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1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13화(613/1105)
613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2)
“역시. 세계수에 문제가 생긴 거죠?”
내 말에 하이 엘프가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기이하게 빛나는 은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리고 이내 눈꺼풀 뒤로 그 자취를 감추었다.
느릿하게 한 번의 들숨과 한 번의 날숨을 행하고 나서야, 하이 엘프가 감았던 눈을 떴다.
“네. 역시나, 그것을 짐작하고 오신 거로군요.”
하이 엘프는 내가 앞서 입에 담았던 ‘역시’라는 단어를 강조하여 입에 올리며, 내 말을 긍정했다.
세계수가 휴마누스를 상대로 인성질을 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순간이다.
그렇게 세계수는 누명을 벗을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도 다행스럽지 못했다.
비실비실하게 다 죽어가는 세계수보다, 다소 인성질을 하더라도 건강하게 버티고 선 세계수가 세상에 도움이 되니까.
“그런데 그쪽께서는···?”
이제까지 나를 ‘조연 1’ 정도로 보고 지나쳤던 하이 엘프가 내게 관심을 보였다.
이래서 사람은 목소리를 내고 살아야 하는가 보다.
“시온 리벨론입니다. 대외적 신분은 ‘프라시더스 공작님’의 보좌관이긴 한데···.”
나는 자기소개를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밝혀도 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 까닭이다.
이런 내 행동에도 하이 엘프는 의아하다는 기색조차 없이, 담담한 표정으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에라, 모르겠다!’
고민은 매우 짧았다.
내가 신의 사자라는 걸 떠벌리고 다닌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거늘. 이제 와서 고민하는 것도 우습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심하고 입을 열려는 순간.
“시온은 이 대륙을 구원하기 위해, 룩스메아 님께 사명을 하달받은 신의 사자입니다.”
세르펜스가 알아서 내 소개를 끝냈다.
자신에게 보내진 신의 선물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낯간지러운 소개가 아니라,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소개였다.
예전에 따끔하게 한마디 해둔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신이 ‘프라시더스 공작’이로군요.”
“네, 맞습니다.”
하이 엘프가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긴 액체가 찰랑거리듯, 하이 엘프의 두 눈동자 속 은빛이 잔물결을 이루어 넘실댔다.
세르펜스는 침착하게 하이 엘프의 눈을 마주 보았다.
녀석의 녹색 눈동자는 아무런 특수 효과가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천사와도 같은 얼굴이 있었으니.
그냥 숨만 쉬어도 신성해 보였으며, 눈망울을 반짝이는 것만으로도 신뢰도가 팍팍 올라갔다.
세르펜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이 엘프가 그 시선을 거두며 고개를 주억였다.
내가 신의 사자라는 얘기를 믿어준 것이다.
“그럼 신의 사자께서는 세계수 님께 변고가 생겼다는 걸 알고, 성검의 주인과 그 일행분들을 모시고 이곳에 오신 건가요?”
“시온이 아르케 왕국행을 결정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침 휴마누스가 세 번째 시련을 받았을 당시에 보았던 세계수 님의 상태가 신경 쓰여, 아르케 왕국으로 향한다고 하기에 이렇게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평소라면 상대방의 오해를 부정하지 않고,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려고 들었을 텐데.
어쩐 일인지 세르펜스가 사실대로 말했다.
성검 일행과 휴마누스가 버젓이 지켜보는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던 걸까?
아니면 모든 것을 다 알고 왔다고 말하면, 하이 엘프에게 세계수의 상태에 관한 설명을 듣지 못할까 봐?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하며, 하이 엘프가 묘한 눈빛으로 휴마누스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마치 ‘세 번째 시련을 받은 지가 언젠데, 그걸 이제야 눈치챘냐?’라고 힐난하는 듯 보였다.
휴마눈새의 악명이 하이 엘프들 사이에 퍼질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세계수 님의 상태에 관해서는 나중에 성검의 주인께 알릴 예정이었으나···. 기왕 이렇게 찾아와 주셨으니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이 엘프가 시선을 계속 휴마누스에게 둔 채로 말했다.
