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4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45화(645/1105)
645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13)
“용건도 끝났으니 저는 이제 그만 나가 볼게요. 시간 내줘서 고마웠어요.”
에드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서야, 사람을 방에 초대해 놓고 차 한 잔 대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차를 내오기에는 이미 늦었다. 마법 연구를 하느라 바쁜 사람을 오래 붙잡아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고맙긴요, 제가 걱정되어서 5층까지 따라 올라오신 거면서. 그러니 감사 인사는 제 쪽에서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다행이네요.”
그 말을 끝으로 에드나는 방을 나갔다.
나는 방에 홀로 남아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각은 10시 57분. 아직 점심시간까지 시간이 꽤 남았다.
‘편지를 쓰려면 예전 글씨체를 확인해야 하니까···.’
세르펜스가 돌아오면 옛날 서류를 찾아달라고 부탁하기로 하고, 일단은 짐 정리부터 하는 게 좋겠다.
가족 초상화와 생일 때 선물로 받은 물건들.
면접용으로 시온의 부모님이 맞춰준 정장과 구두.
연회에서 수도의 귀족들에게 꿀리지 말라며 카론과 제온이 돈을 모아 사 준, 큼직한 보석이 박힌 정장 브로치. 그 외 기타 등등.
이런 의미 있는 물건들은 리벨론가로 보낼 수 없다.
시온의 가족들이 서운해할 테니까.
“얘도 참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구나?”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시온의 기억을 더듬어 가며 분류하다 보니. 그리고 시온의 추억을 떠올리며, 내 가족들을 향한 그리움을 곱씹다 보니.
아직 정리해야 할 게 태산인데도, 시곗바늘은 어느새 식사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세르펜스가 왜 안 오지?”
그 의문이 풀린 건 식사실에 도착하고 나서다.
나를 마지막으로 세르펜스를 제외한 모두가 자리에 앉자, 에일리히는 세상 모든 시름을 끌어안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세르펜스는···, 황제 폐하와 함께 식사를 하고 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하던 일행들의 얼굴에 허탈함이 깃들었다.
조카가 밖에서 밥 먹고 온다는 얘기를 이렇게나 비통하게 꺼낼 일인가 싶지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에일리히와 세르펜스가 남남으로 살아온 세월이 오죽 길던가. 게다가 우리는 또다시 악숭 세력과 싸우기 위해, 저택을 떠날 예정이다.
그러다 보니 조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소중할 만도 하다.
더군다나 에일리히의 현재 나이는 55세였으니.
그가 신성력 보유자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앞으로 세르펜스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어라? 잠깐만. 에일리히 님의 신성력 보유량을 생각하면, 100세는 거뜬히 넘기실 것 같은데? 건강 관리를 잘하면 더 오래 사실 수도···.’
그래도 26세의 세르펜스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곧 해가 바뀌면 세르펜스도 나이를 먹을 테니까.
‘정신 연령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세르펜스가 황제와의 식사 자리를 원했을 리는 없으니, 황제가 녀석을 붙들어 놓은 게 확실하다.
휴마누스의 근황이라든가, 악마 둘을 해치운 일, 바스툴 왕국의 새로운 왕과 그 휘하 귀족들에 관한 정보, 아르케 왕국에 들른 이유 등등.
이것저것 캐물으며, 그에 관해 의논하느라 시간이 길어진 걸 테다.
나는 느릿하고 지루한 황제의 목소리를 떠올려 보았다.
역시 안 따라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방으로 돌아와 다시 짐 정리를 시작했다.
이 짓도 하다 보니 탄력이 붙어, 어느덧 끝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인문학 서적 하나를 집어 들고, 이 책에는 무슨 사연이 있을까 끙끙대며 시온의 기억을 뒤적거렸다.
그리고 그 책이 취준생이던 시온이 교양을 쌓아보려고 샀지만,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하고 방치된 것이라는 기억이 떠오른 순간.
– 똑, 똑, 똑.
어딘지 모르게 절제된 느낌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부디 비비가 된 시온이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날이 오기를 바라며. 나는 그것을 ‘리벨론가에 보낼 물품’ 사이로 던져 놓고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여느 때와 비교도 안 되게 굳어있는 윈스톤의 얼굴이었다.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내가 선배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요?”
느닷없이 찾아온 윈스톤은 다짜고짜 난데없는 질문을 해댔다.
윈스톤이 내게 잘못을 저지르다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를 방안으로 들인 후 진지하게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자책에 사로잡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윈스톤이 있어서 항상 든든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신감을 가지세요.”
“그래서 내게 정통파인가 뭔가 하는 이상한 집단을 떠넘긴 거요?”
어째서 윈스톤이 나를 찾아온 것인지 이제야 감이 잡혔다.
오전 내내 훈련장에서 검만 휘둘러 댔을 터이니. 자신이 정통파를 지지한다는 소문을 이제야 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소문의 발원지가 나라는 사실도.
“이상한 집단이라뇨?! 그들은 단지 세르펜스의 숭고한 아름다움을 찬양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충성심과 비슷한 거라고요!”
“나는 세르펜스 님의 외양을 보고 그분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오.”
“그들도 세르펜스의 외양만 보고 찬양하는 게 아닙니다. 세르펜스의 자애와 자비. 그리고 순수한 마음을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여겨, 녀석이 그 선한 마음을 잃어버리지 않길 바라는 이들의 모임이 바로 정통파입니다.”
“······.”
“반대 진영인 혁신파는 악인들에게 분노하며, 냉정하게 놈들을 처단하는 세르펜스의 반전 매력을 지지하죠. 참고로 그들의 중심축은 유지스입니다.”
나는 윈스톤의 오해를 풀고자 정통파와 혁신파에 관해 설명을 늘어놓았다.
