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1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0화(620/1105)
620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9)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귀를 통해 들려오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다.
그 생소한 느낌에 이질감이 느껴질 법도 하건만.
목소리는 퍽 온후하고도 다정하여, 낯설기는커녕 친근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고작 목소리 하나에 마음을 열 정도로 나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저희 셋만 따로 보자고 했다면서요?”
{그대가 신의 사자로군요.}
세계수는 목소리에 나를 향한 호기심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동문서답을 했다.
자신과 대화를 하고 싶으면 먼저 자기소개라도 하라는 건가?
“아, 예. 시온 리벨론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온.}
세계수가 가지를 흔들며 인사했다. 반가움의 표현인가 보다.
풍성하게 자라난 나뭇잎들이 서로 쓸리고 부딪혔다. 쏴아아, 파도를 연상케 하는 시원한 소리가 귓가로 밀려들었다.
나도 가만있기 뭐해서 세계수를 향해 팔을 크게 흔들어 주었다.
{저는 이분들과 긴히 나눌 얘기가 있으니, 미카엘은 잠시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네, 그럼 저는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화가 끝나갈 때쯤에 불러주세요.”
미카엘이 세계수를 향해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보인 뒤 빼곡한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세계수와 하이 엘프들은 떨어져 있어도,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단이 있는가 보다.
“그런데 저희 앞에서 미카엘 님의 세례명을 막 불러도 되는 겁니까?”
{저의 뿌리가 닿는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은 전부 알고 있답니다.}
세계수의 답변을 듣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는 ‘사생활 침해’다.
문득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넓게 퍼져있는지 궁금해졌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카엘은 숫기가 없을 뿐이지, 매정한 아이가 아니랍니다.}
아니나 다를까. 세계수는 미카엘도 모르는 ‘매하엘’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얘기를 꺼낸 그 저의가 궁금하다.
앞으로는 언제 어디서든 입조심하고 살라는 경고?
과연 도청이 취미이자 특기인 자답게 음험하기 짝이 없다.
{그저 그 아이에 대해 무언가 오해하고 계신 듯하여 말씀드렸을 뿐인데, 어째서 그런 표정으로 저를 노려보시는 것인지···.}
세계수가 얼떨떨하다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순진한 척한다고 해서, 내가 속아 넘어갈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라 말해주고 싶다.
상대는 하이 엘프들에게 이름도 지어주지 않은 몰인정한 존재다.
그런 주제에 미카엘이 오해를 산 것이 걱정된다?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얘는 대체 왜 세계수를 상대로 적의를 풀풀 날리고 있는 거야?”
“으음···. 이제까지 제가 지켜본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보아, 세계수 님께서 하이 엘프들에게 따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닐까 합니다.”
휴마누스의 물음에 세르펜스가 진지하게 고심하여 답을 내놓았다.
엇나갈 때는 대차게 엇나가더니. 오늘은 무서우리만치 정확하게 맞췄다.
“에이, 설마 그런 이유겠어?”
그리고 휴마누스의 눈치는 오늘도 부재중이었다.
{아무리 신께서 내리신 영광된 이름이라 할지라도, 불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요.}
긴 투병 생활에도 불구하고 세계수의 눈치는 건재했다.
세르펜스의 말이 정답이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변호를 시작한 것이다.
분하게도 내가 세르펜스의 세례명을 처음 들었을 때, 녀석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골자의 얘기였다.
{사도들에게 세례명은 유일한 이름이기에 서로 그것을 교환하고, 불러줍니다. 하여 타인의 입을 통해 세례명으로 불릴 때마다 신의 관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을지니. 그렇기에 제가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내려주는 건, 그들에게서 신의 사랑을 느낄 기회를 빼앗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비슷하다는 말을 전적으로 취소한다. 아무래도 세계수는 룩스메아의 열렬한 광신도였나 보다.
하긴 그러니까 용사의 무구 보관처 같은 역할을 자처하고 있는 걸 테지.
“그렇다는데, 브라이트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왜 갑자기 내 세례명을 부르는 거야?!”
“세르펜스는 아직 휴마누스에게 세례명을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래서 세례명으로 불리는 기분이 어때요?”
“······.”
휴마누스는 입을 꾹 다문 채, 표정으로 ‘구려.’라는 뜻을 전했다.
세례명을 통해 신의 관심과 애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세계수 혼자만의 의견일 뿐. 어떠한 근거도 없는 얘기라는 진실이 밝혀진 순간이다.
{흠, 흠!}
성대도 없는 주제에, 세계수가 목청을 가다듬는 소리를 흉내 냈다. 알 없는 안경의 렌즈를 닦는 것만큼이나 허무맹랑한 행동이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세계수는 우리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우선 두 성검의 주인께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성검의 주인. 그 앞에 ‘두’라는 말이 붙었다.
세계수 또한 이전 회차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예상은 했다. 그렇지만 아예 세르펜스와 휴마누스를 한데 묶어 성검의 주인이라 칭할 줄은 몰랐는데.
{미카엘에게 설명은 들었습니다. 저를 치유해 주셨다고요.}
이어진 말에 휴마누스가 무안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땅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혼자의 힘으로는 부족하여 세르펜스의 힘을 빌리게 되었으니. 세계수에게 감사 인사를 받기 껄끄러웠나 보다.
{새로운 성검의 주인이여. 그대가 세 번째 시련을 받기 위하여 저를 만나러 왔을 때, 제 상태를 숨기고 다음을 기약한 것은 그대의 능력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개를 드세요.}
기운 없는 휴마누스를 향해, 세계수가 위로하는 투로 말했다.
