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3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40화(640/1105)
640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8)
그렇게 알타르 이단 심문관의 동의 없이 대련 약속을 잡은 후, 우리는 서재를 나왔다.
드디어 내 새로운 방을 구경할 시간이 온 것이다.
어린 시절, 처음으로 내 방이 생겼을 때만큼이나 즐거운 설렘이 찾아왔다.
‘별관에 있던 그 방은 여러모로 별로였지. 특히 욕실이.’
씻거나 볼일을 볼 때마다, 갑자기 거울 뒤에서 사람이 튀어나오지 않을까 얼마나 불안했던가.
방음도 개판이라 샤워하며 노래를 열창하는 건 꿈도 못 꿨다.
‘열창이 다 뭐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눈치가 보일 판국에···.’
벌레 나오는 반전세에 살다가 신축 아파트로 이사 온 사람의 마음이 이러할까?
그렇다고 별관에서 벌레가 나온다는 건 아니지만.
한스가 튀어나온 적은 종종 있으니, 대충 비슷한 느낌이긴 하다.
더군다나 그 방의 전 주인은 죽은 전대 보좌관이었다.
그렇게 찜찜한 곳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놀랍기까지 하다.
“그곳은 내가 어릴 적 쓰던 방이다.”
내가 문고리를 잡는 순간. 세르펜스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이 방에서도 학대가 벌어졌던 걸까?’ 하는 생각이었다.
설렘이 눈처럼 녹아 사라졌다.
“모든 일과를 끝내고, 방에 돌아가 쉬는 몇 시간이 그 시절의 내게는 유일한 안식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그 방을 쓰게 되었다니···. 음···.”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세르펜스가 말끝을 얼버무리며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어두운 밤에 홀로 방안에 틀어박혀, 울음을 삼키는 꼬마펜스의 모습이 연상되어 쉬이 웃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나쁜 기억으로 남은 장소가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다.
“시온 경에게 그 방을 내어 주는 게 맞는 걸까 걱정했었는데···. 그 반응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에일리히가 자신의 방문을 열기만 한 채로, 들어갈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일리히 님은 이 방이 세르펜스가 쓰던 방이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그 방은 원래 가문의 후계자들이 쓰던 방입니다. 저 또한 소가주이던 시절, 그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아, 예···. 그러셨군요.”
순간 대대로 가문의 후계자가 쓰는 방을 외부인에게 내줘도 괜찮은 걸까,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그러나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가문의 어르신은 방을 배정해 준 장본인이고, 가주는 내가 이 방을 써서 좋다는데. 물어봐서 무엇하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내 방이 가문의 후계자가 쓰는 방이라면, 가주인 세르펜스가 현재 쓰는 방은···.’
그동안 그런 곳에서 참 잘도 지냈구나 싶다.
녀석이 매일 밤마다 내 방에 와서 자려고 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이참에 본관도 엎어버리고 새로 짓는 게 어떨까 싶지만, 잘못은 사람이 했지 건물에는 죄가 없다.
나는 현재 세르펜스가 쓰는 가주의 방을 포함한 본관 건물을 용서해 주기로 했다.
“그럼 잘 자거라, 얘야. 그리고 시온 경도 안녕히 주무시길.”
“네, 백부님께서도 안녕히 주무십시오.”
“에일리히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우리는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린 소년이 혼자 쓰던 방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무척이나 넓었다.
이 넓은 면적을 채우기 위함인지, 침대도 윈스톤 두 명이 나란히 누워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세르펜스는 열다섯의 나이로 공작위에 올랐으니.
그렇다는 건 그때까지는 이 방을 사용했다는 건데, 방안의 가구들은 전부 성인을 기준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가구를 싹 다 바꾼 건지, 원래 이랬던 건지···.’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코 옷장을 열어보았다. 옷장 안에는 처음 보는 옷들이 가득했다.
어린 세르펜스가 입던 옷이라고 하기에는 그 색상이 다양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몇 개 꺼내어 몸에 대보니, 어떤 건 살짝 헐렁할 것 같고 어떤 건 얼추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소매와 바짓단 길이는 전부 나에게 딱 맞았다.
“이거 설마, 내가 또 살찔 것을 고려하여 세르펜스가 미리 사 둔 옷들인가? 이런 건 대체 언제 주문한 거야?”
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자기세뇌 하며 옷장을 닫고, 다른 가구들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잘 길들인 목제 가구 특유의 은은한 생활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가구들은 어린 세르펜스가 쓰던 게 맞는가 보다.
쭉 둘러보니 침구류나 카펫 정도만 새것으로 바꾼 것 같다.
‘하긴, 이곳의 귀족들은 역사와 전통에 유난스러울 정도로 집착하곤 하니까. 당연한 일인가?’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잘 관리된 비싼 가구들을 내다 버렸을 리는 없다.
제국의 둘뿐인 공작가에서 가족이 쓰는 가구를 아무 장인에게나 맡겼을 리도 없으니. 이곳의 가구들은 전부 드워프가 만든 것일 게 분명하다.
어디 그뿐이랴?
무슨 놈의 의자에 주먹만 한 보석을 박아 놨는지, 혀가 절로 내둘러진다.
이쯤 되면 가구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
거기에 세르펜스가 사용했다는 사연까지 더해지면, 그 값을 매기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새로운 방 주인이 인테리어를 뜯어고치겠다며 설치거나, 가구를 부숴 먹지 않고서야.
이 가구들은 계속 이 자리를 지키겠지.
그리고 그 ‘새로운 방 주인’은 바로 나다.