[성검의 주인]에서는 세계수의 상태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없었기에, 끝까지 숨기려는 줄 알았다.하지만 하이 엘프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얘기할 생각이 있긴 했나 보다.
그런데도 [성검의 주인]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던 건, 아르케 왕국의 내부 사정이 그만큼 어지러웠기 때문이겠지.
즉,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걸 테다.
“하지만 그 전에. 신의 사자께서 아르케 왕국에 찾아오시게 된, ‘다른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드디어 하이 엘프가 휴마누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며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의 얼굴을 봐서 일단 믿고 넘어가긴 했지만, 세계수의 상태는 자칫하면 아르케 왕국 전역을 혼란에 빠트릴지도 모를 중대사다.
그러니만큼 세계수에 관한 얘기를 하기 전에 내 정체에 확신을 얻고 싶은 거겠지.
‘결국 이 얘기를 또 해야 하는구나···.’
내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니 이번에는 세르펜스에게 떠넘길 수도 없다.
나는 [성검의 주인] 속 닼숭이의 행보를 설명했고, 내 말이 이어질수록 하이 엘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악마와 계약한 다크 엘프라니···.”
“어쩌면 그자가 세계수에 위해를 끼치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아무나 세계수 주위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신경 써 주세요. 제 얘기보다 엘프들을 더 믿고 싶은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마는 조심해서 나쁠 건 없잖아요?”
“그러지 않아도 세계수 님의 힘이 약화된 이후에는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전에는 주의를 안 하셨구나···.”
떠오른 감상을 그대로 입에 담은 것이 화근이었던 걸까?
한없이 정중하기만 했던 하이 엘프의 표정이 조금 무너져내렸다.
“으흠! 이전보다 방비를 강화했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이 엘프가 작게 헛기침하며 말했다.
1회차에서 세계수가 화를 입은 걸 떠올려보면, 신용이 하나도 없는 말이다.
대체 누가 엘프에게 ‘진실의 종족’ 같은 별칭을 붙여준 걸까? 이렇게나 거짓말을 잘하는데.
“그건 됐고, 세계수의 상태에 관해서나 설명해 주세요.”
내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는 걸 눈치챘는지, 하이 엘프가 무안하다는 표정으로 두어 번 헛기침을 반복했다.
그렇게 헛기침과 함께 무안함을 날려버린 하이 엘프가 다시 정중한 태도로 입을 뗐다.
“세계수 님께 이상이 생긴 건, 재작년 4월 마지막 날이었습니다.”
딱 내가 시온의 몸에 빙의한 날이다.
프라시더스 공작저로 첫 출근을 하기 전날이자, 난장판이 되었던 세상이 다시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그날은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긴 것인지···. 저를 포함하여, 사도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건, 각 종족의 사도들도 느끼지 못하는 변화인가 보다.
나는 그날이 여느 때와 같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괜히 아는 척하느라 대화를 복잡하게 꼬고 싶지 않아서 침묵을 택했다.
“그렇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세계수 님께서는 새로운 성검의 주인이 성장하여 자신을 치료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상태를 비밀로 하라는 말을 단말마의 비명처럼 남기시고는 그대로 깊은 잠에 빠지셨습니다.”
하이 엘프가 실의에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있어 정신적인 지주이자, 정령을 다루는 힘의 근원이 되는 존재다.
그리고 하이 엘프는 세계수가 만들어낸 열매에서 태어난다고 했으니. 그들에게 세계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그런 소중한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내 병환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마라.’ 하고 비장하게 말하며 픽 하고 쓰러져버린 것이다.
얼마나 충격적이고 가슴 아픈 일이란 말인가.
눈앞의 하이 엘프가 가엽게 느껴졌다.
“현재 세계수 님께서는 존명(存命)에 필요한 힘까지 끌어다가, 이 아르케 숲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에 쏟아붓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조금씩 조금씩···. 약해지고 계십니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힘까지 끌어다 쓰는 게 고작 약해지는 수준일 리가 없다.