혁신파의 중심이 유지스라는 걸 알렸으니, 정통파와 혁신파가 이상한 집단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인지했을 텐데.
그럼에도 구겨진 윈스톤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그 얘기는 이미 듣고 온 참이요. 선배의 설명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자세하게···.”
윈스톤이 진저리 치며 말했다.
대체 누굴까? 이 덩치 큰 기사님을 붙들고 정통파와 혁신파에 관한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용자는.
내가 놀라움을 느끼는 사이에도 윈스톤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세르펜스 님께서 적을 가엾게 여기시든, 가차 없이 죽이시든. 그런 건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소. 그들을 가엾게 여기신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반대라도 마찬가지일 테니. 어느 쪽이든 그분을 향한 내 충심이 변하는 일은 없을 거요. 그러니 다시는 나를 그런 이상한 집단과 엮지 마시오.”
정통파와 혁신파를 모두 부정하는 말이자, 양쪽 모두를 수용하는 말이다.
나는 인정해야 했다.
윈스톤이 정통파라는 내 캐 해석이 틀렸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는 단지 주군인 세르펜스를 차마 애 취급할 수 없었던 것일 뿐. 녀석의 반전 매력을 부정하는 게 아니었다.
“방금 그 얘기, 다른 사람들에게도 했어요?”
“했소.”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되느냐는 듯, 윈스톤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모르는가 보다.
나는 확신한다.
앞으로 공작저 내에서 정통파와 혁신파 간의 대립은 사라질 것이라고.
반전이 있든 없든 세르펜스는 세르펜스이므로. 녀석의 빛나는 아름다움은 사라질 수 없기에.
두 계파는 윈스톤의 이념 아래 하나로 뭉치게 될 것이다.
“대단합니다! 윈스톤이 공작저의 평화를 지켰어요!”
“그런 말보다, 내게 해야 할 말이 따로 있지 않소?”
내 감탄 어린 말을 무시하며, 윈스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윈스톤의 모습을 마주하고 있자니 절로 공손한 자세가 나왔다.
“···죄송합니다.”
“알면 다시는 그러지 마시오.”
“넵!”
내가 힘차게 대답하자 윈스톤이 고개를 돌리며 힘 빠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내가 분류하느라, 방안에 펼쳐놓은 시온의 짐들을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것들이요? 원래 시온의 물건인데, 계속 방구석에 처박아 놓기 뭐해서요. 리벨론가에 보낼 건 보내고, 나머지는 제온에게 넘길 생각입니다.”
“방도 넓은데, 그냥 둬도 상관없지 않소?”
나는 윈스톤에게 인테리어가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고 묻는 대신, 내가 시온의 짐을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를 알려 주었다.
모든 물건은 그 주인에게 있을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닌다.
그런 의미가 담긴 내 설명에 윈스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윈스톤은 제국까지 왔는데, 가족들 안 보고 싶어요?”
오전에 가족이 그립다는 얘기를 한차례 입 밖으로 꺼낸 탓인지. 아니면 시온의 짐을 정리하면서 가족에 관해 생각한 탓인지.
그냥 툭 하고 이런 질문이 튀어나왔다.
“내 가족은 수도가 아니라 프라시더스 령에 있소.”
“그건 알지만···. 어휴, 이제 보니 윈스톤도 불 속성 효자였네! 가서 부모님께 편지라도 한 통 쓰세요.”
“불 속성 효자가 무슨 뜻이오?”
“불효자요, 불효자! 아무리 주군을 따라 검을 드는 것이 기사의 본분이라고 한들, 자식의 본분을 잊어서는 안 되죠!”
“혹시 취했소?”
윈스톤이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허튼소리를 해댔다.
점심으로 나온 스테이크를 먹으며 와인을 한잔 걸치긴 했지만, 내 정신은 멀쩡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술판이 벌어졌을 땐, 윈스톤이 자리에 없었지?’
언제 한번 윈스톤 앞에서 진짜 술주정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줘야지 안 되겠다.
속으로 그런 다짐을 하며 윈스톤을 노려보고 있자니, 그가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편지라면 나중에,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쓸 생각이오. 지금 같은 상황에 가족들을 아낀다는 티를 내서 좋을 건 없지 않소?”
“아···.”
그 말대로다.
에일리히만 해도 세르펜스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납치될 뻔했으니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족들이 다른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는 사실에 윈스톤을 비롯한 일행들에게 미안함이 들었다.
“죄송합니다, 불 속성 효자라는 말은 취소할게요.”
“이런 사과는 빨리도 하는구려.”
“아하하···.”
어색하게 웃는 나를 보며 윈스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할 말도 다 했으니, 나는 이만 가 보겠소.”
“지금쯤이면 세르펜스도 황제에게서 벗어나, 공작저로 돌아오는 중일 텐데. 또 훈련하러 가게요?”
나는 윈스톤을 붙잡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시곗바늘은 2시 30분을 막 지나쳐, 3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가는 중이었다.
에일리히가 받은 연락은 세르펜스가 점심을 먹고 돌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덤으로 오늘 먹을 간식을 사 오라는 심부름까지 시켜 뒀으니. 녀석은 분명 간식 시간 전에 돌아올 것이다.
“아, 벌써 시간이···.”
“네. 간식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간식 시간에 땀내 폴폴 풍기며 나타날 게 아니라면 훈련은 나중으로 미루고, 여기 치우는 것 좀 도와줄래요?”
“······.”
“오늘 간식은 세르펜스가 직접 사 오기로 했습니다!”
“······.”
그게 뭐 어쨌냐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윈스톤은 분류를 끝낸 물건의 정리 작업을 도왔다. 정말 착실하고 좋은 사람이다.
세르펜스가 오면 윈스톤의 칭찬을 잔뜩 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