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3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36화(636/1105)
636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4)
나는 고개를 흔들어, 머릿속에 떠오른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떨쳐냈다.
그때 에일리히의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괜찮으시다면 저녁 식사 전까지, 다 같이 응접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어떻습니까?”
“에일리히 님이야말로 괜찮으시겠어요? 세르펜스와 오랜만에 만났으니, 나누고 싶은 얘기가 많으실 텐데요.”
“괜찮고 말고요. 여러분께도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듣고 싶습니다.”
유지스가 완곡하게 거절해 보았지만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에일리히는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고, 결국 우리는 그를 따라 응접실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응접실에는 인원수에 딱 맞는 개수의 찻잔과 간식거리가 갖춰져 있었다.
우리가 수도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준비해 두었나 보다.
“우선 사전 동의 없이 여러분의 방을 옮긴 것에 사과드립니다.”
에일리히가 입으로는 우리에게 사과하며, 눈으로는 힐끔거리며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을 못 알아챌 세르펜스가 아니다.
“혹시 제 허락 없이 별관을 창고로 개조한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런 이유로 제 눈치를 보시는 거라면, 그러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만 창고를 재건하는 대신, 별관을 개조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셨던 건지 묻고 싶습니다.”
“실은···. 창고가 필요해서 별관을 개조한 게 아니란다. 그저 시온 경을 비롯하여 저분들의 숙소를 본관으로 옮기고 싶었을 뿐이지. 그럼 모두가 저택에서 지내는 동안 습격을 받더라도, 본관만 집중적으로 지키면 되지 않겠니? 그편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라고 여겨져···.”
누가 세르펜스와 혈연지간 아니랄까 봐, 에일리히가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완전 헛소리다.
악숭이들이 뭣 하러 세르펜스를 포함한 우리 일행과 에일리히, 공작저의 기사들을 한꺼번에 상대하려 들겠는가.
더군다나 이곳은 제국의 수도다. 조금만 시간을 끌면 황성과 대신전에서 지원을 보내올 테다.
그러니 악숭 세력이 멍청이 집합소가 아니고서야. 우리가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습격해 오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본관에 저희가 쓸만한 빈방이 있었던가요?”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에일리히에게 질문했다.
매우 좋은 지적이다. 내가 알기로도 본관에 손님방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아까 떨쳐낸 줄 알았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다시금 머릿속에 들러붙었다.
“여러분의 짐은···, 임시로 5층의 빈 방들에 옮겨놓았습니다.”
에일리히가 또다시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 여겼던 것에 동그라미 표시를 했다.
설마설마했건만. 에일리히는 우리의 방을 본관 5층으로 옮겨 버리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본래 5층은 가문의 사람들만 쓰는 장소이기는 하나, 현재 프라시더스 가 사람은 너와 나 둘뿐이고 저분들은 믿을 만한 분들이지 않니? 그리고 시온 경은 네가 가족처럼 친밀하게 여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혹시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하단다.”
아직 세르펜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건만.
제 발 저린 에일리히가 또다시 세르펜스에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기요, 에일리히 님. 그러지 마시고 그냥 세르펜스가 밤마다 도둑놈처럼 창문을 드나들며, 남몰래 제 방에 와서 자고 가는 게 신경 쓰여서 그랬다고 솔직하게 얘기하세요.”
“세르펜스 님, 그런 짓까지 하셨어요?!”
내 말에 가장 빠른 반응을 보인 건 에드나였다.
세르펜스가 나와 같은 방을 고집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택에서도 그러는 줄은 몰랐나 보다.
에드나가 경악하며 세르펜스를 바라보았다. 그에 세르펜스가 무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표정과 달리, 세르펜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으로 뻔뻔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애가 밤에 혼자 자기 무서우면, 보호자 방에 찾아올 수도 있지!”
뻔뻔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세르펜스의 의견에 동의하며 힘을 실어 주었다.
에드나의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세르펜스를 훑어보았다.
악마도 때려잡는 세르펜스가 밤에 혼자 자는 게 무서워서, 매일 밤 내 방에 찾아온다는 얘기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이해 못할 반응은 아니다. 에드나는 아직 세르펜스의 어린 시절을 모르니까.