그건 죽어가는 것이었고, 하이 엘프는 차마 그 말을 있는 그대로 입에 담지 못했다.
‘세계수가 오늘내일하는데, 아무도 눈치 못 챈 이유가 바로 이래서였구나!’
인성 나무 어쩌고 하며 욕한 게 미안해질 지경이다.
“그래도 치료하는 게 가능하긴 하다는 거죠?”
유지스가 조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치료 능력으로만 따지자면 휴마누스와는 비교도 안 되게 유능한 자들이 쌔고 쌨다.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세르펜스와 리에나만 봐도 그러했다.
그런데도 세계수가 자신의 치료를 ‘성검의 주인이 성장한 후’로 미뤘다는 건.
‘볼타 산맥에 결계를 펼쳤을 때처럼, 성검의 힘이 필요하다는 거겠지.’
하이 엘프는 유지스의 말에 목소리를 내어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현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검집에 꽂힌 성검의 손잡이를 꽉 움켜쥔 채, 긴장된 얼굴로 이를 악다물고 있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혹시 몰라서 결계와 치유 방면으로도 수련을 하고 있긴 합니다만···.”
하이 엘프의 질문에 휴마누스가 자신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세르펜스를 힐끔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그에 따라 하이 엘프의 시선도 세르펜스를 향했고, 그제야 휴마누스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으로 보아, 일부러 세르펜스를 쳐다봤다기보다는 반사적. 혹은 본능적으로 그랬던 것 같다.
만약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볼타 산맥에서 그러했듯이, 세르펜스의 도움을 받으면 해결될 문제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 테다.
“으음···.”
세르펜스가 침음을 흘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휴마누스도 슬금슬금 눈동자를 굴려 나를 쳐다보았고, 하이 엘프의 시선 또한 휴마누스와 세르펜스를 거쳐 내게 도달했다.
“혹시 신의 사자께서는 대단한 치유 능력을 갖추고 계신 건가요?”
“그런 능력은 없긴 한데···.”
“그렇지만, 무언가 방법이 있긴 하군요.”
내가 말끝을 흐리며 볼을 긁적이자, 하이 엘프가 은색 눈동자를 일렁이며 말했다.
참 눈치가 좋다.
그 눈치의 반만 똑 떼어다가, 휴마누스에게 넘겨주고 싶을 정도로.
“상태가 많이 심각해요?”
“네!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 마지막 잎새가 질지 몰라요.”
조금 전만 해도 죽는다는 말을 꺼내기가 두려워, 약화된다는 말로 에둘러 표현했던 주제에.
하이 엘프는 다가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불길한 소리를 잘도 해댔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소심한 얼굴을 한 세르펜스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시선은 나를 향한 채다.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벌써 알 것 같다.
‘당장 세계수를 치유해야 할 이유를 늘어놓으며, 나를 설득할 생각이겠지.’
유지스의 고향인 이곳 아르케 왕국의 평화가 지켜질 수 있도록 말이다.
볼타 산맥에 결계를 펼친 후. 그리고 성검펜스가 왔다 간 후.
녀석이 악몽을 통해 지난 회차를 경험하며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를 떠올리면, ‘안돼, 다물어.’ 소리가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세계수가 내일 당장 죽어버리기라도 한다면···.’
닼숭이가 이간질할 것도 없이, 아르케 왕국은 1회차의 전철을 밟게 될 거다.
녀석이 꾼 악몽이 일부나마 현실이 되어버리는 거다.
눈 뜨면 사라지는 악몽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고통이 녀석을 괴롭힐 테다. 당연히 유지스도 힘들어하겠지.
그리고 아르케 왕국의 엘프들도, 이곳의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드워프들도, 낯선 이국의 땅에서 이종족과 새로운 가정을 이룬 인간들도.
“됐어요, 무슨 말 하려는지 아니까. 하지만 ‘그 방법’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입니다. 최선은 따로 있는 거 아시죠?”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휴마누스를 노려보듯 쳐다봤다.
휴마누스가 굳은 표정으로 최선을 다해보겠노라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