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5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57화(657/1105)
657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5)
나는 시선을 다음 줄로 옮겼다.
에일리히에 관해 더 알고 싶다는 내용이 쓰여있었다.
그리고 자신에 관해 궁금한 점이 있다면 물어봐도 괜찮다는 얘기로 이어졌다.
하지만 세르펜스 본인도 자기 자신을 완벽히 아는 건 아닌지라.
종종 답변하지 못할 때도 있을 거라며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했다.
‘에일리히 님이 알아줬으면 하는 자신의 얘기를 전하라고는 했지만, 이런 내용을 적을 줄은 몰랐는데···.’
기껏해야 좋아하는 간식이라든가.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흥미가 있다든가.
혹은 가장 친한 친구···는 너무 뻔하니까 안 쓸 만도 했고.
아무튼 그런 가벼운 얘기를 쓰지 않을까 예상했다.
‘어쩐지 많이도 고쳐 쓰더라니.’
내 예상과 달리 편지에 담긴 내용은 무겁고 진지했다.
세르펜스가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가족이 알아줬으면 하는 것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거나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꼽았다는 게.
아파서 미안하다는 듯 양해를 부탁한다는 게.
‘나는 가족들에게 처음 쓴 편지에 뭐라고 썼더라···?’
그때가 아마 일곱 살 즈음이었을 거다.
워낙 어릴 적 일이라, 그것을 썼을 당시의 기억은 없다.
그래도 부모님께서 편지를 클리어 파일에 넣어서 잘 보관해두신 덕분에, 성인이 된 후 그것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다.
분명 어버이날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쓰는 편지였음에도, 새 장난감을 사달라는 내용으로 끝이 났다.
나는 들고 있던 편지로 얼굴에 번진 씁쓸함을 가리고, 맨 마지막 줄에 적힌 글자를 확인했다.
[ 당신의 조카, 세르펜스 올림. ]그냥 사실 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왕이면 ‘당신의’와 ‘조카’ 사이에 몇 글자가 더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가령 ‘하나뿐인’이라거나 ‘소중한’이라거나 ‘귀여운’이라거나.
‘하지만 세르펜스가 당신이라고 부르는 대상을 떠올려 보면···.’
나쁘지 않았다.
아르케 왕국에서 세르펜스가 ‘저도 백부님의 조카’라고 주장했던 게 떠올라, 살짝 웃기기도 하고.
녀석이 에일리히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는 게,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수고하셨어요. 정말 잘. 그리고 열심히 쓰셨네요.”
내가 편지지를 돌려주며 칭찬의 말을 건네자,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기뻐하며 밝게 미소 지었다.
나도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제가 쓴 편지 돌려주세요.”
“으음, 물론 그래야겠지.”
세르펜스가 뭉그적거리며, 손에 들린 두 장의 편지지를 아주 느릿한 동작으로 내밀었다.
그러면서 미련 가득한 시선으로 편지지 내용을 몇 번이고 빠르게 훑었다.
마치 시험 시작 직전.
책상 위를 치우라는 선생님 말씀에도, 최후의 최후까지 암기 노트를 붙들고 벼락치기 하려는 학생의 모습이다.
“저 앞으로도 주기적으로 가족들에게 편지 쓸 건데, 세르펜스가 제 가족들 대신 읽어줄래요?”
“내가···, 선우의 가족, 대신···?”
세르펜스가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녀석이 자신의 감정에 당황하는 사이, 나는 녀석의 손에 들린 편지지를 잽싸게 가로챘다.
“싫음 말고요.”
“아, 아니다. 최선을 다하겠다.”
“그냥 글 몇 줄 읽는 건데, 최선을 다하고 말고가 뭐 있습니까? 그보다 제 회중시계나 돌려주세요. 원래 방에 있던 시계도 돌려놓으시고.”
손을 내밀며 그리 말하자, 손바닥 위에 곧바로 회중시계가 올려졌다.
뚜껑을 열어 보니 시곗바늘은 12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욕실에서 물기를 닦고 나오느라 걸린 시간을 고려하면, 세르펜스는 아슬아슬하게 12시 직전에 편지를 완성한 모양이다.
“선우, 지금이 몇 시지?”
“12시 10분이요.”
마침 시계를 보고 있었기에, 세르펜스의 질문에 바로 대답해줄 수 있었다.
녀석은 아공간 주머니에 들어간 탓에 잠시 멈췄던 시계를 다시 맞추고, 벽에 걸어놓은 후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쓴 편지를 깔끔하게 접어 편지 봉투에 넣었다.
“가족에게 손수 전달하는 편지도 봉투에 이름을 쓰고 봉랍해야 하나···?”
“봉랍은 자유긴 한데, 봉투에 이름 정도는 쓰는 게 좋겠죠?”
세르펜스의 질문에 대답해주다 보니, 편지 봉투까지는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나는 어떻게 할까?’
각기 다른 두 언어로 적힌 두 장의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고민은 짧았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지는 두 장이었으니까.
이곳의 문자로 적은 건 그냥 편지 봉투에 넣어뒀다가 가끔 생각나면 꺼내 읽고. 내가 살던 세상의 문자로 적은 건 봉해 둬야겠다.
