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0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02화(602/1105)
602회
73. 공작님과 아르케 왕국 (4)
‘그나저나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조용히 지나갔네···? 된통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유지스를 살펴보았다.
가족을 향한 믿음을 기반으로 불안함을 떨쳐낸 것인지, 그녀는 평상시의 여유를 되찾은 듯 보였다.
다행이라 생각하며 안도하는 그 순간. 내 시선을 눈치챈 유지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톡 쏘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세요. 정말 섭섭했으니까요.”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으음···, 죄송합니다.”
나와 세르펜스는 나란히 사과했고, 유지스는 만족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덧붙여 휴마누스는 멀뚱히 앉아있다가 한 박자 늦게 사과의 말을 꺼냈다.
자신에겐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는 대신 깔끔한 사과를 택한 거다.
“그래서,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는 건 어떤 건가요?”
유지스가 화제를 돌려 질문했다. 닼숭이에 관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이다.
나는 ‘어디 보자···.’ 하고 중얼거리며, [성검의 주인] 내용을 머릿속으로 더듬어 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막아야 하는 사건이라 함은···.’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 냈으며, 대지를 황폐하게 하고, 악숭 세력의 제물(祭物)을 풍족하게 쌓아 올린 최악의 인재(人災).
그리고 푸로르의 아버지와 그의 용병단이 몰살당한 원인.
바로, 국가 간의 전쟁이다.
휴마누스를 비롯한 성검 일행이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그들의 의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여러 군주가 악숭 세력의 이간질과 욕망을 자극하는 달콤한 꼬임에 넘어갔다.
대륙 곳곳에서 크고 작은 전쟁이 일어났다.
‘푸로르의 아버지인 용병왕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겠노라 선언했지만···.’
전쟁의 불씨가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차 번져가는 것을 보고 그 뜻을 꺾어야만 했다.
그와 그의 용병단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중재를 위해 전쟁에 끼어들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양측의 집중 공격을 받은 용병단은 무너졌고, 그들의 시체와 핏물 위에서 전쟁이 이어졌다.
“교황에게는 집콕···. 아니, 신전콕을 시켜 뒀고. 신성 루멘 제국도 든든하게 버티고 있으니···. 어지간하면 전쟁이 일어나는 일은 없겠죠?”
룩스메아 교단과 루멘 제국이 건재하는 것만으로도 전쟁 억제 효과는 확실하다.
악숭 세력이 이간질로 국가 간 갈등을 유발하려 한들. 각 나라의 군주들은 교단과 제국의 눈치를 보느라 쉽사리 전쟁을 선택하지 못한다.
교단과 제국에서도 전쟁이 발발하지 않도록, 중간에서 그들의 불만을 들어주고 조율에 힘쓸 것이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다.
폴드 공국처럼 나라 하나가 통째로 악숭 세력에 넘어갔을 때.
하지만 그 경우 또한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전 바스툴 국왕이 대륙과 악숭 세력 사이에서 줄타기하려다가 걸려서 효수당했으니까.’
그리고 공왕 러스티가 ‘협조자’인 전 바스툴 국왕을 버리고 혼자 내뺐다는 건, 꽤나 유명한 얘기가 되어버렸다.
바스툴 왕실 식구들을 제물로 받아 챙겼다는 설명도 함께.
개인적으로 나는 이 사건을 ‘공왕의 먹튀 사건’이라 부르고 있다.
아무튼 이 사건이 단시간 만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건, 목격자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나 결정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악숭 세력은 믿을 게 못 된다. 손을 잡아 봤자, 뒤통수만 얻어맞을 뿐이다.’라는 메시지를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
대륙 각지에 신전을 둔 룩스메아 교단이 나서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까닭이다.
대륙 측이 우세한 현 상황을 뒤엎지 않는 이상.
악숭 세력이 ‘가진 자들’의 욕망을 건드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됐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수 있는 것이 더 많으니까.
그들이 이용해 먹을 수 있는 기득권자는 소문이 퍼지기 이전에 손을 잡아두었던 자.
혹은, 절대 세간에 알려져서는 안 될 약점이 잡힌 자들뿐이리라.
“그래도 마인 러스티가 마물과 병사로 이루어진 군단을 꾸려 게릴라전을 펼친다면, 피해는 상당할 거예요. 혹시 그 해결법을 알고 계시나요?”
리에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쟁이라는 단어에서 ‘나라 간의 충돌’이 아닌, ‘많은 사상자가 생기는 큰 전투’를 먼저 떠올렸기에 나온 질문일 테다.
2회차에서는 공왕이 대륙 편이었다는 건 아직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공략법을 알고 있다면 설명해 달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게 있다면 나야말로 알고 싶다.
“조금 매정한 소리일 수도 있는데, 그건 각 나라에서 알아서 대처해야 할 문제입니다. 저희가 소식을 듣고 찾아갔을 땐, 어차피 공왕은 이미 도망치고 없을 테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누구는 꼴랑 검 한 자루 들고 반신(半神)인 마왕이랑 싸우게 생겼는데, 다들 그 정도는 해야죠!”
“선우의 말이 옳습니다. 피해를 줄이는 건 중요하나, 저희가 나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펜스가 맞장구를 쳤다.
그 행동이 너무 간신 같아서, 나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쳐다봤다.
이러한 내 시선에도 세르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리에나 님께서 무고한 이들의 죽음을 걱정하고 있다는 건 압니다. 성검의 주인과 함께하는 일행으로서. 그리고 룩스메아 님을 따르는 신관으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그 마음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대륙이 두 번이나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원인이 바로 그 책임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작정 내 의견에 동조하고 본 것이 아니라는 듯.
