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9화(59/1105)
59회. 공작가의 수상한 보좌관 (2)
낭비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아무 의미 없이 스크롤을 날려버리고 말았다.
당시에는 인질이라는 말에 겁먹어 허겁지겁 써버렸는데, 지나고 나니 아까워도 이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다.
열심히 스크롤을 만들었을 솔레르티아에게 미안해질 정도다.
‘그렇긴 해도 사용한 건 사용한 거니···.’
역시 두 장 정도는 있어야 안심이 될 것 같아, 겸사겸사 솔레르티아의 안부도 물을 겸 해서 그녀의 가게로 향했다.
– 딸랑~.
작은 종소리를 울리며,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어떤 스크롤을 찾으시나요?”
“어서오···, 어머. 시온씨!”
들어가 보니, 카운터 안쪽에 솔레르티아 말고 처음 보는 여성이 한 명 더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솔레르티아씨. 그런데 저분은 누구신지···?”
“아무래도 저 혼자 가게를 보려니 스크롤 제작할 시간이 부족하더라고요. 그래서 한 명 고용했어요.”
“안녕하세요, 엘라 벤디툼이라고 합니다. 사장 언니의 지인분이시니, 그냥 엘라라고 불러주셔도 돼요.”
사장 언니라니, 벌써 언니 동생 하는 사이가 된 건가?
저번 달 가게 개업식날 살짝 방문했을 땐 솔레르티아 혼자였으니, 일 시작한 지 별로 안되었을 텐데···.
하기야 솔레르티아가 원체 친화력이 뛰어나기도 했고, 엘라 역시 싹싹해 보이는 게 죽이 잘 맞을 것 같았다.
“저는 시온 리벨론이라고 합니다.”
“공작가에서 보좌관 일을 하신다던 사장언니의 친구분이 바로!”
“예, 그게 바로 접니다!”
대단한 사람을 마주했다는 듯, 엘라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났다.
“언니, 굉장해요! 정말 친구셨구나!”
“그으럼~! 어머, 설마 이제까지 안 믿었던 거니?”
“에헤헤···.”
그리고 그녀의 두 눈 가득한 존경심이 향한 곳은 내가 아니라 ‘공작님의 보좌관의 친구’인 솔레르티아였다.
사회생활을 참 잘하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시온씨는 어쩐 일로 오셨나요? 아무 용건 없이는 안 오시는 거였죠?”
“아, 아니 그건···.”
“농담이에요, 농담~!”
내가 곤란해하는 반응을 보이자, 솔레르티아가 깔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요즘 수도가 아주 떠들썩하길래 바쁘신 줄 알았는데, 사람을 안 보내고 직접 오셨길래 무슨 일이라도 있나 물어본 거예요.”
“이제 바쁜 일은 거의 끝나서 괜찮습니다. 물론 용건도 있지만, 요즘 어떻게 지내시나 안부도 물을 겸 찾아왔습니다.”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처음에야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심심했는데, 지금은 엘라도 있고 괜찮아요.”
가게 봐 줄 사람이 필요해서 직원을 고용해놓고, 어째서 밖에 나와 있나 했더니 그녀와 수다라도 떨고 있었나 보다.
“장사도 아주 잘 되고 있답니다? 상비된 스크롤들도 곧잘 나가고. 자세한 고객님들의 정보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주문 제작 건도 꽤 들어오고 있어요.”
무척이나 뿌듯하다는 표정으로 솔레르티아가 말했다.
가게에 손님이 안 보이기에 약간 걱정했으나, 역시 스크롤이 워낙 고가의 물품이라 사는 사람만 사다 보니 그렇게 보였을 뿐인가 보다.
“그보다 시온씨는 어때요? 공작님과는 잘 지내고 계신가요?”
“네, 저보다 공작님과 잘 지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나는 진담으로 한 말이지만 솔레르티아는 농담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녀가 소리 높여 까르르 웃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엘라는 이해는 안 되지만, 사장님이 웃으니 일단 웃고 본다는 느낌으로 밝게 웃었다.
