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2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28화(628/1105)
628회
74. 공작님과 세계수 (17)
“그래서 지금 뭐 하자는 건데요?”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질문했다.
윈스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어설프게 둘러대다가 괜히 힌트라도 줄까 봐, 침묵하는 쪽을 택했나 보다.
‘내가 휴마눈새도 아니고. 생일 얘기를 하다 잠들었는데, 이대로 쭉 모르는 척하면 되레 티가 나겠지?’
이제 슬슬 감을 잡았다는 신호를 줘야 할 때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지금 제 생일을···.”
“이제 다 됐습니다!”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내 말을 끊고 울려 퍼지니. 기다렸다는 듯이 내 눈가를 가리던 윈스톤의 손이 치워졌다.
눈을 뜨자 나를 둘러싼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선우,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세르펜스를 시작으로.
“생일 축하해요, 선우!”
“어제도 말했지만, 선우야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하오, 선우 선배.”
“선우 씨, 생일 축하해요!”
“생일···, 축하해 줄게. 유선우.”
“선우 님, 생일 축하드려요.”
“생일 축하해, 선우!”
유지스, 휴마누스, 윈스톤, 에드나, 아니마, 리에나, 푸로르.
일행들 모두 각자 자신의 말투로 한 마디씩 내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말투는 중구난방에 타이밍 또한 어긋나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래서 더 떠들썩하고, 여러 사람에게 생일을 축하받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그들의 인사말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다들 내 이름을 불러주고 있네.’
아마 사전에 약속해 둔 걸 테다.
{아! 오늘이 선우의 생일이로군요! 축하드려요!}
상황이 이러하니 세계수까지 합세했다.
여기저기서 축하 인사가 쏟아지니 정신을 못 차리겠다.
“어···, 저기, 그···.”
일행들이 짠 하고 준비한 걸 보여주면, 깜짝 놀라면서 이러이러한 말을 해야지.
오면서 그런 계획을 분명히 짜 놓았는데, 막상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제대로 된 문장조차 구성하지 못했다.
미리 준비해 둔 말과 행동이 머릿속에서 깡그리 날아가 버리고, 가슴이 먹먹하여 말문이 턱 막혔다.
‘여러 사람에게 둘러싸여서, 내 진짜 생일을 축하받을 일은 앞으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
일찌감치 단념하고 있던 거라서.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으니 마음이 들떠 싱숭생숭해졌다.
내 침묵이 길어지자, 모두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졌다.
“다들, 감사합니다···.”
나는 겨우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공연히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음 지었다.
이런 내 반응에 일행들은 밝은 미소로 화답해 주었다.
“많이 놀랐나 봐요?”
“아···, 네.”
“전부 세르펜스가 계획한 거예요. 여기 롤링 페이퍼도 있어요!”
유지스가 발랄하게 웃으며 파일철 처리된 종이 뭉치를 건넸다.
그녀가 건넨 건 롤링 페이퍼라기보다는 편지 묶음에 가까웠다. 롤링 페이퍼 문화를 처음 전파한 내가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 그 누구에게도 따질 수 없는 일이다.
‘이걸 내가 받게 될 줄이야···.’
세르펜스의 생일에 롤링 페이퍼를 받으러 다녔을 땐 상상도 못 한 일이다.
나는 종이를 파라락 넘겨 보았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글씨체가 바뀌었다.
“생일을 미리 알았더라면 선물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편지로 생일 선물을 퉁친 게 내심 미안했는지, 에드나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나는 롤링 페이퍼를 덮고, 그것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읽는 건 이따가, 천천히 해도 되니까.
지금은 이 순간을 즐기는 게 우선이다.
“물질이라면 넘쳐나니까 괜찮습니다! 저는 이런 게 더 좋아요. 정말 최고의 생일 선물이네요!”
“와···,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답하기에는 조금 재수 없는 발언이네요.”
“프라시더스 가문의 복지가 워낙 훌륭해서 말이죠! 에드나 씨도 몇 년만 있으면, 돈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내 대답에 에드나가 실소를 흘렸다.
나도 마주 보고 웃어주며, 소중한 롤링 페이퍼가 구겨질세라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아무튼 다들 감사합니다. 롤링 페이퍼는 나중에 혼자서 천천히 읽어 볼게요. 그리고 세르펜스, 진짜 진짜 고마워요.”
“감사는 그만하면 됐습니다. 어서 이쪽으로 와 앉으십시오.”
세르펜스가 나보다 더 들뜬 표정으로 내 팔을 잡아끌었다.
세계수 아래에는 피크닉 매트가 네 장이나 펼쳐져 있었다. 우리 아홉 명은 그곳에 둥글게 둘러앉았다.
