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54)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55화(655/1105)
655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3)
– 툭.
마지막 온점을 찍는 그 순간.
투명한 무언가가 편지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기껏 쓴 글씨가 번졌다.
갑자기 아무런 전조 없이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은 후두둑 편지지를 때리고 또 적셨다.
‘전조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닌가···?’
리벨론 가로 보낼 편지를 쓰면서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이렇게 되리란 것을.
그래도 이력서를 겸한 성장 배경을 쓸 땐 그럭저럭 괜찮았으니까. 추억을 떠올리며 가끔 웃기도 했으니까.
‘그랬으니까, 고향의 언어로 옮겨 쓸 때까진 괜찮을 줄 알았는데···.’
편지는 단순히 기억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서.
대화와 마찬가지로 내 생각과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이라서.
입 밖으로 한 번도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만 품어왔던 그 말을 글로 옮기자마자, 둑이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속절없이 그리움이 터져 나왔다.
“선우···.”
계속 편지지를 내려다보고 있어야 할지. 아니면 편지지가 더 젖기 전에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봐야 할지.
그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내 상태를 알아챘다.
녀석은 손을 뻗어 내 앞에 놓인 편지지를 옆으로 치워냈다.
“괜찮···. 음. 안 괜찮네요.”
나는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려다,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바꿨다.
맞은편에서 ‘후우···.’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도 뒤이어 들렸다.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야 내에 청은빛의 무언가가 얼쩡거렸다.
고개를 숙인 채로 살짝 옆을 쳐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세르펜스가 쭈그려 앉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기들은 자신과 타인의 기분을 구분하지 못해서 옆에서 누가 울면 따라 운다던데.
세르펜스의 두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내게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은 건가?”
“······.”
이미 고개를 돌려놓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편지를 쓰다 보면 울지도 모른다고 예상했고, 세르펜스의 앞에서 운 적도 있다.
그래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녀석의 슬픈 눈을 마주하게 되니,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울상 짓는 세르펜스의 얼굴을 본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아마도 그 슬픈 표정 뒤에 자리 잡은 나를 향한 미안함 때문이리라.
“···그래, 그럴 만도 하지.”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씁쓸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머리통을 감싸는 손길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고개가 살짝 기울여지고 옆통수에 무언가 닿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선우가 싫어할 테니까.”
아랫쪽에서 들리던 세르펜스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정수리 가까이에서 들렸다.
저번에 리벨론 령에서 울었을 때, 나는 녀석에게 기댔다.
그것을 기억하고 이번에도 자신에게 기대도록 내 머리를 끌어당긴 걸 테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
평소처럼 대답해 주고 싶었지만, 좀처럼 대답할 수 없었다. 그 탓에 생각에서 끝나 버렸다.
그래도 세르펜스라면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우는 모습을 내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건 안다. 알고는 있지만···, 울고 있는 그대를 혼자 둘 수는 없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불러올까?”
위로라도 할 수 있게, 부디 자신의 앞에서 울어달라고 사정했던 녀석이.
대체 무슨 심정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유지스라면 금방 내 상황을 눈치채고 함께 울어줄지도 모른다.
윈스톤이라면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내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려 줄 테다.
에드나라면 우는 아이를 달래는 데 능숙하니 나를 잘 위로해 주겠지.
하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엉엉 울기에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들이 온다고 달라지는 게 없기도 하고.
세르펜스가 누군가를 불러오는 동안 혼자 있을 자신도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이 녀석만큼 나를 이해하며, 깊이 공감해 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없겠지.’
나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세르펜스의 옷소매를 붙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머리를 끌어안고 있던 녀석의 두 팔 중 하나가 어깨에 둘렸다.
“얼굴은 보지 않을 테니, 마음 편히 울어도 된다.”
세르펜스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토닥토닥. 일정한 박자로 어깨를 두드리는 녀석의 손길이 묘한 안정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상체를 돌려서 아예 녀석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을 잊게 할 만큼 너무 따스한 나머지, 문득 서러워졌다.
‘언제쯤이면 이 그리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5년이 지나고 10년이 흐르면. 가족들을 떠올리면서도 담담하게 웃을 수 있게 될 것인가.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당연하게도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겪어본 적 없는 일이니까.
‘이러다가 그리움이 더 커져 버리면 어떡하지?’
덜컥 겁이 났다.
물에 빠진 사람이 닥치는 대로 손을 뻗어 아무거나 붙잡고 늘어지듯. 나는 세르펜스를 간절히 붙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생각을 깊이 해 본 적은 처음이다.
돌아가지 못한다고 생각했을 땐 그냥 그 사실만으로도 무서웠다.
시온으로 살아가다가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다는 게. 그 삶 속에 ‘유선우’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본능적인 두려움을 일으켰더랬다.
가족들이 그립긴 했지만, 그보다 큰 두려움에 밀려났던 거다.
‘돌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유선우로서. 내 삶을 끝마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그런 두려움은 사라졌지만···.’
그 대신 억눌려있던 그리움이 슬금슬금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동안은 다른 일 때문에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외면해 왔지만, 계속 외면하기만 하면 나아질 수 없다.
‘그래서 용기를 내 본 건데···.’