그 누구도 세계수에게 휴마누스의 능력을 의심한 거냐는 질문을 한 적이 없건만. 지레 찔리는 마음에 냅다 변명부터 갈긴 건 아닐지 몹시 의심스럽다.
‘세계수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라도 알면, 눈치껏 그 의중을 넘겨짚기라도 할 텐데···.’
애석하게도 나는 식물의 표정을 분간하기는커녕, 물을 줘야 할 타이밍도 알아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 전에 나무에게도 표정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제가 염려한 것은 그대가 아닌 성검의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세계수는 성검이 고장 났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성검에게는 저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할 만큼 뚜렷한 자아는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검의 주인이 느끼는 감정과 주위를 둘러싼 환경. 그리고 그에게로 쏟아지는 선의와 악의. 그 모든 것을 성검의 주인과 함께 느낍니다.}
“그 말씀은···, 저 때문에 성검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입니까? 휴마누스가 성검의 힘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는 것도 그래서인 겁니까?”
세르펜스가 불안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나와 휴마누스는 성검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세르펜스에게는 비밀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둘은 짜 맞추기라도 한 듯이 침묵하며 표정 관리에 힘썼다.
다행스럽게도 세르펜스의 신경은 온통 세계수에 쏠려있었고, 덕분에 우리는 이 비밀을 끝까지 묻어둘 수 있었다.
{자신이 본래 성검의 주인으로 선택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군요.}
세계수는 평온한 말투로 녀석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가늠하듯 말했다.
그에 세르펜스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체했다.
{괴로움이란 감정은 외부와의 작용이 만들어낸 산물일지니. 그대가 괴로움을 느낀 것이 어찌 그대의 탓이겠습니까.}
행여나 세계수가 인성질을 하면 어쩌나 경계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조금 더 지켜봐도 될 것 같다. 성검에 관해 중요한 얘기를 할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아무리 중요한 얘기라 할지라도, 헛소리를 지껄일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바로 끼어들겠지만 말이다.
“으음···. 그렇다면 성검의 상태를 호전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계십니까?”
세르펜스는 세계수의 말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머뭇거리다가 화제를 아예 바꿔버렸다.
{본래대로라면 성검은 내부적으로든 외부적으로든 손상이 생긴다고 하더라도, 주인과 함께하며 안정을 되찾고 점차 회복되기 마련인데···. 그대가 새로운 성검의 주인과 힘을 합쳐 저를 치료했다는 것으로 보아, 성검은 아직도 새로운 주인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저런 십···!”
휴마누스를 성검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니.
그 말을 듣고 나자 욱하는 마음이 밀려들어, 하마터면 ‘시발검’이란 단어를 입에 올릴 뻔했다.
세르펜스가 급히 내 입을 틀어막지 않았더라면 ‘그럴 뻔했다.’ 정도로는 끝나지 않았으리라.
아니, 지금도 시발검을 향해 욕을 퍼붓고 싶은 심정이다.
어차피 입이 막혀있겠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참지 말고 시원하게 쏟아내기로 했다.
“스으븝! 으븝, 그르큽 으브븝! 즈으븝 으브브븝 으븝! 스브읍!!”
“시온, 진정하십시오.”
발광하는 나를 말리는 세르펜스를 멍하니 지켜보던 휴마누스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와 세르펜스를 철저히 외면하며, 세계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보다···. 세계수께서는 성검이 저를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저는 이제껏 시간 대부분을 가사 상태로 보냈습니다. 실질적으로 깨어있던 건 일순에 불과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성검이 그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까닭 역시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세계수의 말에 휴마누스가 실망한 내색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며, 성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실망하지 마시지요. 그렇다고 해서 아는 방법 또한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으니.}
성검을 욕하며 세르펜스에게 붙잡혀있는 와중에도, 세계수의 말은 머릿속을 울리며 제 의지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나는 날뛰던 걸 멈추고 세계수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내가 얌전해진 것을 확인한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나를 놓아주었다.
{세계의 나무인 저와 영겁의 화로, 무궁의 심해. 그리고 신성의 검에는 신 룩스메아님의 영혼 조각이 담겨 있습니다.}
세계수에 룩스메아의 영혼 조각이 있다는 건 새로이 알게 된 사실이나, 크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주렁주렁 자라난 열매에서 신성력을 지닌 하이 엘프가 태어나는데, 그 신성력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렇기에 나는 다른 문제에 집중했다.
룩스메아의 영혼 조각이라는 단서까지 붙은 이상, ‘신성의 검’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료했다.
앞서 나열된 세 가지의 상징에 비해, 마지막에 덧붙여진 하나가 심각하게 보잘것없다고 느껴지는 건 오직 나뿐인가?
‘마왕을 처치할 수 있는 힘을 지니긴 했지만, 그래봤자 시발검이잖아!’
세르펜스의 손은 이미 내 입에서 떨어져 나간 지 오래였으니.
나는 그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켜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접촉을 통해 성검이 경험한 모든 것을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검이 새로운 주인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유도 함께 말이지요.}
세계수의 말에 휴마누스가 멈칫하며 세르펜스와 나를 쳐다보았다.
정황상 세계수가 타락펜스의 존재를 모르는 게 확실한데, 이대로 성검을 건네줘도 괜찮냐는 뜻일 테다.
모처럼 휴마누스가 눈치 있는 행동을 했다.
“1회차의 기억을 일부나마 본 사람으로서, 그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
나와 세르펜스가 망설이고 있자 휴마누스가 먼저 입을 뗐다.
듣고 보니 그럴듯한 정도를 넘어, 백번 옳은 소리다.
하지만 세르펜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내 등 뒤로 숨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