“참, 용건도 있다 하셨죠? 스크롤 구매인가요?”
“네, 얼마 전에 스크롤을 사용할 일이 있어서 하나 썼거든요. 혹시 모르니 다시 사두려고요.”
“이번에도 최상급 방어, 맞으시나요?”
“경비로 처리되는 거니 당연히 그래야죠.”
나와 솔레르티아가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었다. 솔레르티아는 돈을 벌어서 좋고, 나는 한층 더 안전해져서 좋다.
우리의 대화를 들은 엘라가 잽싸게 일어나 스크롤을 가져왔다.
“사실 저는 이제까지 귀족 보좌관이라면 그냥 귀족님 뒤만 따라다니면서, 스케쥴 관리나 서류작업이나 하고. 그런 줄로만 알았지 뭐에요?”
보통은 그게 맞았다. 하지만 난 이미 글렀지 싶다.
“이 기회에 다른 스크롤도 구매하시는 게 어때요? 호신이라는 게 꼭 방어에만 국한되라는 법은 없잖아요?”
“하지만 위험하잖습니까.”
“어머나? 어차피 무고한 사람에게 쓰실 건 아니잖아요?”
“당연히 그렇긴 한데, 실수로라도 상대가 잘못되면 좀···.”
“공격 마법이라 해도, 무조건 크게 다치거나 죽는 건 아니랍니다? 가벼운 전기 충격이나, 상대를 묶거나 밀어내는 식의 마법도 많아요.”
그건 조금 솔깃했다.
“그 외에도 생활에 유용한 마법이 담긴 스크롤도 많이 있는데, 이쪽은 어떠신가요? 사실 마법이라는 게 편리함을 위해 만들어진 학문인데, 그런 걸 다툼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니···. 너무 안타깝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화, 확실히···.”
“그쵸?”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솔레르티아의 마법 예찬인지 뭔지가 이어졌고, 옆에서 엘라가 추임새를 넣으니 이건 안 살 수가 없었다.
결국, 가게를 나오는 나의 어깨에는 크로스 백 하나가 덜렁 걸려 있었다.
가방은 솔레르티아가 빌려준 것으로, 안에는 구분을 위해 색색의 라벨이 붙은 스크롤로 가득했다.
‘얼떨결에 이거 다 경비 처리해버렸는데, 세르펜스에게는 뭐라고 말하지?’
이 정도면 소확횡이 아니라, ‘대담하게도 확실한 횡령’이라는 의미로 대확횡이라 불러야 할 정도다.
‘그래도 이것들을 내가 개인적으로 쓸 일이 뭐가 있겠어? 어차피 다 세르펜스와 관련해서 쓰이겠지.’
그리 생각하니 횡령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대신 새로운 문제가 떠오른다.
‘시온의 몸에 빙의한 이후, 내가 세르펜스의 뒷바라지 말고 다른 걸 한 적이 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퇴근한 후에는 주로 혼자 침대를 뒹굴뒹굴 하면서 [성검의 주인]의 내용을 복기했다.
마음 같아서는 어디 적어두기라도 하고 싶지만, 한스가 찾아내서 세르펜스에게 갖다 바치겠지.
그리고 세르펜스라면 그 내용이 비록 이 세계의 문자가 아니더라도, 어떻게 해서든 해석해낼 것만 같다.
‘아니지, 표음문자니까 읽을 줄 알게 되어도 의미는 모르려나?’
그 외에는 구베르토 행정관이 내준 숙제를 하거나, 주방 시녀인 포피나에게 가서 내일의 디저트를 제안한다거나.
가끔은 유명한 가게에 예약을 넣어, 케이크 등을 남몰래 사다 먹이기도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일 중독자라니?!’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이건 좀 심각한데···.”
“예? 무슨 큰일이라도 생기신 건가요?”
“그렇다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으악!”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지며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에 갑자기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깜짝 놀라 소리치며 몸을 돌려 확인하니, 유지스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위리디아님?! 갑자기 어디서···.”
어째서 유지스는 자꾸 의외의 장소에서, 생각지도 못한 타이밍에 나타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 나타나신 건 우연···은 아니신 거죠?”