“그런 얘기까지 터놓고 나눌 정도로, 모두와 친하게 지내는가 보구나.”
에일리히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따스한 눈동자로 우리 일행을 둘러보았다.
그런 에일리히의 반응을 본 에드나가 ‘와···.’ 하고 어이없다는 탄성을 흘렸다.
“백부님, 감사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모두의 방을 본관으로 옮기고 싶었습니다. 하나 남들의 눈치가 보여서 그리하지 못했었는데···. 덕분에 저택에서 지낼 때도 모두와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에드나가 어이없어하거나 말거나, 세르펜스는 감격해 하며 말했다.
삼촌에게 부모님도 안 사주는 값비싼 장난감을 선물 받은 조카의 표정이 저러할까?
세르펜스의 표정은 진짜로 기뻐 보였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는 에일리히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럼 결정 났구나.”
그렇게 우리가 의견을 피력하기도 전에 우리의 방 위치가 결정되었다.
처음 프라시더스 가 사람들의 전용 공간인 5층으로 방이 옮겨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하지만 프라시더스 가문 사람 전원이 동의했다면 괜찮겠지! 게다가 나는 명실상부 세르펜스의 보호자니까, 어엿한 명예 프라시더스인(人)이잖아?’
앞으로는 귀찮게 본관과 별관을 오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유지스도 본관 5층에서 생활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싱글벙글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응접실에 모인 사람 중, 웃지 못하는 사람은 두 명뿐이다.
윈스톤과 에드나.
“윈스톤은 세르펜스의 개인 호위 기사잖아요? 호위 기사가 호위 대상의 방과 가까운 곳에서 지내는 건 당연한 겁니다.”
“듣고 보니 선배의 말도 일리가 있소.”
윈스톤이 내 말에 동의를 표하며, 부담감을 덜어내고 그 자리에 책임감을 채워 넣었다.
이제 남은 건 에드나뿐인데 그녀에게는 마땅히 해 줄 말이 없다.
“연구실에 갔다가 방으로 돌아올 때마다 5층이나 되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니···.”
에드나가 아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뭔가 남 일 같지 않다. 나도 출근 첫날 근무처가 4층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 한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으니까.
이건 생존이 걸린 문제다.
계단 지옥에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언해 줄 말이 떠올랐다.
“에드나 씨에게는 마법이 있잖아요? 그러니 창문으로 드나들면 됩니다!”
“아하하, 웃자고 하는 얘기죠?”
“진심인데요?”
“······.”
에드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유지스는 그런 에드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창문을 애용하는 다른 한 사람. 세르펜스는 에드나가 앞으로 겪어야 할 고행보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간식에 더 관심이 가는 모양이다.
“일단 먹으면서 얘기합시다.”
세르펜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눈치챈 에일리히가 은은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제야 세르펜스가 신나서 간식에 손을 뻗었다.
에일리히가 준비한 간식은 일명 하트 파이라고도 불리는 ‘팔미에’였다.
바삭바삭 부서지는 가벼운 식감과 달리, 버터가 잔뜩 들어가 묵직한 칼로리를 자랑하는 구움 과자다.
‘식사 시간까지 한참 남았으면 모를까···. 이 시간에 이런 걸 애한테 먹여도 괜찮으려나?’
삼촌은 조카에게 맛있는 것을 먹여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만족해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아이의 식습관과 영양 밸런스 등을 생각해야 하니까.
이런 게 바로 주 양육자와 그렇지 않은 어른의 차이라는 거겠지.
‘식사를 못 해서 간식을 먹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간식을 먹느라 식사를 못 한다는 건 있어선 안 될 일인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에일리히가 세르펜스를 위해 준비한 간식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 못 먹게 할 수는 없다.
나는 세르펜스가 알아서 양을 조절하길 바라며. 그리고 녀석이 먹을 간식을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팔미에를 집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표면에 붙은 까슬까슬한 설탕 알갱이가 아작아작 씹혔다. 페이스트리류 특유의 바스러지는 식감 또한 잘 살아있었다.
고급 버터를 썼는지 비강을 가득 채우는 버터의 풍미도 장난이 아니다.