이게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아무 생각 없이 펑펑 울고 싶은데 머릿속이 너무 복잡하다.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들이 어지러이 얽히고설켜서 도저히 풀어낼 수가 없다.
그래서 수많은 생각이 자꾸만 꼬리를 물고 계속해서 이어져,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렵다.
‘오늘은 그냥 세르펜스가 편지 쓰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고, 내 편지는 나중에 쓸 걸 그랬나? 내가 가족이 그립다고 울면, 세르펜스가 에일리히에게 편지를 쓰기 껄끄러워질 텐데···.’
뒤죽박죽이 된 생각은 이런 후회까지 불러일으켰다.
나는 방금 떠올린 생각을 세르펜스에게 들키지 않도록 얼굴을 꼭꼭 감췄다.
내가 가족을 못 본다고 해서 세르펜스까지 그렇게 만들고 싶지는 않다. 녀석은 가족과 잘 지냈으면 좋겠다.
모처럼 생긴, 가족다운 가족이니까.
자신의 타고난 본성이 추하다고 여기는 녀석의 생각을 바꾸는 게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얘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오늘 내로 편지를 다 쓰게 해야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더는 울 힘도 없어서 나오는 건 흐끅거리는 딸꾹질 소리뿐인데도.
이 품을 벗어나면 온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썰렁한 외로움이 들어찰까 봐.
나는 그 딸꾹질 소리마저 완전히 가라앉고 난 후에야 세르펜스를 놓아줄 수 있었다.
녀석도 울었는지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지간히도 정신이 없었나 보다. 세르펜스가 우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조금 충격적이다.
“···제가 얼마나 울었죠?”
“그런 건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시계를 보려고 하자, 눈물이나 닦으라는 듯. 세르펜스가 내 시야를 가리며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래놓고 본인은 고개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편지 그냥 내일까지 쓰는 거로 할까요?”
“으음···. 아니다. 쓸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세르펜스는 기한이 늘어났다며 안도하는 대신, 미리 약속했던 기한을 지키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그 이유야 뻔했다.
얼굴을 가리면 세르펜스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너무 순진했나 보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세르펜스다.
울음을 그친 내가 가장 먼저 무엇을 걱정할지 녀석은 알고 있었던 거다.
괜히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 세수하고 올게요.”
눈물 자국을 지워낼 겸, 열이 오른 눈가를 식힐 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대충 얼굴에 찬물을 대충 끼얹다시피 세수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을 땐, 시계가 사라져 있었다.
세르펜스 이 자식이 그새 치워버린 거다.
“혹시 이미 열두 시를 넘긴 건 아니겠죠?”
“그렇게 오래 울 수 있을 정도로, 본인의 체력이 좋다고 자신하나?”
“아닌 거 저도 알거든요?”
가볍게 장난을 던졌다가 뼈만 맞았다.
나는 툴툴거리며 의자에 앉았고, 세르펜스는 자신도 잠깐 씻고 오겠다며 욕실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몇 분이나 울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그딴 걸 알아서 뭐 하겠는가.
다음번에는 시간을 단축해 보자며 으쌰으쌰 도전 욕구를 불태울 것도 아니고.
‘하지만 세르펜스가 숨기려고 하니까 괜히 궁금해진단 말이지?’
나는 욕실 문이 잘 닫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냈···.
어째서인가 손끝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구멍이라도 난 걸까 싶어 손을 깊이 넣어봤다. 그러나 옷은 멀쩡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옷 이곳저곳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회중시계의 감촉은 그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찾나?”
딱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니건만.
갑자기 들려온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크게 들썩이고 말았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소리가 난 방향을 돌아보니, 내 회중시계를 손에 든 세르펜스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시계를 못 보게 하는 걸 보면, 제가 오래 울긴 했나 보네요.”
“울고 나서 시간부터 확인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고는 펜을 잡고 종이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선우가 바쁘다는 이유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치면 쉬어가자 말하고, 슬프면 울고, 기대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
이유라기보다는 핑계였는데, 앞으로 그런 핑계는 못 대겠다.
하지만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또 대답만 그리하고, 나중에 가서 괜찮은 척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말하며 세르펜스는 미심쩍다는 듯 눈을 흘겼다.
아무래도 내가 이런 방면으로는 완전히 신임을 잃었나 보다.
“아니, 근데요. 제가 진짜 괜찮은 척하려고 그런 게 아니라···.”
“변명은 듣지 않겠다.”
“넵.”
나는 그냥 닥치기로 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지 말라며, 주머니 속 회중시계를 훔쳐 가는 퍼포먼스를 선보인 녀석에게 무슨 변명을 하겠는가.
하려고 했다가 사전 차단당한 거지만. 그냥 그런 거로 치자.
괜히 변명을 늘어 놔 봤자, 하나하나 논파 당하며 패배의 쓴맛밖에 더 보겠는가.
차라리 그 시간에 잃어버린 신임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게 낫다.
“편지지 한 장 더 주세요. 방금 쓴 편지, 제 고향의 언어로 다시 쓰고 싶어요.”
처음부터 내가 이럴 작정이었다는 것도 모르고.
세르펜스가 눈을 크게 뜨고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 허둥지둥 아공간 주머니에서 편지지 세트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양손으로 매우 공손히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