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2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4화(624/1105)
624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3)
나는 툴툴대는 휴마누스에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해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이 주제로 얘기가 길어지면 의도치 않게 그를 또 놀려버릴지도 모르니까.
게다가 휴마누스는 삐지더라도 금방 풀어지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 봤을 때, 침묵이 답이다.
내가 조용히 의자에 앉자, 휴마누스도 테이블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고는 오늘도 수련을 위해 날개를 꺼내놓으며 질문했다.
“그런데 말이야, 세르펜스가 유지스에게 세례명을 알려주러 갔다는 건 확실한 거지?”
“설마 제 세르펜스어 해석 능력을 못 믿으시겠다는 겁니까?”
“그냥 확인차 질문한 거야. 아무튼 확실하다면 됐어.”
언제 삐졌냐는 듯 휴마누스가 쾌활하게 대답했다.
세계수와 나눴던 대화 때문에 우중충한 얼굴로 고민에 빠져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그는 괜찮다 못해, 좋은 일이라도 생긴 듯 보였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그야, 유지스 다음에는 내 차례일 거 아니야?”
휴마누스가 시원하게 김칫국을 마셨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째서 유지스 다음이 본인의 차례라고 생각하는 거냐고 묻는 것이 먼저일까?
아니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쳤기에, 세르펜스가 세례명을 알려줄 거라 확신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는 게 우선일까?
‘그래도 황제누스 건을 생각해 보면, 세례명을 알려주지 못할 것도 없나?’
나는 휴마누스의 자신감을 반만 인정해 주기로 했다.
“세르펜스가 언젠가는 휴마누스에게 세례명을 얘기해 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유지스 바로 다음일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 말고 세르펜스에게 세례명을 들을 사람이 또 누가 있는데?”
“저기 있잖아요.”
나는 방구석에서 갑옷 손질을 시작한 윈스톤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공작저로 돌아가면 저번에 주문한 드워프제 갑옷이 도착해 있을 텐데. 참 부지런하기도 하다.
“주군께서 제게 세례명을···?”
윈스톤이 손을 멈추고 어리둥절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세르펜스가 자신에게 세례명을 알려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다는 듯, 그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멋대로 김칫국을 들이켠 휴마누스와는 대조적인 반응이다.
“윈스톤 경, 세르펜스랑 친해? 나보다?”
“···잘 모르겠습니다.”
휴마누스가 윈스톤에게 세르펜스와의 친분을 검증하려 들었고, 윈스톤은 그에 난색을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세르펜스가 휴마누스에게 느끼는 친근함이 어느 정도인지, 그걸 윈스톤이 어떻게 알겠는가?
더군다나 휴마누스는 자신이 세르펜스에게 세례명을 들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니.
윈스톤은 곰곰이 고민하다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선우 선배, 혹시 주···. 아, 아니···. 세르펜스 님께 뭔가 들은 거라도 있소?”
윈스톤이 세르펜스의 호칭을 한 번 정정한 끝에 무사히 의문문을 완성해냈다.
다른 세상의 언어인 내 이름은 자연스럽게 말하면서, 주군인 세르펜스의 이름을 막 입에 담는 건 영 어색한 모양이다.
속으로 세르펜스를 떠올릴 때마다 ‘주군’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사람은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머릿속에서 자주 떠올리는 단어를 무심결에 내뱉기 쉬우니까.
“세례명 관련은 아니지만, 전혀 없지는 않죠. 어제 윈스톤이 세르펜스에게 기사 서약을 다시 했다면서요? 세르펜스가 들떠서 재잘재잘 얘기하는데, 엄청 기뻐 보이더라고요.”
“그렇···소?”
반문하는 윈스톤의 얼굴에 미미하게나마 화색이 돌았다.
그러고는 솔깃한 티를 너무 냈다고 생각했는지, ‘으흠!’ 헛기침하며 점잔을 뺐다.
무뚝뚝한 표정을 늘상 유지하는 기사님이 저럴 정도면 어지간히도 기뻤나 보다.