“네, 저번에 하다만 이야기를 이어가 볼까 해서요. 처음에는 프라시더스 공작가에 방문 신청을 넣을까도 했지만, 그 보좌관만 따로 만나는 건 아무래도 좀 이상하게 보일까 봐서요.”
외국에서 온 외교관이 공작저에 방문해서 보좌관만 보고 가는 것도 이상하다. 공작을 만난 후라도, 보좌관만 따로 불러내 만나도 이상했다.
“그래서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오늘은 혼자 외출하신 것 같아서 찾아와봤어요.”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지? 공작저 근처에 정령이라도 대기시켜 놓은 건가 의심스럽다.
“아차! 감시하려던 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정령에게 부탁해서 살짝 불러내 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공작님 때문에요?”
“예, 맞아요. 발각돼서 역소환 당하는 것까지는 감내하겠지만, 역추적이라도 당하면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으니까요.”
역소환도 상당히 몸에 무리를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감내하겠다니.
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만나려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중에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는다면 얼마나 창피할까?
“그래서, 저는 왜 만나려고 하신 겁니까?”
“길거리에서 드릴 말씀은 아니고···.”
그녀의 제안으로 근처에 있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편하게 얘기해보죠.”
주문한 차가 나오자마자, 유지스가 정령을 불러내어 소리의 차단을 부탁한 후 서두를 열었다.
“참, 그전에 오늘은 혼자신가요? 그때의 호위는···.”
“그는 분명 뛰어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공작님만은 못하죠. 들킬지도 모르니 웬만하면 수도에는 오지 말라 일러두었습니다.”
사실 이건 조금 전 유지스가 했던 말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세르펜스에게 들킬까 봐 정령도 못 보낸다니, 이렇게 좋은 변명 소재가···!’
이렇게 말해두면 ‘공작님이 계실 땐 그 호위가 없고, 그가 있을 땐 항상 공작님이 안 보이시는데 혹시?’ 같은 의문은 떠올리지도 못할 거다.
“그렇군요···.”
유지스의 귀가 아주 살짝 아래로 쳐졌다. 약간 실망했나 보다.
“왜요? 그가 없으면 안 되는 이야기입니까?”
“아, 아녜요! 그냥 조금 신경 쓰여서 물어본 거예요!”
“나중이라도 전하실 말이 있다면 제게 알려주시면 됩니다.”
어떻게 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듯하던 그녀는, 결국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아까 심각하다던 이야기는 뭔가요? 혹시 암흑가 위치를 발각당한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냥 개인적인 일입니다.”
내 말에 유지스가 다행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의 개인적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위리디아님께선 어째서 그곳에 대해 그리 관심이 많으십니까? 그쪽 입장에서는 당장 쳐부수고 싶은 곳 아닙니까?”
“아마 예전이라면 그렇게 생각했겠죠.”
최근 들어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보다.
“저는 인간들에게 선한 마음이 있다고 믿었고, 지금도 믿고 있기는 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인간의 선한 마음을 믿는다니. 그것은 그녀가 엘프이기 때문인지, 그녀 개인적인 성향인지는 아직 판단하기 힘들었다.
[성검의 주인]에서 읽었던 그녀의 모습을 보면 후자일 것 같기는 했다.“하지만, 그들은 끝없는 욕망도 함께 가지고 있죠. 그것은 아무리 뽑아내려 해도, 아무도 모르게. 그들만이 아는 장소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
“그러다가 당신들이 암흑가에서 하신 행동들을 보고 깨달았어요. 어떻게 해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생겨난다면, 차라리 그 상태로 관리하는 편이 더 효과적이란 것을요. 그들이 인간으로서의 선을 넘지 않도록 제지할 누군가가 필요해요.”
참 좋은 것도 배워가셨네.
‘그런데 그거 사연 있는 악당 보스의 클리셰 대사 중 하나 아닌가?’
세계정복 시도하려다 주인공에게 처단당하며,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라는 혼잣말과 함께 죽은 가족이나 연인을 떠올리기 딱 좋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