과연 우리 애가 자제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러운 맛이다.
“바스툴 왕국의 일은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잘 해결되어서 다행입니다.”
에일리히가 내게 말을 붙여왔다.
소문은 어디까지나 베일의 행적과 바스툴 왕실에 관한 이야기가 중심이었다. 거기에서 조금 더 살이 붙어 봤자, 르웰에 관한 내용 정도다.
바스툴 왕국의 혁명에서 룩스메아 교단은 그저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렇기에 주교 에인젤, 이단 심문관 마테리아, 신관 프레이와 레반다, 성기사 오르덴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즉, 신관펜스의 활약상을 듣고싶다는 거겠지!’
그것도 누구보다 세르펜스를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을 내 입을 통해서 말이다.
나는 손에 들린 과자를 재빨리 먹어치우고 탁탁 손을 털어낸 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냈다.
성직자 설정에 몰입하기 위해 매일 작은 기도회를 열었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여정 도중에 늘어난 프레이의 설정.
그리고 세르펜스가 먹다 남은 육포를 내게 먹이려 했던 일이라던가, 에드나에게 이상한 효도를 배워서 포도알을 하나하나 닦은 일과 딸기 젤리 도둑 사건. 그 외 기타 등등.
여담으로 세르펜스의 가짜 초상화가 돌고 있다는 얘기도 빼먹지 않고 말했다.
에일리히가 가장 관심을 보인 주제는 ‘세르펜스의 기도문’이었다.
누가 전직 성직자 아니랄까 봐, 세르펜스는 어떤 기도문을 읊을지 궁금한가 보다.
“그리고 아르케 왕국에도 들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성직자 설정 놀이 파트가 끝나자, 에일리히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세르펜스의 일상에 관해 물어왔다.
성검과 내 정체에 관한 건 비밀이지만, 다른 건 얼마든지 얘기해 줄 수 있다.
세계수 아래에서 피크닉을 즐기고 세계수의 잎을 선물로 잔뜩 받아왔다는 이야기에, 에일리히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즐겁게 잘 지낸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힘든 일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추억을 쌓고 왔죠. 아 참! 그리고 드디어 세르펜스와 휴마누스가 정식으로 친구 사이가 되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지휘자처럼 팔을 크게 휘저으며 호응을 유도했다.
눈치 빠른 유지스가 가장 먼저 ‘와아아!’ 하고 소리치며 짝짝짝 박수 세례를 보냈다.
뒤이어 세르펜스가 들고 있던 과자를 입에 물고,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소심하게 손바닥을 맞부딪혔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본 에일리히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유지스보다 더 열렬하게 박수를 쳤다.
조카의 재롱을 보는 삼촌의 모습 그 자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윈스톤과 에드나도 마지못한 표정으로 합세했다.
그렇게 응접실 안은 한동안 박수 소리로 가득 찼다.
한참 뒤 박수 소리가 잦아든 후, 에일리히가 기분 좋은 표정으로 말했다.
“지난 9월 말쯤, 악마 소환 징후가 두 번이나 연달아 나타나서 걱정이 많았는데···.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아, 맞다! 악마들 해치운 거 교단에 보고 안 했다!”
나만 깜박한 게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서 ‘앗!’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변명하자면 할 말은 많다.
평소라면 악마들을 해치우자마자 바로 보고를 했을 텐데, 성검펜스의 등장으로 우리는 한동안 국경 한복판에 발이 묶여 있었다.
성검펜스가 던지고 간 1회차의 떡밥도 너무 컸다.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존재라는 것도 밝혀졌고···.’
그 이후로도 닼숭이와 성검과 세계수 때문에 신경 쓸 일이 정말 많았다.
그렇게 두 악마에 관한 일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점차 잊혀 버린 것이다.
“세르펜스도 깜박했어요?”
“으음···, 미리 휴마누스와 말을 맞춰 놨어야 했는데···.”
세르펜스가 중요한 보고를 까먹은 건 난생처음 있는 일일 테다.
그 때문에 민망함이 남들보다 컸던 건지, 녀석은 내 시선을 피하며 딴소리를 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