“그렇고말고요!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기뻐 보이던지! 자세한 사정을 듣기 전에는 윈스톤이 얼마나 재밌게 놀아줬길래 저러나 싶었다니까요?”
“···어째서 갑자기 실망한 표정을 짓는 거요?”
당시의 기억과 함께 그때 느꼈던 감정도 떠올려 버린 탓일까?
윈스톤이 내 표정을 지적했다.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기로 했다. 실망한 이유에 관해 설명하자면 얘기가 길어지기도 하거니와, 착각을 했다는 게 조금 민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세르펜스는 윈스톤과 친해졌다고 생각해서 엄청나게 기뻐했는데, 윈스톤이 호칭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면 얼마나 슬퍼하겠어요? 그러니까 어서 세르펜스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에 익숙해지세요.”
“맞아! 그거 진짜 서운해.”
내 말에 휴마누스가 격렬하게 동의를 표했다.
세르펜스 전문가인 내 의견과 휴마누스의 경험담이 더해지자, 설득력이 곱절로 증가했다.
“더 노력해 보겠소.”
윈스톤이 비장한 표정으로 결의를 다졌다.
매사에 진지한 성격인 까닭일까?
종종 느끼는 거지만, 이 기사님은 가끔 굉장히 이상한 부분에서 과도하게 진지해지는 것 같다.
“그나저나 어제 방에 들어갔을 때, 세르펜스가 윈스톤을 일으켜 주고 있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거였구나? 사적으로 다시 한번 충성을 맹세하다니···.”
휴마누스가 끄응 소리를 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게 조잘거리며 윈스톤과 있었던 일을 떠벌린 세르펜스와는 다르게, 윈스톤은 휴마누스에게 아무 설명도 안 해줬나 보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즈음.
돌연 휴마누스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네가 내 세례명만 떠들고 다니지 않았어도, 내가 먼저 세르펜스에게 세례명을 알려주며 신뢰를 다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진작 세례명을 깠으면 좋았잖아요? 지난 십여 년간 뭐 하다가, 이제 와서 저한테 시비세요?”
“나도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거절당했단 말이야!”
“아, 이미 시도하셨구나···.”
나는 휴마누스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심지어는 윈스톤도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우리에게 동정을 받자 설움이 더욱 복받쳤는지, 휴마누스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세례명을 받자마자 바로 교환하자고 얘기를 꺼냈는데, 레니에는 어째서인가 화를 내질 않나. 세르펜스는 그런 건 진짜 친한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말하질 않나···.”
휴마누스가 하소연하는 투로 멍청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자신의 제안이 거절당한 이유를 아직도 모르는 눈치다.
해맑게 웃으며 ‘너희도 세례명 받았지? 교환하자!’라고 말하는 어린 휴마누스의 모습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세례명을 가볍게 생각하는 나라도 이건 아니올시다 싶다.
그의 약혼녀인 레니에는 무드라고는 하나도 없는 휴마누스의 행동에 진저리 쳤을 테다.
그리고 세르펜스는 휴마누스의 장난스러운 태도에서 진심을 느끼지 못했겠지.
“하지만 그때의 휴마누스는 열 살이었죠? 그럼 어쩔 수 없죠. 이해할게요. 열 살이면 그럴 수도 있죠.”
“나는 그때도 그 두 사람을 소중히 여겼고, 커서도 그럴 자신이 있었어!”
“그걸 상대방이 느끼지 못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나는 반박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해 보라는 표정으로 턱 끝을 들어 올렸고, 휴마누스는 조용히 침묵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 완승이다.
시시하게 갈린 승패에 흥미를 잃었는지, 윈스톤이 다시 갑옷 손질을 시작했다.
금속 부분뿐만이 아니라, 갑옷을 몸에 고정할 때 쓰이는 가죽끈 부분도 전용 크림으로 꼼꼼하게 닦아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세르펜스가 조금 늦네?’
세르펜스의 걸음 속도를 생각해 봤을 때, 세례명만 알려주고 오는 거라면 진작 돌아오고도 남았을 시간이다.
작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그냥 나눌 얘기가 많아서 그런가 보다 하기로 했다.
