스톤을 대동한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바로 세르펜스의 얼굴을 최대한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다.
‘세르펜스는 얼굴을 가리면 되는 것 아니냐며 우겼지만···.’
그게 더 수상하다.
그래서 나는 세르펜스에게 거울을 쥐여준 뒤. 자신의 비범한 미모를 감상하고 있으라는 숙제를 내주고, 윈스톤을 데려온 것이다.
집무실에 도착하자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대신 노크를 해 주었다.
“식사 배달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나는 집무실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한창 서류와 씨름하던 베일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고작 하룻밤 만에 부쩍 수척해진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다크서클은 또 얼마나 진한지.
어제 보았던 당당하고 혈기 넘치던 젊은 지도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야근에 시달린 직장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인사를 먼저 해야 합니까, 아니면 어째서 빈손이냐고 물어야 합니까?”
베일이 손으로 충혈된 두 눈을 지그시 누르며,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물었다.
저래서야 패륜 왕이 아니라 피로 왕이라 불러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면 그저께 밤에도 못 잤었지?’
수도의 성문이 열린 건 한밤중이었다.
그렇게 이틀 연속 밤을 새운 데다가, 세라투 영지에서부터 쉴 새 없이 말을 달려 수도까지 왔으니.
그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든 게 아닐까 한다.
“식사실에 가져다 놨습니다. 밥 정도는 편하게 먹어야죠. 듣자 하니 어제는 병사가 밖에서 사 온 샌드위치로 대충 때웠다면서요?”
“저만 고생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들 일에 열중하고 있는데, 모범을 보여야 할 제가 어찌 편하게 식사를 하겠습니까?”
그 말대로 밤샘 업무로 시달리고 있는 건 베일 혼자가 아니었다.
가깝게는 베일의 집무실에서 보좌관 대행 업무를 수행 중인 르웰이 있었고.
사라진 행정관들을 대신하여, 행정실에서 한창 서류 분류 작업에 열을 올리는 귀족들도 있었다.
“전하, ‘저’나 ‘제’가 아니라 짐이라 칭하셔야 옳습니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업무를 처리하던 르웰이 고개를 번쩍 들어 올리며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베일이 앉아있는 책상 한구석에는 왕관이 올려져 있었다. 쓰고 일하다가 무거워서 내려놓았나 보다.
‘하긴, 목 건강은 소중하니까.’
왕관에 쓰인 금과 보석의 무게가 상당할 테니.
저딴 걸 머리에 얹은 채로 일을 하다간 피로도가 몇 배로 쌓일 게 분명하다. 덤으로 거북목 증상도 생기겠지.
“다른 분들은 신경 쓰지 마세요. 행정실에는 성검의 주인께서 찾아가 도시락을 나눠주고 계시거든요. 겸사겸사 신성력으로 체력까지 회복해 주신다고 하니, 업무 효율이 올라서 식사 시간을 만회하고도 남을 겁니다. 저희와 같이 식사해 주시면, 전하와 가주님도 회복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피로 해소를 미끼로 내걸자, 베일이 솔깃하다는 표정으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거의 넘어온 것 같으니 쐐기를 박아야 할 차례다.
“그리고 아까 모범이라 했습니까? 맞는 얘기죠. 왕이 밤새워 일하고 있는데, 어디 신하들이 눈치 보여서 쉬겠습니까? 오러 사용자인 전하도 피곤에 찌들어 있는데. 저기 계신 가주님처럼 단련도 안 된 일반인은 어떻겠습니까? 언제 픽 하고 쓰러질지 아무도 모릅니다.”
“당장 식사하러 가겠습니다.”
베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르웰도 보고 있던 서류를 잽싸게 정리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생각하셨어요. 마침 해야 할 얘기도 있으니, 느긋하게 먹으면서 얘기하죠.”
“그 얘기를 먼저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용무가 있다는 말을 먼저 했으면, 바로 일어나셨을 겁니까?”
“그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그딴 것도 질문이라고 하느냐는 듯, 베일이 툴툴거리며 왕관을 머리에 썼다.
의외라고 해야 하나? 바쁘니까 일하면서 듣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어쩐지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앉아 있었을 땐 몰랐는데···.’
