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7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75화(575/1105)
574회
71. 공작님과 성검 (16)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리던 성검펜스가 고개를 숙였다.
아직 말할 용기가 없는 것일까? 어쩌면 꼭꼭 걸어 잠근 마음의 빗장을 열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언제라도 좋으니 들어줄 사람이 필요해지면 얘기해 줘요. 위로해 줄 테니.”
억지로 캐물어서 좋을 건 없다.
그렇다고 소통의 창구를 완전히 닫아버릴 수는 없어서, 나중을 기약하려는 그때.
“고통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아서···. 그래서···, 그랬습니다.”
성검펜스가 띄엄띄엄 말을 내뱉었다.
차라리 육체적 고통을 느끼는 게 나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몰려 있었다는 뜻이다. 어린 시절 당한 고문이 트라우마로 남아 악몽에 시달리는 주제에.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다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것을 억눌러 삼켰다.
‘뭐, 그래. 사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거잖아?’
성검펜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렇고 그런 취향에 눈을 뜬 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고통을 즐기게 되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이야 뻔하지.
더 큰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육체적 고통을 도피처로 삼은 거다.
잘못된 행동이다. 그러나 녀석의 곁에는 그것을 말려줄 사람이 없었다.
무너져가는 정신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도,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줄 사람도 없었다.
하다못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스트레스를 해소한다는 발상조차 불가능했다.
‘성검펜스는 결국 살고 싶었던 거구나.’
그런 게 아니라면 일부러 다치고 상처를 방치하면서, 아등바등 버텼을 리가 없다. 버티고 또 버티다가 기력을 다하여 삶을 놓쳐 버린 걸 테다.
그런 성검펜스에게 살고 싶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해서 조금은 나아졌습니까?”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돌아온 대답에는 확신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겠지. 나아졌을 리가 없지. 잠깐 괴로운 생각을 뒤로 미룰 수 있을지언정, 근본 원인이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좋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세르펜스에겐 그게 최선이었던 거겠죠. 수고하셨습니다.”
“예···?”
성검펜스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마주 보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그 표정은? 약해 빠졌다고 비난이라도 할 줄 알았어요?”
“으음···.”
“얼씨구? 진짜 그랬나 보네?”
“······.”
성검펜스는 침묵했지만, 내 물음에 대답한 것이나 진배없는 태도를 보였다.
나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기죽은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모습이 딱해 보였다.
“사탕 더 드릴까요?”
내 물음에 녀석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럼 쿠키는 어때요?”
녀석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그 밖에 다른 것들을 제시해 보았으나 성검펜스의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공연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세르펜스 먹이려고, 달고 맛있는 것들을 잔뜩 사 놨는데···.”
나는 일부러 혼잣말을 흘리며 아공간 주머니 입구를 열었다 닫았다 하길 반복했다.
혹시나 성검펜스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까, 힐끔거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까지는 뭐고, 필요는 왜 없는데요?”
“억지로 제 비위를 맞춰 주는 것 말입니다.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원하시는 정보가 있다면···. 제가 아는 선에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갑자기 대화의 흐름이 이상한 방향으로 튀었다.
황당함을 감출 길이 없다. 내가 성검펜스에게 ‘정보’라 할 만한 것들을 요구했던가?
일단 ‘개인 정보’도 정보는 정보니까, 자신 있게 안 했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래도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 얘기했잖아?’
애초에 지금 성검펜스가 언급한 ‘정보’가 ‘개인 정보’를 말하는 게 맞기나 할까 의문이다.
기껏해야 1회차 때 악숭 세력이 벌인 사건에 관한 정보를 지칭하는 거겠지.
“필요 없는데요? 악숭이들이 1회차에서 대단한 성과를 냈을 것 같지도 않고···. 세계수를 불태운 건 제법이지만, 그 외에는 뭐. 이간질로 국제 관계를 어지럽혀 전쟁을 일으키거나, 악마를 소환해서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하거나. 그런 음습한 짓이나 해댔겠죠.”