‘금방 올 줄 알고 휴마누스와 잡담하고 있었는데···.’
사실 오늘 저녁 시간은 세르펜스 육아 일기를 쓰며 보낼 요량이었다.
어제는 내 성장 스토리를 적느라 빼먹은 탓에, 오늘을 포함하여 이틀 치를 한꺼번에 적어야 했으니까. 더는 미룰 수 없다.
친구네 집에 처음 놀러 온 것과 윈스톤에게 서약을 다시 받은 것. 그리고 오늘 유지스에게 세례명을 알려주러 간 것까지···.
어느 것 하나 가벼이 넘길 수 없다. 내가 느낀 감동을 잊기 전에 빨리 기록으로 남겨야만 한다.
하지만 휴마누스와 윈스톤 방에 떠넘겨진 지금, 그 계획이 틀어져 버렸다.
공책을 꺼내자마자 휴마누스가 훔쳐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도 윈스톤을 본받아 세니어 손질이나 하고 있을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생각을 떠올린 즉시 실행에 옮겼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세니어 손질용 기름과 천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것들은 무려 내가 인정한 최고의 드워프 장인. 크레아토가 사용하는 드워프제 물건이다.
나처럼 무기를 다루는 데 서툰 사람이 직접 손질을 할 거라면, 장비라도 좋아야 한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제 인생의 걸작을 소중히 다뤄 달라며 내게 떠넘기듯 선물해 주었다.
공국의 배신이 적힌 편지 때문에 부랴부랴 떠나느라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했다.
나중에 시간 여유가 되면 세르펜스의 얼굴이라도 비추러 가야겠다.
“다들 무구를 손질하는 분위기네···.”
휴마누스가 나와 윈스톤을 번갈아 보며 혼잣말했다.
성검은 물론이고, 그가 쓰는 갑옷과 방패 또한 용사의 무구가 되었기에 손질할 필요가 없었다.
표면에 묻은 먼지나 이물질을 닦아주는 것만으로도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니. 정말 유용한 기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소외감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참. 오늘 세계수와 나눴던 대화는 일지에 쓰면 안 되겠지?”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하십니까?”
“응, 안 될 것 같았어.”
휴마누스가 공연한 소리를 꺼냈다가 내게 면박을 들었다.
조금 전, 다정하게 대해줄 바에야 타박해 달라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설마’로 시작되는 문장을 지워내기 위해, 세니어 손질에 집중했다.
“어이구, 우리 세니어! 참 예쁘기도 해라! 넌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쁘게 생겼니~? ‘저눈 떼르펭슈 니믈 달맜떠요~.’ 어구, 그랬구나!”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부드러운 천으로 세니어의 검날을 닦으며 말을 거는 내 행동이 괴상해 보였던 걸까?
휴마누스의 목소리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상이 생생하게 묻어났다.
“보면 모릅니까? 칭찬해 주고 있잖아요. 세니어의 능력은 제 여벌 목숨 같은 거니까, 잘 보여야죠.”
“성검에게 아부하라는 얘기, 농담이 아니었구나?”
“네, 저는 진지합니다.”
내 대답에 휴마누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그러다가 갑자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돌연 윈스톤에게 말을 붙였다.
“윈스톤 경, 자네는 선우의 저런 행동을 어떻게 생각해?”
“상식 밖의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지?”
“예. 검은 습기에 예민한 물건인 만큼, 손질할 때는 김이 서리지 않도록 작은 숨결조차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검날에 대고 말을 걸다니,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휴마누스가 연신 고개를 끄덕거리며 홀로 윈스톤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와중, 이어진 윈스톤의 말에 멈칫했다.
“잠깐만, 검이랑 대화한다거나, 검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건 아무 문제도 없는 거야?”
“선우 선배가 하는 행동이지 않습니까.”
“···어, 그래.”
휴마누스가 또다시 소외감을 느끼며 움츠러들었다. 그렇게 심리적으로 구깃구깃해진 그를 구해낸 건 작은 노크 소리였다.
세르펜스가 돌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