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51)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52화(652/1105)
652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0)
“일단 앉으세요.”
제온에게 자리를 권한 뒤. 나 또한 의자에 앉아 그가 가져온 편지를 펼쳐보았다.
옮겨 적는 건 세르펜스지만, 어떻게 수정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크게 고칠 부분은 없었다더니···.’
편지를 펼치자마자 붉은색 잉크로 쓴 글자가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이 내용은 빼는 게 좋겠다든가, 이 문장은 이렇게 고치는 것이 더 ‘작은 형’다울 거라든가, 이 부분은 너무 뻔뻔한 것 같으니 조금만 소심하게 표현해달라든가.
추신에 보고 싶다는 말도 써달라든가.
그런 내용이 주를 이뤘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띈 건, 편지의 최상단과 최하단.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앞에 적힌 붉은 글씨였다.
받는 이에 해당하는 ‘부모님께’ 앞에는 ‘사랑하는’이 붙었고, ‘시온 올림’ 앞에는 ‘두 분의 사랑스러운 둘째 아들’이란 수식어가 붙었다.
‘아차, 내가 이걸 빼먹었네.’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건 필수가 아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
편지의 첫인상과 마지막 인상을 결정하는 요소이자, 보내는 사람이 받는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담겨있는 구절이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붉은색과 검은색 글자가 복잡하게 뒤엉킨 편지를 내려놓았다.
“세르펜스, 편지지 있죠?”
“네, 가지고 있습니다.”
세르펜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고급 편지지와 편지 봉투를 꺼냈다.
그동안은 서류 작업할 때 쓰는 무지 종이만 가지고 다녔었는데.
앞으로는 나도 저런 편지 세트를 가지고 다녀야겠다.
세르펜스는 가장자리를 따라 둘러진, 화려한 금박 문양이 돋보이는 편지지를 자신의 앞에 반듯하게 펼쳐 놓고.
그 주변에 옛 서류들과 교정 작업을 거친 편지를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우아하게 쭉 뻗은 손가락을 움직여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어딜 어떻게 보아도 글을 옮겨 적기 위한 일련의 동작에, 제온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보좌관님이 아니라, 주인님께서 편지를 쓰시는 겁니까···?”
“제가 시온의 글씨체를 연습하고 있으니까, 세르펜스가 슬쩍 옆으로 와서 자기도 해 보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켜봤더니, 아니 글쎄! 시온의 글씨를 금방 따라 쓰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 공작님 손재주가 이렇게나 좋습니다!”
차마 필체 및 서류 조작이 세르펜스의 특기라고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자랑 같은 변명을 늘어놓자, 제온이 떨떠름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맞장구치며 세르펜스 자랑에 동참해 줄 거라고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런 질린다는 듯한 반응을 보일 건 또 뭐란 말인가.
“집사님은 공작님이 자랑스럽지도 않아요?”
“자랑스럽긴 한데···, 이런 사소한 것까지 호들갑을 떨 건 없지 않습니까?”
남의 필체를 베끼는 기술이 주로 어디에 쓰인 줄 알면, 다시는 사소하다는 말을 하지 못할 텐데.
세르펜스의 이미지에 득보다 실이 더 많았으므로 그 점은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할 얘기가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별건 아니고, 리벨론 백작가로 보내는 물건들 때문에요.”
나는 낮에 알타르와 나누었던 대화를 토대로, 모든 짐을 리벨론 백작가로 보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가족의 안전이 걸린 문제니만큼 제온은 진지하게 내 말을 경청했다.
“···해서, 집사님 결혼식에도 아마 참석하지 못할 것 같아요.”
“어차피 입적만 먼저 진행하고 식은 나중에 올릴 생각이었습니다.”
내 딴에는 엄청 조심스럽게 꺼낸 얘기였는데, 제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왜요?!”
“시기가 시기지 않습니까. 식을 올리는 도중에 악마 소환 징후가 나타나는 부정한 사태를 피하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악마 숭배자들이 테러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요즘에는 다들 그렇게 합니다.”
악숭이들 때문에 결혼식도 못 올린다니.