세르펜스가 침착하게 제 생각을 말했다.
“누군가의 책임감은 다른 누군가의 태만함을 불러오기 쉽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역량을 넘어선 책임감은 구성원 전체에게 독으로 작용합니다. ‘성검의 주인이 될 예정자’로 불렸던 시절에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압니다.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진다는 게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그러니 저희는 많은 부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조원들이 못 미덥다는 이유로 혼자 조별 과제를 해결하려다가, 커지는 스케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뒤늦게 조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조장 같은 소리다.
“와···,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다크 엘프에 관한 걸 비밀로 하려고 하셨구나.”
유지스가 놀라워하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불시에 극딜 당한 세르펜스가 흠칫 어깨를 떨고는 울상을 지었다.
“앗, 죄송해요.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닌데, 너무 놀라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정말로 비꼬려던 의도는 하나도 없었는지, 유지스가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세르펜스에게 사과했다.
세르펜스는 잘못한 게 있으니 차마 따지지는 못하고, 시무룩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적인 건 적의 숫자가 무한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마인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마물의 수 또한 그 한계가 명확합니다. 악마 숭배 세력의 흑마법사들이 인위적으로 마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는 하나, 볼타 산맥에서 자연 발생한 마물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시들펜스가 울적한 목소리로 희망적인 말을 했다.
그 괴리감이 느껴지는 행동 때문에 일행은 다 같이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처럼, ‘어,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버벅거렸다.
그리고 세르펜스의 말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되새기고 나서야, 다행이라며 안도의 말을 한마디씩 꺼냈다.
“세르펜스, 앞으로는 그런 얼굴로 좋은 소식을 전하지 마세요. 다들 헷갈려 하잖아요. 세르펜스가 그렇게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사람들은 말속에 담긴 정보가 아니라 표정에 담긴 감정에 집중한단 말입니다.”
“으음···, 유의하겠습니다.”
내 지적을 들은 세르펜스가 양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듯 매만지며, 굳어있는 얼굴 근육을 확인하고 표정을 풀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내버려 두고 입을 열었다.
“잠깐 얘기가 샜는데, 2회차에서는 일찌감치 제국이 망하고 교단이 분열되어서 대륙이 개 난장판이었거든요? 악숭 세력도 그 상황에 맞춰서 일을 벌인지라···. 우리가 미리 알고 대비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습니다. 그 점을 유의해서 들어주세요.”
적의 참모가 타락펜스에서 공왕으로 바뀌었다는 것 또한, 악숭 세력의 행보를 예측하기 어렵게 만든 이유 중 하나다.
세라투 가문에 수작질을 부린 것처럼 타락펜스의 계략을 조금씩 바꿔가며 손을 댈지. 아니면 전부 엎어버리고 새로운 술책을 강구할지.
지금으로서는 그조차도 알 수 없다.
작은 불안 요소를 끌어안은 채.
나는 악숭 세력이 감행할만한 큰 사건과 소환되었던 악마들의 특징들을 설명했다.
마침내 설명이 끝나고.
일행들은 그 내용을 머릿속에 새겨두려는 듯 침묵에 잠겼다. 성실한 리에나는 수첩을 꺼내서 필기까지 했다.
그 적막을 깨고 입을 연 건 휴마누스였다.
“그런데 말이야, 가장 중요한 얘기를 빼먹지 않았어?”
나는 내가 무슨 얘기를 빼먹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떠올렸다.
“아 참! 깜박했는데, 마왕에게는 다른 회차의 기억이 있습니다. 제가 전 회차의 정보를 쥐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러니 방금 말씀드린 정보도 얼마든지 휴짓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출 변형과 함정 문제도 있으니, 그 점도 주의해 주세요.”
“기출···, 변형이요?”
열심히 펜을 놀리던 리에나의 손이 멎었다.
함정 문제는 닼숭이에 낚였던 세르펜스의 사례가 있으니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지만, 기출 변형은 이해하기 어려웠나 보다.
“좋은 질문입니다. 저번 회차에서는 악숭이 하나가 베일을 속여서 신뢰를 얻은 뒤. 교묘한 말로 자신감을 상실케 하여, 자신을 의지하게 된 베일의 행동을 유도하고 주요 정보를 빼돌리는 등. 여러모로 이용해 먹었거든요? 그러다가 휴마누스랑 베일이 좀 친해지니까, 정신 공격을 한답시고 베일을 독살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부터 그를 죽여 없애 버리려 했죠.”
“어떻게 생각해 봐도 변형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내 예시에 푸로르가 딴지를 걸었고, 리에나가 수첩을 덮었다.
열심히 설명해 줬는데 수업 거부라니 너무하다.
리에나는 서운해하는 내 표정에 관심조차 주지 않고,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 후 새로운 질문을 꺼냈다.
“어쨌든 현 상태를 유지하면, 큰 위기는 닥치지 않을 거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아마도요? 저쪽도 저쪽 나름대로 새로운 수단을 쥐어 짜낼 테지만···. 그래봤자 2회차만큼 위험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요.”
장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세르펜스가 있고, 악숭 세력에는 없으니까.
나는 의기양양하게 가슴을 활짝 펴고 세르펜스를 기특하게 바라보았다.
세르펜스도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그렸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던 녀석의 입술이 열리며 청아한 목소리가 울렸다.
“네. 선우가 이 세상에 왔으니, 이번에야말로 우리는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세르펜스의 그 한마디로 인해 나는 근자감 넘치는 입만 산 놈이 되어버렸다.
‘나 말고 너님이요, 이 자식아!’
무력 하나 없고, 그나마 쥐고 있던 정보도 휴짓조각이 된 이 판국에. 나 자신을 믿고 그런 소리를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