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2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3화(623/1105)
623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2)
‘친구를 살리기 위해 성검의 주인이 되었다는 기억이, 그때의 간절했던 다짐이···. 그 친구를 포기하고 숨통을 끊어 놓은 후에야 떠오르다니···?’
룩스메아의 멱살을 잡고 미친 거 아니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니, 기실 미친 것은 휴마누스였겠지.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정히 한 명을 온전한 성검의 주인으로 삼아야 한다면, 세르펜스가 되어야 한다는 세계수의 말이 이제서야 비로소. 완전하게 이해되었다.
세계수가 그런 말을 한 것은 2회차 마지막의 휴마누스보다, 성검펜스와 마왕펜스가 뒤섞인 쪽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할 거라고 판단하여···.
‘양호? 그게 양호라고? 장난하냐? 어?! 차라리 진짜 장난이었으면 좋겠네!!’
세계수는 이를 두고 비극이라 말했지만, 비극이라는 말조차 부족한 최악의 결말이었다.
나는 휴마누스의 표정을 살폈다.
1회차 황제누스의 기억을 막 보고 온 참이었으니. 그 상황에 더 이입이 잘 되었는지, 당혹을 넘어선 혼란이 얼굴 가득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택하겠다면, 제가 한 가지 조언해 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 행여라도 무모하게 다른 회차의 기억을 엿보는 건 삼가시길 바랍니다.}
세계수가 휴마누스를 몹시 가여워하며 말했다.
그의 선택을 지지한다기보다는 젊은 치기로 사고라도 칠까 봐, 걱정하는 듯한 어조다.
휴마누스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침묵했다.
그러고도 생각 정리가 잘 안 됐는지, 여전히 혼란스럽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조언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조언을 듣고 나서 판단하라는 뜻에서 드린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그러한 결정을 내렸을 때, 행동으로 옮기기 전에 찾아와 달라는 뜻이었지요.}
“지금은 악마 숭배자들이 잠잠하지만, 성검의 힘이 간절히 필요해지는 날이 오게 된다면. 그때는 이곳에 들를 여유 같은 건 없을 겁니다.”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결정을 내려서 좋을 건 없습니다. 각오 없는 결정은 후회를 낳고, 후회는 그대를 나약하게 만들 것이며, 나약한 자아는 다른 회차의 기억에 잠식될 뿐입니다.}
휴마누스의 의견과 세계수의 의견. 양측 모두 옳았다.
그래서 나는 둘 다 용인할 수 있을 만한 중재안을 꺼냈다.
“그러지 말고 오늘은 머리를 비우고 푹 쉰 뒤에, 내일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때요? 지금 휴마누스는 너무 조급해 보입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러고 보니 휴마누스와 세르펜스, 두 분은 대련을 약속하셨다지요? 마침 이 주변의 터가 넓기도 하고 남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우니, 내일 낮에 다시 찾아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세계수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가 미카엘의 집에서 방음 스크롤을 사용한 채로 나눈 대화를 언급했다.
아무래도 세계수는 나무인지라 사생활을 존중해 준다는 개념 자체가 희박한 모양이다.
그렇지만 대련 장소를 제공해 준다는 건 반길만한 얘기였다.
휴마누스도 세계수의 제안에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는지,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나는 한 가지 일정을 더 추가해 보기로 했다.
“다른 동료들을 데려와도 괜찮아요?”
{민감한 얘기는 끝났으니 괜찮겠지요.}
“음식물 반입은요?”
{네? 뭐어···, 취식 후 깨끗이 치우고 가 주신다면야···?}
내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이것저것 질문하자 세계수가 흔쾌히···는 아니고, 조금 얼떨떨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튼 세계수의 허락도 받았겠다, 내일은 다 같이 세계수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대련 구경을 해야겠다.
그러려면 도시락을 싸야 할 텐데, 유지스를 통해 아르케 왕실 주방장에게 부탁해 봐야겠다.