악마보다 악숭이가 더 악마 같다. 어쩜 이렇게나 다채로운 방식으로 사회에 해악을 끼칠 수 있는 걸까?
“아무튼 짐 문제는 알아들었습니다. 이단 심문관께서 그리 판단하셨다면, 그렇게 하는 게 좋겠죠. 부모님께서 서운해하시겠지만, 안전이 제일이니까. 그런데 교단도 보좌관님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까?”
“네, 뭐. 어쩌다 보니? 그리고 에일리히 님께는 오늘 밝혔어요.”
“···그거, 비밀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악숭이들도 다 아는 사실인데 뭐 어때요? 모든 일이 끝난 후에도 저는 계속 시온의 몸으로 여기서 살아가야 하니까, 귀찮아지기 싫어서 숨긴 것뿐입니다.”
나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며 말했다.
악숭이가 내 정체를 알면서도 그것을 까발리려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룩스메아가 친히 다른 세상에서 불러들인 영혼이라는 걸 알면, 모두가 나에게 협조적으로 나올 테니까.
그리고 대륙을 구하기 위해 신께서 노력하고 계시는구나 하며 희망에 찰 테니까.
‘유일하게 써먹을 만한 방법은 제온을 이용해 나를 유인하는 것뿐인데, 그건 진작에 실패로 끝났지.’
그냥 내가 숨기고 싶어서 숨겼을 뿐이다.
오늘 에일리히에게는 그냥 밝히고 싶어서 밝혔을 뿐이고.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랑 에일리히 님한테는 들킨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밝혔네?’
아까는 알타르가 있어서 본명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떠나기 전에 이름을 알려줘야겠다.
그리고 제온에게는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고민하고 있을 때.
“돌아가는 방법을 찾는 건, 포기하신 겁니까···?”
제온이 굳은 얼굴로 내게 질문했다.
큰 충격을 받은 듯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떠보고 싶어졌다.
“진짜 가족도 아닌 사람이 계속 가족 행세를 하는 게 불편해요?”
“불편하지 않습니다. 설령 불편하다 하더라도, 평생 타인을 연기해야 하는 보좌관님만 하겠습니까?”
불편하지 않다는 저 말이 정말 진실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과 목소리로 미루어 보아,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돌아가는 방법은 찾았어요. 하지만 나중에. 아주 나중에 돌아가려고요. 가면 다시는 이곳으로 못 올 텐데, 미련 없이 떠나기에는 소중한 인연이 너무 많아져서···. 모두가 그리워질 것 같아서···.”
내 말이 이어질수록 제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세르펜스도 잠시 필기하던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제온은 그렇다 쳐도, 세르펜스는 이미 들은 얘기면서. 새삼스레 뭘 동요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 참고로 지금 돌아가든 10년 뒤에 돌아가든, 제가 살던 세상은 그대로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이곳에 왔을 때, 그 시점으로 돌려보내 준대요. 아무튼 그래서 아예 이곳에서 누릴 거 다 누리고 가자고 결정한 겁니다. 악숭이들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고 있는데, 세상이 평화로워지자마자 돌아가는 건 너무 억울하잖아요?”
나는 세르펜스에게 하던 일 마저 하라는 손짓을 보내며, 과장되게 떠들어댔다.
세르펜스가 마지못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려 편지지를 보았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내가 밝은 모습을 보이자, 제온이 살짝 안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손을 맞잡자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 주고 있다면, 계속해서 벽을 쌓는 건 실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 이름은 유선우입니다. ‘유’는 성이니까, 그냥 ‘선우’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부를 일은 많지 않겠지만···. 아! 그리고 만약 부르실 거라면 제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 주변에 없고, 방음이 확실한 곳에서만 불러주세요.”
그렇게 말한 뒤. 나는 내 본명을 아는 사람들 명단을 쭉 읊었다.
에일리히에게는 조만간 밝힐 예정이라는 것. 그리고 알타르를 비롯한 교단 인물 몇몇은 정체만 알고 이름은 모른다는 것도 알려 주었다.
실수하지 말라는 뜻에서.
‘세르펜스가 교황에게 내 이름이 알려져선 안 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해대지만 않았어도···.’