세르펜스가 이 공간을 끔찍이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안식처로 느꼈다는데. 굳이 가구들을 갖다 버려야 할 이유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이 방에서 처치 곤란인 물건들을 찾자면, 이 가구들이 아니라···.’
나는 방 한쪽에 잘 정돈된 시온의 짐들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지금은 옷이고 신발이고 할 것 없이 전부 세르펜스가 사준 물건들을 두르고 있으니.
제온과 상의해서 예전에 시온이 입던 옷이나 물건들은 리벨론 가에 보내는 게 좋겠다.
‘가족 초상화 같은 최소한의 물품들은 남겨야겠지만···. 아니다, 그냥 제온에게 떠넘기는 게 나으려나?’
시간 날 때 제온과 얘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슬슬 잘 준비를 하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방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낭비했으니. 세르펜스가 오기 전에 후딱 샤워만 하고 나가려 했는데, 커다란 욕조를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싶어졌다.
“그동안은 세르펜스가 매일 내 방으로 찾아왔으니까, 오늘은 내가 먼저 놀러 갈까 했는데···.”
잠깐 갈등했지만, 나는 결국 뜨끈한 물에 푹 담궈지고 싶다는 욕망에 패배하고 말았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세르펜스의 방에 쳐들어가는 건 내일로 미루어야겠다.
만족스러운 목욕을 끝낸 후 욕실을 나오자, 홀로 침대를 옮기는 세르펜스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렇게 자신이 어린 시절 쓰던 침대 옆에 현재 자신이 쓰는 침대를 내려놓고, 녀석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잠들 때까지 옆에서 동화책 읽어 줄까요?”
충동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세르펜스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르펜스는 여기에서 쉬는 게 그 시절의 유일한 안식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외롭고 불안했을 것 같아서요.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소리는 차단되어도 사람이 지닌 기운까지 차단하는 건 아니다.
어린 세르펜스는 이곳에서 쉬는 동안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벽 너머, 가주의 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주의를 기울였을 테다.
반대로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이 자신의 기척을 느끼고 있다는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겠지.
“뭐, 싫으면 관두시고요.”
“아, 아니다. 평소에 선우가 나를 어린애 취급하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라서···.”
“그냥 유년기 추억을 다시 쓴다고 생각하세요.”
싫지는 않은지, 세르펜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 아공간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한참을 이 책 저 책 꺼냈다 집어넣기를 반복하던 녀석이 최종적으로 고른 건, 동화책이 아니라 웬 서류뭉치였다.
익숙한 필체로 적힌 길고양이를 마주쳤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거 제가 세르펜스 생일에 써 준 롤링 페이퍼잖아요? 이야~, 오랜만에 보니 반갑···. 잠깐만요, 지금 이걸 읽어달라고 내민 겁니까?”
내 물음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체 낯짝의 두께가 얼마나 두꺼우면 이런 게 가능할까 궁금하여, 녀석의 볼을 꼬집어 보았다.
“이상하다? 딱히 낯짝이 두꺼워진 건 못 느끼겠는데, 왜 이렇게 뻔뻔해졌지?”
“그래밧자 서누만 할까.”
볼이 꼬집힌 상태로 세르펜스가 떳떳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꼬집었던 녀석의 볼을 놓아주고, 손바닥으로 살살 문질러 주었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냐고 묻는 듯한 세르펜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건 그렇고 저 침대, 세르펜스가 어렸을 때 쓰던 거 맞죠?”
“마음에 안 든다면 새로 사주겠다.”
맞는다는 소리이다.
나는 고개를 내저어 됐다는 뜻을 전하고, 꼬마펜스가 쓰던 침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누워요.”
“음···?”
“유년기 추억을 다시 쓰겠다고 말했잖아요.”
뒤늦게 세르펜스가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누웠다.
나는 녀석의 이불을 잘 덮어주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세르펜스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좋아요?”
“어린 시절. 휴마누스가 이제 자신은 애도 아닌데 잘 때 부모님이 책을 읽어 주신다며, 내게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당시에는 과연 황가의 교육은 혹독하구나 싶었지만···.”
세르펜스가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뒤이어 올 내용을 짐작하기란 쉬웠다.
수면을 통한 무의식 암기 교육 같은 게 아니라, 자식을 향한 애정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휴마누스가 부러워졌다는 얘기였다.
원래 어렸을 적 남들 다 하는 경험을 못 하면, 평생의 한으로 남는 법이다.
세르펜스의 마음속에는 이런 식으로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가 몇 명이나 있는 걸까?
나는 쓸쓸한 표정을 한 세르펜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적었던 롤링 페이퍼를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오늘 밤, 세르펜스의 마음속 어린아이 하나가 무사히 성장하길 바라며.
“어느 날, 길고양이를 마주쳤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치료를 해주고 싶었는데, 고양이는 겁이 많아 저를 피했습니다. 간식으로 유혹해봐도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세르펜스를 고양이로 치환해 놓아서 그런가, 어딘지 모르게 동화책 느낌이 나는 것도 같다.
처음부터 끝까지 독백만 이어지는 탓에, 내 뛰어난 구연동화 실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상처 입은 고양이는 저를 계속 경계했지만, 저는 하루빨리 고양이와 친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조급하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운 좋게 고양이를 포획하여 집에 데려오는 것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고양이의 상처는 크게 벌어지고 말았어요. 미안합니다, 고양이님. 많이 아팠죠?”
글을 읽다 보니, 묘하게 종이가 해진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대체 이 글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던 걸까?
추억에 잠겨 한 자 한 자 읽어내려가다 보니, 옆에서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