‘하지만 그 전에···.’
나는 피크닉 계획을 잠시 뒤로 미루고, 세계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민감한 얘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미뤄둔 것을 확인해야 한다.
“그건 그렇고, 룩스메아의 상태는 좀 괜찮아요?”
{그간 모아온 힘을 전부 소진한 탓에 회복에 집중하고 계신 듯합니다.}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미루어 보아, 룩스메아의 영혼 조각을 지닌 세계수조차도 룩스메아와 연락이 안 되는가 보다.
예상했던 일이다.
세계수가 룩스메아와 소통이 가능했다면 기운을 되찾자마자 연락을 취했으리라.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으로, 시온의 육체를 빌려 쓰고 있다는 얘기도 당연히 들었겠지.
그러나 세계수는 내가 ‘시온 리벨론’이라고 자기소개했을 때, 순순히 ‘시온’이라 불렀다.
‘그게 내 본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면 계속 신의 사자라 부르다가, 미카엘이 자리를 비운 후 본명을 물어봤겠지.’
뭐, 여기까지는 확대 해석이라 치더라도.
세계수는 성검을 통해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영혼이라는 정보를 얻었다고 말했다.
“그래도 회복 중이라니 다행이네요. 세계수처럼 죽어가는 중이었으면 어쩌나 했는데···.”
{이 땅에 신성력을 지닌 이들이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들이 룩스메아 님의 존재를 믿는 한. 그분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이제 정말 물어볼 만한 건 다 물어봤다.
슬슬 해도 기울어지고 있었으니 이제 돌아갈 시간이다. 가서 저녁 먹어야지.
세계수는 미카엘을 부르겠다고 말했고, 나는 그러라고 답했다.
{선우, 그대가 ‘닼숭이’라 부르는 그 다크 엘프에 관해서 드릴 말이 있습니다.}
미카엘을 기다리는 막간을 이용하여 세계수가 닼숭이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그러고 보니 세계수에게 조언을 듣고 엘프 왕에게 얘기해 주기로 했었는데, 성검과 관련하여 이래저래 충격적인 일이 많아서 그만 깜박하고 말았다.
{약 이백 년 전, 인간들에게 납치당했던 아이입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울고 있었습니다. 물길에 독을 풀고, 제게 불을 붙이며···. 그때를 상기하니 마음이 무겁군요.}
악숭이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지만, 어쨌거나 닼숭이는 세계수를 해친 존재다.
그런데도 세계수는 길길이 날뛰며 분노하는 대신에 착잡하다는 듯 말했다.
“혹시 그자의 가족들이 있는 곳을 알고 계십니까?”
세르펜스가 살짝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인간에게 이백 년이면 세대교체가 몇 번이고 일어나고도 남는 아주 기나긴 세월이다. 하지만 엘프들에게는 그렇지 않으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한 질문일 테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돌아온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들은 그 아이를 찾으러 인간들의 나라로 향했다가, 그대로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으음···. 그렇다면 이름을 비롯한 기타 인적 사항에 관한 것이라도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도움이 될만한 정보는 없군요. 이름은 알고 있긴 하지만···. 그 아이의 이름이 일족의 배신자로 알려지길 원치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도움을 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번에는 모쪼록 무탈하시길 바랍니다.”
{네. 세르펜스도 이번에는 꼭 행복하시길 바라요.}
어차피 내일 또 볼 텐데도 세계수와 세르펜스는 작별 인사 비슷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잠시 후 미카엘과 일행들이 도착했고, 우리는 빽빽한 나무숲을 벗어나 아르케 왕성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식사를 마치고 방에 다다라 문고리를 막 돌리려는 찰나. 세르펜스가 나를 불러 세웠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지, 다른 일행들도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멈춰 서서 우리 쪽을 쳐다봤다.
“다녀올 곳이 있으니, 옆방에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어디 가려고요?”
