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59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598화(598/1105)
598회
72. 공작님과의 재회 (10)
나는 에드나의 팔불출스러운 면모에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제 호칭 정리도 끝났으니, 마음 편히 식사에 집중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아주 우연히 시야에 윈스톤이 들어왔다.
원래도 과묵한 그였으나 오늘은 특히나 더 조용한 탓에,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도 존재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냥 길 가다 보이는 바위처럼, 평범한 배경 같은 느낌이다.
‘그러고 보면 윈스톤도 어렵사리 세르펜스의 신뢰를 얻고 난 이후에야, 겨우 이름으로 불렸는데···. 윈스톤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려나? 유지스처럼 억울해할까? 아니면 휴마누스처럼 기꺼워할까?’
나는 윈스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수프를 떠먹으며 그 의중을 가늠해 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윈스톤이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고는 강의 시간에 교수님과 눈이 마주친 학생이 시선을 회피하며 딴청을 부리듯. 고개를 숙이고 수프를 떠먹으려 들었다.
하나 애석하게도 그의 그릇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세르펜스에게 새 친구를 만들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사이, 윈스톤은 묵묵하게 식사를 이어나갔고 그 결과가 바로 저 빈 그릇이겠지.
윈스톤은 허탈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나도 주군을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것이오···?”
“어? 그러게요? 그 생각은 안 해봤는데···.”
내 대답을 들은 윈스톤이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 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만능펜스와 달리 독순술 같은 건 할 줄 모른다. 하지만 윈스톤의 표정과 상황과 대략적인 입 모양을 통해, 그가 소리 없이 중얼거린 말이 ‘젠장’이었음을 눈치껏 때려 맞출 수 있었다.
‘아하! 내가 세르펜스를 이름으로 부르라고 강요할까 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있었던 거구나?’
윈스톤은 세르펜스의 기사다. 그러니 그가 세르펜스를 주군으로 부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두가 세르펜스를 이름으로 부르는 가운데.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윈스톤 혼자 세르펜스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것도 이상하다.
“나는 절대 그럴 수 없소. 어찌 기사 된 자로서 감히 주군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겠소?”
“어차피 기대도 안 했네요, 이 고지식한 기사님아.”
내 대답에 윈스톤이 크게 안도하며, 머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직 방심하기에는 일렀다.
“윈스톤 경은···, 제 이름을 부르는 게 그리도 싫으십니까?”
여태껏 윈스톤에게 이름으로 불리길 바란 적도 없는 주제에.
막상 윈스톤이 자신을 이름으로 부르길 거부하자, 세르펜스가 서운함이 뚝뚝 넘쳐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녀석의 얼굴에는 일말의 배신감마저 엿보였다.
‘하긴.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도 제 이름을 불러주는데, 정작 자신이 마음을 연 대상이 싫다고 버티고 있으니···.’
세르펜스의 반응에 윈스톤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심지어는 이마에 식은땀까지 맺혔다.
그 모습을 본 세르펜스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죄 없는 윈스톤의 죄책감을 자극했다.
진심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철저히 계산된 게 분명한 행동이다.
그걸 아는 나조차 ‘웬만하면 그냥 불러주지.’ 하고 무심코 생각해 버릴 정도로, 세르펜스의 시무룩한 표정은 사람들의 마음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걸 마주하는 당사자는 세상 제일의 쓰레기가 된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세르펜스가 저렇게 작정하고 나온 이상, 결과는 뻔하디뻔했다.
나는 그냥 밥이나 먹으며 관전해야겠다.
“시, 싫다는 게 아닙니다. 그저, 저는 기사로서···.”
윈스톤이 더듬더듬 말했다.
입으로는 기사의 도리를 내뱉고 있었으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가 갈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주군을 실망시키면서까지 규율을 지키는 게, 과연 기사로서 옳은 일인가?’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게 분명했다.
“제가 가장 신뢰하는 기사인 경에게, 특별히 이름을 허락했다고 생각해 주시면 안 되는 겁니까?”
이 정도 압박을 가했으면 되었다고 판단한 것인지, 세르펜스가 슬쩍 숨통을 열어주었다.
주군을 이름으로 찍찍 불러대는 불경함이 순식간에 명예의 상징으로 둔갑했다.