베일은 제법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세라투 영지에서 혁명을 준비할 적에 시녀들이 베일의 옷 치수를 재가더니만. 왕좌에 오른 뒤 바로 입을 옷을 미리 만들어 둔 모양이다.
그땐 베일의 생존을 알리기 전이라서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할 수도 없었을 텐데.
비싼 재료를 사용한 덕분에 왕관과 그럭저럭 어울렸다.
천에서는 고급스러운 광택이 돌았고, 황금빛으로 수 놓인 화려한 자수가 옷의 품격을 더했다.
재료만 놓고 보자면 세르펜스가 내게 사준 연미복 못지않다.
섬세함과 디자인 측면에서는 제국 내 유명 디자이너 제품을 따라올 순 없었지만.
“그런데 항상 주교님을 쫓아다니던 신관님은 어디 가고, 성기사님을 데리고 다니십니까?”
식사실로 가는 도중. 복도를 거닐며 르웰이 질문을 던졌다.
수도까지 오면서 떼어 놓았으니, 껌딱지처럼 내게 붙어 다닐 줄 알았던 세르펜스가 안 보이자 의문을 품은 걸 테다.
예상했던 질문이다.
“진짜 프라시더스 공작에 비하면 태양 앞의 촛불에 불과하지만. 그 녀석, 꽤 잘생긴 얼굴이잖아요?”
“그냥 꽤 잘생긴 수준이 아니지요. 신관님을 두고 이런 표현을 써도 되나 싶긴 한데···. 교단 소속만 아니었으면, 천만금을 쥐여주고서라도 그를 정부(情夫)로 두려는 귀부인이 줄을 서고도 남을 얼굴입니다.”
르웰이 정색하며 말했다.
대외펜스의 얼굴은 너무 신성한 나머지, 보고 있노라면 모든 오욕(五慾)이 사라지고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던데.
천재 배우는 표정 변화만으로도 천사와 악마를 오갈 수 있다더니. 세르펜스의 표정 연기가 잘 먹히고 있는가 보다.
“아무튼 멍청한 흑마법사가 프라시더스 공작을 언급한 탓에, 녀석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이상한 착각을 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고 경고해 뒀습니다.”
“아하하핫! 그 신관님을 보고 프라시더스 공작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니! 최근 들은 농담 중 가장 웃겼습니다. 프레이 신관님이 잘생긴 건 인정하지만, 그분은 너무···. 아무튼 말도 안 됩니다.”
한바탕 크게 웃어 젖히고도 웃음이 덜 가셨는지, 르웰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그러고는 베일을 바라보며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않습니까?’하고 질문을 던지기까지 했다.
“왜···, 아니. 크흠! 그렇군. 짐도 그렇게 생각하네.”
베일이 왜냐는 질문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복도 곳곳에는 병사들이 서 있었다. 그들의 앞에서 프레이 신관이 프라시더스 공작이라는 증거를 열거해 봤자, 베일만 손해다.
“사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긴 합니다. 프라시더스 공작은 자애로운 미소와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그에 걸맞은 온후한 성품을 가진 분이신데. 막내 신관님같이 철없는 어린애를 어찌 거기다 갖다 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단은 괜히 이단이 아닙니다. 어제 보았던 흑마법사 놈은 이단 심문관님을 보고 프라시더스 공작을 떠올렸잖습니까?”
“아! 듣고 보니 그도 그렇군요. 정말 이단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르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말에 공감해 주었다.
혹시 ‘프레이 신관은 절대 프라시더스 공작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널리 퍼트리고자, 내 말에 맞장구쳐 주는 게 아닐까 했건만.
진심으로 프레이는 절대 세르펜스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모습이다.
어느덧 화제는 악숭이들의 우매함을 비웃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악숭이들을 욕하다 보니 식사실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식사실로 들어서자, 세르펜스가 보고 있던 거울을 내팽개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내가 앉을 의자를 빼 주었다. 당연하게도 녀석의 옆자리다.
“역시 말도 안 돼.”