나는 느릿하게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글을 옮겨 적고 있는 세르펜스를 째릿 노려보았다.
필체 조작은 오늘이 처음이라는 듯 연기하느라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오래 걸리는 작업인지, 이제야 추신 부분에 돌입한 상태였다.
나 대신 편지를 써 주고 있으니 오늘만 참는다는 심정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그, 그러니까···. 유, 서어누?”
갑자기 내가 본명을 밝힌 것만으로도 모자라, 명단을 술술 늘어놓은 탓일까?
제온이 몇 박자 늦게 반응하며 어눌한 발음으로 내 이름을 입에 담았다.
“선우요, 선. 우! 집사님은 발음 연습 좀 하셔야겠네요.”
내가 잡고 있던 손을 놓으며 발음을 지적하자, 제온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어색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입속말을 웅얼거렸다. 낯선 발음을 연습할 땐, 입을 크게 벌리고 또박또박 말해 봐야 할 텐데.
저래서야 언제쯤 내 이름을 똑바로 부를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다 썼습니다.”
세르펜스가 완성된 편지를 내게 내밀었다.
왜 내게 검사를 맡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줬으니 눈으로 한번 슥 훑어보았다.
제온이 이런 식으로 고치는 게 좋겠다고 표시해 둔 부분들이 제대로 적용되어 있었다.
“잘하셨네요. 집사님이 보기에는 어때요?”
나는 제온에게 편지를 넘기며 물었다.
대충 훑어보기만 한 나와는 달리, 그는 글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피며 두 번가량 정독했다.
그러는 동안 몇 번이나 ‘오···.’ 하는 탄성을 흘렸다.
“정말 작은 형의 필체랑 똑같네요. 그리고 수정하신 내용에서 적당히 소심함이 느껴지는 게, 이 정도면 부모님께서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겁니다.”
이 자식, 사실 시온을 싫어하는 게 아닐까?
소심함이 시온의 아이덴티티라도 되는 양 말하는 제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시온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나는 기억한다.
‘그냥 형제끼리 주고받는 흔한 디스일 뿐이겠지. 시온도 맨날 제온을 잔소리쟁이라 불렀던 것 같고···.’
제온은 각이 살짝 어긋나게 편지지를 접어, 세르펜스가 건넨 편지 봉투 안에 넣었다.
은근히 깐깐한 구석이 있는 제온이 귀찮아서 편지지를 대충 접은 건 아닐 테니, 그냥 시온의 버릇이겠지.
“짐들은 내일 보좌관님께서 방을 비우실 때 가져가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그럼 이제 나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가 제온을 붙잡으며 말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난 상태로 무슨 할 말이 남았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까 수첩을 꺼내 일정을 확인했던 걸 보면 아직 할 일도 남은 것 같던데.
나는 이 이상 제온의 시간을 뺏지 않기 위해 재빨리 궁금했던 점을 물어보았다.
“저 침대가 여기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주인님께서 결국 보좌관님께 물드셨구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가리킨 세르펜스의 침대를 보며, 제온이 탄식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이미지가 이상해진 건 세르펜스가 아닌 나였다.
아니, 원래 제온이 생각하는 내 이미지가 많이 이상했었나 보다.
나는 떨떠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반면에 세르펜스는 내게 물들었다는 제온의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턱을 5도가량 치켜들었다.
아주 그냥 자랑스러운가 보다.
“이제 나가 봐도 됩니까?”
“아, 예. 나가서 일 보세요.”
내 말이 떨어지자, 제온은 세르펜스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이며 평온한 밤 되시라는 인사말을 건넸다.
그렇게 제온은 세르펜스가 으스대고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눈치채지 못한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탁, 방문 닫히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뒤이어 아쉬움 가득한 세르펜스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선우의 이름은 나만의 것이었는데···. 아는 자가 또 늘어났군.”
“뭐라는 건지 모르겠네. 예나 지금이나 제 이름은 제 겁니다. 이상한 소리는 그쯤 하시고, 쓰다 만 편지나 꺼내세요.”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품 안에 넣어 두었던 종이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