“항상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건 아닙니다. 선우처럼, 사적인 자리에서만 그리 불러주셔도 됩니다.
“아, 알겠습니다. 세···르펜스 님.”
“감사합니다, 윈스톤 경.”
결국 윈스톤은 백기를 들어 올렸다.
그에 세르펜스는 감동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감사의 말을 건넸다. 짧은 시간 만에 극심한 마음고생에 시달린 윈스톤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효과는 훌륭했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걸까 살짝 후회하는 듯했던 윈스톤의 얼굴에서 불안이 걷혔다.
듬직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윈스톤이 책임감 가득한 눈빛으로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주군의 웃는 얼굴을 지켜드리는 게 기사의 임무니, 어쩌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해도 유분수지. 완전 병 주고 약 주는 꼴이다.
“와···! 일부로 저러는 거여도 대단할 테지만, 그런 게 아니라 천연이면 더 대단한데?”
푸로르가 혀를 내두르며 크게 감탄했다. 그녀 딴에는 혼잣말을 한다고 한 것 같은데, 목소리가 커서 다 들렸다.
그렇게 세르펜스는 덜 대단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세르펜스는 천연덕스럽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더 대단한 사람을 연기했다.
“그럼 윈스톤 경,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줄래?”
끝난 줄 알았던 윈스톤의 수난이 재시작되었다. 휴마누스에 의해.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세르펜스의 심리적 헹가래에 시달리다가, 겨우겨우 땅에 내려왔건만.
나는 가엾은 윈스톤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주군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워 죽겠는데, 이제는 예비 황제까지 와서 이름으로 불러 달라는 소리를 해댔으니···.’
윈스톤의 표정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회사에서 사흘 밤낮을 지새우며 급한 일을 처리한 뒤. 드디어 집에 가나 싶었는데, 팀장에게 붙잡혀 새로운 일거리를 떠안기라도 한 표정이다.
요약하자면 퇴사가 간절한 직장인처럼 보였다.
“세르펜스도 이름으로 불리는데, 나만 황태자 전하로 불리는 건 좀 그렇잖아.”
“끄응···.”
“불편하다는 건 알지만 부탁할게. 내가 제국의 황태자가 아니라, 휴마누스라는 한 사람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건 지금뿐이야. 그렇게 대해주는 사람도 이곳에 모인 몇몇뿐이고.”
휴마누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휴마누스는 윈스톤을 상대로 말하고 있음에도, 황태자로서 말할 때 특유의 말투가 아닌 비격식체를 쓰고 있었다.
나쁘게 보자면 이미 답을 정해놓고 말하는 중이라는 뜻이고, 좋게 보자면 그만큼 간절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나를 이름으로 불러줬으면 좋겠어. 안 될까?”
“···알겠습니다.”
앞서 세르펜스에게 한차례 시달린 이후라서일까?
윈스톤이 무의미한 말씨름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휴마누스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에드나도 괜찮지?”
“네. 괜찮아요. 앞으로 휴마누스 님이라 부를게요.”
휴마누스는 자신에게 돈을 안 주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아니마의 동료이기 때문일까?
에드나가 망설임 없이 곧장 대답했다.
‘잠깐만. 이러면 에드나는 휴마누스와 세르펜스에게 님을 붙여 부르는데, 아니마는 그냥 이름으로만 부르는 거니까···.’
족보가 꼬여도 단단히 꼬인 것 같다.
그래도 꼬인 게 내 족보는 아니니까 신경 꺼야겠다···고 생각했다.
“야! 앞으로 이런 제안 할 거면 예고라도 해. 너 때문에 자꾸 우리 언니가 곤란해지잖아!”
아니마가 나를 삿대질하며, 반말과 함께 ‘야’, ‘너’라고 부르기 전까지.
* * *
세르펜스가 돌아온 지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다.
서둘러 움직였다면 지금쯤 국경을 넘었을 거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 탓에 우리는 하룻밤 더 야영을 하게 되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삼인방이 움직이면서 날개를 유지하는 수련도 겸하느라, 발걸음에 속도가 붙지 않은 까닭이다.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끝낸 지금도 세 사람은 빛나는 날개를 꺼내놓고 있었다.