중앙에 샌드위치와 과일 등이 담긴 도시락 통과 초가 꽂혀있는 홀 케이크 두 개를 두고, 인원수만큼 준비된 식기를 각자의 자리 앞에 늘어놓았다.
그러고도 좁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케이크가 왜 두 개나 되는 거죠?”
“하나는 작년 몫입니다.”
세르펜스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초를 하나씩 세어보니, 녀석의 말대로 양쪽 케이크에 꽂힌 초의 개수가 달랐다.
그냥 세르펜스가 케이크를 많이 먹고 싶어서, 이렇게 준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고마워요, 작년 생일도 잊지 않고 다시 챙겨 줘서.”
아무렴 어떠랴 싶다.
그런 욕심으로 녀석이 케이크를 두 개나 준비한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흐뭇한 일인 것을.
“흠, 흠!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중대 발표라도 하려는 듯, 세르펜스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녀석의 입에서 비장하게 내뱉어진 말은 실로 놀라운 내용이었다.
“이 케이크들은 제가 직접, 혼자 나가서 사 온 겁니다.”
“네···? 세르펜스가 혼자서요?!”
“예. 가게 직원이 고르는 걸 도와주겠다고 나서 주셨지만, 제가 직접 고르는 쪽이 더 의미가 있을 듯하여 고르는 것도 혼자 했습니다.”
세르펜스가 허리를 쭉 펴서 곧은 자세로 자못 의젓하게 말했다.
녀석이 혼자 케이크를 사러 간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고르는 것도 스스로 하다니!
“대체 언제···?”
“어제 오전, 저 혼자 잠시 외출한 적이 있잖습니까.”
“아! 그때!!”
당시에는 유지스의 뒤를 밟는 줄 알고 녀석을 의심했었는데, 내 생일 케이크를 사러 간 거였을 줄이야.
녀석이 억울해할 만도 했다.
“그럼 진짜로, 세르펜스가 케이크를 사 온 거란 말이죠? 그것도 혼자서? 게다가 두 개씩이나?!”
갑자기 눈앞에 놓인 케이크가 달라 보였다. 그리고 세르펜스도 달라 보였다.
달달한 디저트를 좋아하면서도, 혼자서는 제과점에 들어갈 엄두조차 못 냈으면서.
나와 함께 제과점에 들어가서도, 내가 아무것도 안 사고 나오면 시무룩한 얼굴로 따라 나왔으면서.
그랬던 세르펜스가 혼자 제과점에 방문해, 케이크를 직접 골라서 사 온 것이다!
“세상에···! 세르펜스, 이건 정말···! 제 생애 최고의 생일 선물입니다!”
“아까는 롤링 페이퍼가 최고의 생일 선물이라고···.”
“방금 갱신됐어요!”
나는 휴마눈새의 말을 대충 끊고, 감동을 이어나갔다.
세르펜스는 내 생일 선물로 자신의 성장을 준비했다. 보호자로서 아이의 성장보다 기쁜 생일 선물이 또 어디 있을까?
“진짜 대단해요! 장하다, 우리 세르펜스!”
감정이 북받쳐 올라, 녀석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마구마구 쓰다듬어 줬다.
세르펜스는 성검 일행 앞이라고 나름대로 대외펜스 설정을 유지하려 애쓰는 듯했으나, 칭찬과 쓰담쓰담 세례가 쏟아지자 결국 어린아이처럼 헤실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혼자 밖에 나가 케이크를 사 온 게 저렇게까지 칭찬받을 일이던가···?”
눈치 없는 누군가가 또다시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우리 아이 성장에 기뻐하느라 바쁘니까.
“아 참.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하기에 너무 늦은 감이 없잖아 있긴 한데, 여기서 생일 파티 같은 거 해도 되는 겁니까?”
나는 세르펜스의 머리칼이 헝클어지다 못해 엉킬 때까지 쓰다듬다가, 녀석의 머리를 놔 주며 문득 떠오른 생각을 질문했다.
{저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초대된 건 처음이에요!}
장소 제공자가 가지를 흔들어대며,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보다 내 생일 파티를 기뻐하는 존재가 세르펜스 말고도 또 한 명. 아니, 또 한 그루 있었다.
‘그동안 하이 엘프들은 대체 뭘 한 거야? 세계수랑 놀아주지도 않고.’
오죽 심심했으면 세계수가 도청을 취미로 삼았을까.
성냥팔이 소녀가 남의 집 창문 너머를 엿보는 심정으로, 남의 집에서 들려오는 즐거운 목소리를 훔쳐 들었을 세계수가 조금 불쌍해졌다.
내가 안쓰러운 눈으로 세계수를 올려다보는 사이.
유지스가 세르펜스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했고 세르펜스는 성냥으로 초에 불을 붙였다.
썩 효율적인 역할 배분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둘 다 자신이 맡은 일에 만족하는 듯 보였으니 그냥 두도록 하자.