르웰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지금 반응으로 봐선, 오리지널 버전 세르펜스와 마주치더라도 프레이와 좀 닮았구나 하고 넘어갈 기세다.
나는 그런 르웰을 애써 외면하며 의자에 앉았다.
세르펜스는 내가 앉는 타이밍에 맞춰 의자를 넣어주고 난 후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침 일찍부터 밖에 나가 음식을 사 오신 겁니까?”
베일이 자리에 앉으며 질문을 던졌다.
표정 가득 미안함이 배어 나왔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성에 방문한 손님인 셈인데, 음식을 대접하기는커녕. 도리어 음식 대접을 받고 있으니.
“성검 일행께서 사 오신 겁니다. 저희는 아공간 주머니가 없고, 그분들은 있으니까.”
내 말이 끝나자, 베일의 표정에서 미안함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째서인가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싸늘하다.
짐작건대. 설정 핑계로 프라시더스 공작을 부려먹더니, 이제는 성검 일행도 부려먹는 거냐.
그런 의미로 추정된다.
나는 설정이 그러한데 어쩔 거냐는 눈빛으로 응수해 주었다.
그렇게 베일과 한창 눈싸움을 벌이고 있을 무렵.
복도에서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먼저 와 있었네?”
휴마누스가 리에나와 함께 식사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도시락 배달뿐 아니라, 귀족들에게 일일이 신성력을 써 주느라 시간이 오래 걸렸나 보다.
‘리에나는 보조 역할로 따라간 건가?’
그녀라면 한꺼번에 여러 명을 회복시켜 줄 수 있으니 금방 끝났겠지만, 휴마누스는 그럴만한 경험을 갖추지 못했다.
세상 어느 누가 피곤하다는 이유로 황태자에게 체력을 회복시켜 달라 요구할 수 있을까.
경험이 없으니. 실력이 늘지 않는 건 당연한 인과 관계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아니, 짐이 여러분께 대접해 드려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받기만 하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베일이 스스로를 ‘짐’이라 칭하는 게 아직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말하는 그도, 듣는 나도.
하지만 저 어색함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자연스러움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저희는 대접을 받고자 이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죄송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마누스가 하하 웃으며 존댓말을 사용했다.
아직 즉위식을 올리지 않았는데도, 베일을 왕으로 대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감사합니다.”
왕관의 무게를 의식한 것일까?
베일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로 휴마누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이제 왕이 되었으니 쉽게 고개를 숙일 수는 없지만, 표정과 목소리에서 고마움이 철철 넘쳐흘렀다.
휴마누스는 베일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베일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 손을 맞잡았다.
그 상태로 휴마누스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맞잡은 손을 통해 황금빛 신성력이 베일에게로 흘러 들어가는 게 보였다.
잠시 후 휴마누스가 눈을 뜨자, 베일은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퀭하게 그늘져 있던 베일의 눈 밑에 생기가 감돌았다.
저 극적인 안색의 변화는 휴마누스의 신성력이 제 기능을 발휘했다는 증거다.
“아직 황태자 신분에 머물고 있는 제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은데…. 한 가지 조언을 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럼 그 말을 믿고 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열심히 하시는 건 좋지만,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무리를 해서라도 반드시 끝내야 하는 일이 있다면, 힘들다는 티를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왕이 모범을 보이는 것도 중요하나 그게 지나치면 따라가는 사람이 지칩니다.”
휴마누스가 제법 황태자다운 말을 했다.
내가 베일에게 한 말과 비슷하면서도 살짝 냉혹한 조언이다.
자신이 읽겠다고 빌려간 일지도 차일피일 미루고 미룬 그였지만, 황태자로서 교육을 받을 땐 농땡이 부리지 않고 성실히 임했던 모양이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었습니다. 앞으로 그 말을 마음에 새기며, 오늘 같은 일이 없도록 유념하겠습니다.”
베일이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휴마누스가 슬쩍 웃으며 맞잡은 손을 놓았다. 그리고 시선을 옮겨 르웰을 바라보았다.
르웰이 학구열 넘치는 눈으로 휴마누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휴마누스는 르웰의 의욕을 눈치채지 못하고, 신성력만 불어넣어 준 뒤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