마왕은 회귀자다. 게다가 2회차에선 타락펜스까지 영입했다.
성검펜스가 살던 1회차보다, 2회차에 세운 계획이 더 치밀한 건 당연한 일이다.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전 버전 책으로 공부해 봤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2회차에 해당하는 [성검의 주인] 내용도 점차 무쓸모가 되어가는 판국에, 1회차 내용이 크게 도움 될 것 같지는 않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물론 정보는 많을수록 좋으니, 파악해 둬서 나쁠 건 없겠죠. 하지만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닙니다.”
성검펜스가 경계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세르펜스의 길고양이 시절이 떠올라서 푸핫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웃으시는 겁니까?”
“아, 죄송합니다. 세르펜스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있었던 일이 떠올라서요.”
“···현재의?”
“네, 현재의.”
내 대답을 끝으로 대화가 끊겼다.
성검펜스가 입을 다문 채, 또다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아래로 향했기 때문이다.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보니 쓰다듬어 줘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샘솟았다.
그러나 지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은 현재의 세르펜스가 아니다. 나는 두 손을 포개어 무릎 위로 올려놓았다.
“신의 사자께서는 모든 사람을 이렇게 대하십니까?”
“그럴 리가요. 그냥 눈앞에 내버려 둘 수 없는 사람이 있고, 제가 위로해 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당신을 더더욱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슬슬 대답 대신 침묵이 돌아오는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편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색하다.
무언가 말을 계속 이어나가야 할 것 같은데 할 말은 없고, 가까스로 대화 주제를 만들어 말을 붙이면 단답이 돌아오는 그런 느낌이다.
이런 불편한 느낌이 드는 건, 성검펜스가 무언가 말할 것처럼 굴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럼 정말로, 제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셔서 이러시는 겁니까···?”
“비슷합니다.”
엄밀히 따지자면 ‘어떤 새끼가 우리 애를 괴롭혔어?!’에 가까운 심정이지만. 세르펜스와 달리 성검펜스는 정식으로 ‘우리 애’가 되겠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더니 성검펜스가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다.
“당신도 걱정스럽고, 현재의 세르펜스도 걱정스러워서 그래요.”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사실 세르펜스가 성검에 접촉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거든요. 지금처럼 완전히 성검을 쥔 건 아니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간접적으로 살짝 건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내 이어진 대답에 성검펜스가 대답 없이 눈을 깜박였다. 계속 얘기하라는 뜻이 아닐까 한다.
나는 세르펜스가 성검과 접촉한 뒤 있었던 일을 성검펜스에게 설명했다.
타락펜스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건 빼두고, 다른 회차의 기억을 엿본 탓에 세르펜스가 혼란스러워했다는 것 정도로.
성검펜스도 세르펜스이니만큼. 이 정도 설명했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했다.
“······?”
그러나 성검펜스가 멀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 그 이외의 것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우울증이 녀석의 명석한 두뇌마저 집어삼켰나 보다.
“당신은 최선을 다해 살았고,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습니다. 힘들게 살아온 당신에게 뒤늦게라도 위안을 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모른다면, 그건 진심으로 하는 말이 아니게 돼버리잖아요. 그리고···.”
“···그리고?”
“당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제가 알아야, 혼란스러워할 세르펜스를 달랠 수 있을 테니까요.”
말해놓고 나니, 괜히 성검펜스에게 미안해졌다.
성검펜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역시 기분이 좀 나빴나 보다.
“그래도 당신에게 위안을 주고 싶다는 건, 결코 거짓말이 아닙니다. 믿어주세요.”
“···그런데 신의 사자께서는 저를 이름으로 부르시다가도, ‘현재의 저’를 함께 언급하실 때면 그자를 이름으로. 저는 ‘당신’이란 호칭으로 지칭하고 계신다는 걸 자각하고 계십니까?”