“저는 당신이 제 세례명을 불러주는 게 좋습니다. 세계수 님께서 말한 신의 사랑과 관심은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저를 얼마나 아끼는지 느껴져서···.”
세르펜스가 조곤조곤 말했다. 어디 가느냐는 질문에 나올 법한 대답이 아니다.
하지만 세르펜스어 해석기를 돌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는 곳과 방문 목적은 물론이거니와 그 이유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혼자 가도 되겠어요?”
“으음···. 같이 가시겠습니까?”
“아뇨, 됐어요. 눈치 보이게 제가 거기에 왜 낍니까? 가 봤자 괜히 밉보이기나 하지.”
“그럴 리는 없습니다.”
“됐고,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빨리 다녀오기나 하세요.”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녀석은 그렇게 말한 뒤 긴 다리에 걸맞게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모퉁이 너머로 모습을 감췄다.
나는 잡고 있던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윈스톤이 반쯤 열다 만 옆방 문을 마저 밀어, 활짝 열었다.
“그런 이유로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잠깐, 잠깐! 방금 그게 대체 무슨 얘기야? 대화가 안 이어지잖아! 그래서 세르펜스는 어디 간다는 건데?”
“설마 이해 못했···. 아, 휴마누스는 휴마누스였죠?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힘내세요.”
“지금 나만 이해 못 한 거 아니거든? 알아들은 사람은 너 빼고 아무도 없을걸? 너희는 대화를 너무 생략해.”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음에도, 휴마누스가 불만스럽다는 표정으로 툴툴거렸다.
지극히 주관적인 의견이다.
“과연 그럴까요? 푸로르는 이해하셨을 텐데요?”
“그러니까···. 유지스에게 세례명을 알려 주고 오겠다는 얘기였지, 아마?”
“맞습니다, 정확해요!”
역시나 푸로르는 날 배신하지 않았다.
나는 짝짝짝 박수 치며 어떠냐는 눈으로 휴마누스를 쳐다보았다.
휴마누스는 결과에 승복하지 못하고, 나를 삿대질하며 푸로르에게 항의했다.
“쟤는 그렇다 치고, 푸로르는 대체 어떻게 알아들은 거야?”
“세례명 얘기가 나왔고, 여기에 없는 일행은 유지스 뿐이잖아? 그래서 느낌이 빡! 왔지.”
느낌이 빡! 오는 그 육감이 휴마누스에게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푸로르가 휴마누스와 함께해 줘서 정말 너무너무 고맙다.
하지만 휴마누스는 그 사실에 감사하기는커녕, 어떻게 그런 거로 아냐며 분통을 터트리기에 바빴다.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은 많고 많으니. 개중에는 눈치가 빠른 사람, 눈치가 느린 사람, 눈치가 휴마누스인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원통해 하지 말아요.”
“차라리 평소처럼 깐족거리며 타박을 해! 따뜻하고 다정한 말투로 그딴 소리를 하는 게 더 기분 나빠!”
“안 됩니다. 오늘 하루는 휴마누스에게 다정하게 대해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말투만 다정하다고 다가 아니잖아!”
사실 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차였다.
휴마누스 본인도 저렇게 치를 떨며 싫어하니, 이제 그만 해야겠다.
“자, 자. 복도에서 이러고 있지 말고, 이제 들어가서 쉽시다. 그럼 다들 내일 봐요!”
나는 에드나와 아니마, 푸로르, 리에나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들어 인사한 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윈스톤이 곧장 따라 들어왔고, 약간의 텀을 두고 휴마누스가 밍기밍기적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빨리 눈치를 키워서, 보란 듯이 널 비웃어주고 싶어.”
“화이팅!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그거 하지 말라니까?”
이번에는 진짜 온 마음을 담아서 진지하게 한 말이었건만.
눈치 없는 휴마누스는 이런 내 진심을 알아봐 주지 못하고 화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