“촛불을 끄기 전에 소원을 비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세르펜스가 작년 나를 위한 케이크를 내 앞으로 끌어오며 말했다.
누가 누구더러 그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실수로 초를 꺼트릴까, 나는 피식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냈다.
‘마왕과 악숭이들을 모두 물리칠 때까지. 아니, 그 이후로도! 나와 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기를!’
그렇게 속으로 소원을 빌며, 단숨에 초를 꺼트렸다.
불 꺼진 케이크는 바로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긴 초가 두 개, 짧은 초가 일곱 개 꽂힌 올해의 나를 위한 케이크가 내 앞으로 옮겨졌다.
‘부디 세르펜스가 정신적으로도 건강한 어른으로 자랄 수 있기를!’
후욱, 힘차게 숨을 내뱉어 초를 한꺼번에 꺼트렸다.
소원을 하나만 빌어야 한다면 엄청나게 갈등할 뻔했는데, 두 개나 빌 수 있으니 고민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두 번째 생일 케이크의 촛불이 꺼지고 나자, 다들 박수 치며 다시 한번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이번에는 어물어물하지 않고, 밝게 웃으며 고맙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저도 무언가 선물을 드려야겠군요. 혹시 무언가 담을 만한 병이나 통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인성 나무로 의심했던 것이 미안하게도 세계수는 정이 많은 나무였나 보다.
달라고도 안 했는데 나서서 선물을 챙겨 주겠다는 걸 보면 말이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적당한 통을 하나 꺼내자, 세계수의 잎사귀가 팔랑팔랑 날아와 통 안을 가득 채웠다.
이걸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따뜻한 물에 우려서 마시면 아주 맛있습니다. 제가 직접 마셔본 적은 없지만, 사도들의 말에 의하면 세상 그 어떤 차보다도 맛있다고 합니다.}
“······.”
{굳이 잎을 말릴 필요도 없어요.}
내가 멀뚱멀뚱 통에 담긴 잎을 보고만 있자, 세계수가 설명을 추가했다.
나는 저기다 대고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빈 통을 하나 더 꺼냈다.
세계수는 흔쾌히 자신의 잎을 더 내주었다. 그래도 세계수의 잎은 여전히 풍성했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나는 세계수에게 감사를 표하며, 우리 중 가장 차를 잘 끓이는 유지스에게 잎을 맡겼다.
세계수가 장담한 대로 세계수 잎 차는 이제껏 마셔온 차들과 궤를 달리했다.
첫맛은 고소한 듯했으나 이내 청량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고, 목구멍으로 넘어갈 땐 묘한 감칠맛을 남겼다.
확실히 일반적인 차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맛이다.
차도 준비되었으니, 이제 세르펜스가 사 온 케이크를 먹을 차례다.
매우 기대되는 순간이 아닐 수가 없다.
‘케이크를 먹을 생각에 이렇게 들떠본 게 몇 년 만인지···.’
나는 직접 빵칼을 들고 두 개의 케이크를 잘라, 한 조각씩 접시로 옮겼다.
그리고 케이크를 한 입씩 맛봤다.
둘 중 하나는 화려한 데코레이션이 돋보이는 케이크로, 보이는 것과 달리 적당히 달면서도 고소함이 감도는. 순수하고 신선한 맛의 우유 크림 케이크였다.
그리고 또 하나는 붉은빛이 감도는 초콜릿 시트를 샹티이 크림으로 샌드하고, 체리 콩포트를 듬뿍 올린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였다.
순한 우유 크림 케이크와는 반대로, 진한 단맛에 새콤함이 더해진 자극적인 맛이다.
“맛이 어떻습니까?”
“둘 다 맛있네요! 하나는 삼삼하고 하나는 자극적이니, 밸런스가 딱 좋아요!”
내가 감상평을 마치자, 살짝 긴장하는 듯했던 세르펜스의 얼굴에 밝은 웃음꽃이 폈다.
그러고는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제 몫의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녀석도 두 가지의 케이크를 모두 맛본 뒤, 블랙 포레스트 케이크를 더욱 중점적으로 먹었다. 저게 입맛에 잘 맞나 보다.
마침 내 입맛에는 우유 크림 케이크가 더 잘 맞았다. 그러니 나는 이것을 위주로 먹으면 될 것 같다.
세르펜스가 난생처음 사 온 케이크를 앞에 두고 다른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는 없으니.
나는 아르케 왕성 주방장이 싼 도시락은 없는 셈 치고, 세계수 잎 차로 입안을 헹궈가며 케이크를 열심히 해치워 나갔다.
“캬~, 지상 낙원이 따로 없네!”
일행들이 소소하게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꽃이 핀 풀밭에서 생일 파티를 즐기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