“네, 뭐···.”
세르펜스와 구분하여 헷갈리지 않게 의사를 전달하려면 어쩔 수 없다.
속마음으로는 성검펜스라 얼마든지 불러도 상관없고, 이미 그렇게 부른 적도 있지만.
그는 성검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해 왔다.
그런 녀석의 이름 앞 글자를 ‘성검’으로 대체해서 부르는 건 너무 무심한 처사가 아닐까?
“···말씀드리겠습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리였으나, 무엇을 말하겠다는 것인지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째서인가 그렇게 말하는 성검펜스의 목소리가 유난히도 울적하게 들렸다.
“혹시 기분 상했어요?”
“아닙니다. 그저···, 제 곁에도 당신 같은 분이 계셨더라면. 그런 생각이 떠올라서···.”
요컨대 현재의 세르펜스가 부럽다는 소리다.
그리고 약간의 후회가 함께 묻어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유지스에게 마음을 열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아니, 잠깐만! 방금 얘가 나를 당신이라고 칭하지 않았어?!’
손이 근질거렸다. 성검펜스를 붙들고 방금 한 말을 다시 해 보라고 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녀석이 놀라 달아날 것 같아서 참기로 했다. 성검펜스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는 것도 한몫했다.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달래야 한다는 말은 뺄 걸 그랬나···?’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후회스럽지는 않았다.
만약 내게 말을 무를 기회가 찾아오더라도 그러지 않을 것이기에.
“제 얘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성검펜스가 느닷없는 타이밍에 질문을 청해왔다. 무엇을 물어보려는 것인지 전혀 짐작이 안 간다.
그래도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고 대답했다.
녀석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나에게 내보이기로 약속했으니까. 자고로 오는 정이 있으면 가는 정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제가 그쪽의 정체를 의심했을 때, 어째서 순순히 인정하셨던 겁니까?”
잠깐 ‘당신’이 되었던 호칭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신의 사자’나 ‘그쪽’ 따위가 아니라 계속 ‘당신’으로 불러 달라고 떼쓰고 싶다. 하지만 오늘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생떼를 부리기엔 조금 부끄러워서 관뒀다.
“호흡이니 발성이니 하는 것들을 운운하며 제가 시온이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제가 거기서 뭘 어떻게 우깁니까?”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제 말보다 신의 사자께서 하시는 말씀을 믿었을 겁니다.”
“······.”
이번에는 성검펜스의 것이 아닌 내 입술이 딱 붙어버렸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성검펜스가 막 나타났을 당시. 그의 상태는 딱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나도 다소 불안함을 느끼긴 했으나 성검펜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더욱이 내게는 신의 사자라는 간판도 있다. 일행들과 함께 지내며 쌓아온 신뢰 관계도 있고.
사람들이 누구 말을 믿을지. 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검펜스를 가볍게 한 번 찔러본 후, 곧바로 백기를 들어 올렸다.
“반드시 숨기지 않아도 되었던 겁니까?”
성검펜스의 말대로. 신뢰하는 동료들에게 기를 써서 숨겨야 할 만큼 내 정체는 엄중한 비밀이 아니다.
소설이니 뭐니 하는 얘기를 하는 게 조금 껄끄러울 뿐인데, 그 정도는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다.
“혹시 일행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을 참고 있으셨던 겁니까?”
그런 건 아니다.
반드시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니었던 것처럼, 반드시 말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들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는 내가 ‘시온 리벨론’이니까. 일행들이 알고 있는 ‘시온’은 바로 나니까.
말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설혹···, 현재의 제가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도록 가로막은 겁니까?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당신의 존재를 독차지하기 위해?”
“······.”
나는 어처구니를 잃고 성검펜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 녀석, 대체 뭘 자연스럽게 이간질을 하고 앉아 있는 걸까?
이런 방법으로 자신도 ‘세르펜스’라는 걸 어필하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