“세르펜스 님께서 창안하신 기술이니만큼, 배우는 게 빠르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정말 빠르시네요.”
“그러게나 말이야. 고작 이틀 만에 이렇게 따라잡힐 줄은 몰랐는데···.”
세르펜스가 만들어낸 은빛 날개를 보며, 리에나와 휴마누스가 나란히 감탄했다.
한 사람은 정보 부족으로 인해 틀린 말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냥 틀려먹었다.
리에나는 세르펜스에게 배우는 게 빠르다고 말하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르펜스는 의식 저편에서 성검펜스의 강의를 도강했으니까.
그런데도 일부러 헤매는 척하며 이틀이나 되는 시간을 낭비했으니. 어찌 빠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휴마누스가 틀려먹은 이유는 굳이 말할 것도 없다. 눈에 딱 보이니까.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휴마누스의 황금빛 날개와 달리, 세르펜스의 은빛 날개는 완벽한 형상을 갖추었다.
그러니 휴마누스는 ‘따라잡혔다.’가 아닌, ‘추월당했다.’라고 말했어야 한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게 리에나 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세르펜스가 수줍은 척 연기하며 겸손을 가장한 가식을 떨어댔다.
저놈의 대외펜스 가면은 어떻게 해야 벗겨낼 수 있을지 실로 고민이다.
“가만 보면 선우 씨는 잔걱정이 참 많네요. 아니면 욕심이 많으신 건가?”
에드나가 모닥불을 쬐는 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자연스럽게 발음하고 있었는데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낯선 발음 때문에 버벅거리던 것도 처음 하루뿐.
‘어제부터는 일행 모두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며 내 이름을 불러줬으니까.’
그러니 지금은 에드나의 발음보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훤히 꿰뚫어 봤다는 듯한 말투가 더 신경 쓰였다.
“제가 뭘요?”
“저 정도면 다른 분들하고 충분히 잘 지내시는 편 아니에요? 그런데도 선우 씨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것처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세르펜스 님을 지켜보고 있잖아요.”
“기왕이면 충분히 잘 지내는 정도가 아니라, 툭 터놓고 지낼 수 있는 편한 사이가 되면 더 좋잖습니까?”
에드나는 세르펜스가 내 앞에서 야옹 한다거나 어리광을 부린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행동 중 어느 부분이 가식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연기이며, 진심은 어느 정도 섞여 있는지. 거기까지는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충분히 잘 지낸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성검 일행은 다 좋은 사람들이니까, 걱정하지 말고 마음을 열어 진심으로 그들을 대하면 좋을 텐데···.’
그중에서도 리에나는 특히나 다정하고 유한 사람이다.
마침 신성력으로 날개 만드는 법을 배운다는 핑계도 있겠다, 겸사겸사 친해지길 바랐건만.
세르펜스는 대외펜스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리고 처음 보는 기술을 배우는 사람처럼 노력하는 연기를 펼치며, 지난 이틀을 그냥 날려버렸다.
“다 큰 어른을 어린애 취급하는 건 그렇다 쳐도, 교우 관계까지 참견하는 건 너무 갔어요.”
“가긴 어딜 갑니까? 전 여기 있는데.”
“말장난하지 말고요.”
에드나가 정색하며 말했다.
이런 말장난은 취향이 아닌가 보다.
“맞아! 유선우 너, 우리 언니가 말씀하시는데 감히 말장난하는 거 아니야!”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난 아니마가 나와 에드나 사이에 끼어들며 소리쳤다.
어쩐지 그 말이 ‘어디서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말대꾸를 해?!’로 번역되어 들렸다.
“피곤해서 일찍 잔다더니, 왜 나왔어?”
“다들 밖에 잇꼬, 나 혼자 천막 안에 있으려니까 무서워쪄···. 그래서 잠이 안 와쪄, 히잉···.”
방금까지 정확한 발음을 구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꼰대 같은 말을 해댔던 아니마가 에드나의 품을 파고들며 칭얼거렸다.
에드나는 앞서 그 꼴을 봐 놓고도, ‘에구, 그랬어?’ 같은 소리를 해댔다.
순간 ‘그랬겠냐?!’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내뱉지 않고 삼켰다.
아무리 봐도 에드나가 아니마의 가식을 알면서도, 그냥 받아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