“세르펜스, 풀···이 아니라. 그, 뭐냐 왁스랑 스탬프 좀 빌려주세요.”
내 의도를 알아챘는지 세르펜스가 잠시간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놓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조용히 아공간 주머니에서 실링 스탬프 세트를 꺼냈다.
“편지를 보내는 기분을 내려고 그럽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가 뭐래요? 저는 그냥 말한 겁니다.”
세르펜스가 꺼낸 물건들을 테이블 위에 배치하고 촛불을 붙이는 동안.
나는 두 장의 편지지를 두 개의 편지 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왼쪽 상단에 받는 사람. 즉, 가족들의 이름을 쭉 나열한 후. 오른쪽 하단에 보내는 사람인 내 이름을 적었다.
진짜 편지를 보내는 느낌이 들어 가족들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 이름만 홀로 동떨어져 있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진짜 멀구나.’ 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선우···.”
“그냥 현실을 직시한 것뿐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겨내기 위해서는 직시하는 게 우선이라잖습니까?”
“그래도 너무 자신을 몰아가지는 말아라.”
오늘따라 세르펜스가 기특한 말을 많이 했다.
그만큼 내가 오늘 약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는 하나의 방증이다.
그래도 예전처럼 무조건 덮어놓고 숨겨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어른들이 지레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어린아이들은 현명하다.
어린아이가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을 하게끔, 하소연을 늘어놓는 것도 일종의 정신적 학대에 속하겠지만.
반대로 말을 하지 않아서 걱정하게 만드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처사다.
‘세르펜스가 어리긴 해도, 누군가를 위로해 줄 수 있을 정도로 속이 깊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녀석이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녀석이 죄책감을 느끼는 게 싫어서.
그 사실을 계속 외면하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면 행동할수록, 세르펜스의 죄책감과 무력감이 커진다는 사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거다.
“또 내 걱정하나?”
세르펜스가 내 생각을 알아차리고 말을 붙여 왔다.
하여간 귀신이 따로 없다.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는 운명 공동체로 묶여있잖아요? 그러니까 제 걱정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르펜스의 걱정도 하게 되고. 뭐, 그런 겁니다.”
“그렇군···!”
세르펜스가 눈을 반짝였다.
예전에 ‘쏠메’라는 말을 듣고 좋아하길래 혹시나 싶어 던져봤더니 역시나였다. 운명이니 영혼의 단짝이니 하는 표현에 약한 게 분명하다.
‘만약 녀석이 내가 살던 곳에서 태어났다면, 허구한 날 사주팔자나 타로점을 보러 돌아다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내가 녀석을 구워삶으려고, 우리가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다.
다만 그 공동체가 ‘악숭이를 제외한 대륙의 모든 이들’을 포괄적으로 담아낼 뿐.
‘이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 거니까. 악숭이들을 몰아내고 세계 평화를 이룩해야지!’
귀신처럼 예리한 세르펜스도 이번에는 내 생각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운명 공동체라는 달콤한 말이 녀석의 시야를 흐려놓은 탓이다.
천하의 프라시더스 공작이 이토록 단순한 녀석이란 사실은 마왕도 모르겠지.
헤실헤실 웃으며 좋아하는 세르펜스는 저대로 놔두고, 내 할 일이나 해야겠다.
멜팅 스푼을 초 위에 올리고 스틱 형태로 된 왁스를 녹여냈다.
‘옛날 서양 배경의 영화 같은 데서 편지 봉랍하는 장면을 보고, 나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오늘 그 로망을 실현하게 되었다.
나는 녹여낸 왁스를 편지 봉투에 조심스럽게 붓고, 프라시더스 가문 인장이 새겨진 스탬프를 꾹 눌렀다.
이상하다. 분명 오늘 처음 해 보는 건데.
오목한 국자 같은 것에 고체를 녹여 적당히 점도 있는 액체를 만들어 붓고, 무언가로 꾹 눌러 모양을 새기는 일련의 과정이 묘하게 익숙하다.
“이건···, 달고나?”
어렸을 적.
누나와 함께 집에서 달고나를 만들다가, 국자를 태워 먹었던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로망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달고나? 그건 뭐지?”
“제가 살던 세상의 간식인데, 설탕을 녹여서···. 아, 그냥 내일 다 같이 만들어 볼까요?”
갑자기 떠올라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아이와 함께 간식을 만드는 건 매우 훌륭한 학습 놀이다.
이제야 막 자신이 먹을 디저트를 고를 수 있게 된 세르펜스에겐, 특히나 좋은 경험이 될 테다.
“선우가 살던 세상의 간식을, 직접 만들어···?”
세르펜스가 감격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는지 얼굴까지 발갛게 물들었다.
그냥 달고나만으로는 녀석의 기대감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할 것 같다.
기왕에 하는 거 쿠키 커터도 빌려, 다양한 모양을 찍어서 뽑기도 하면 재밌겠다.
“자, 자. 내일 대련도 하고 간식도 직접 만들어 먹으려면, 빨리 씻고 자야겠죠?”
“그럼 바로 씻고 오겠다.”
“아뇨, 올 필요 없어요. 저기 있는 침대도 챙겨가세요.”
“······!”
방금까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세르펜스가 청천벽력의 비보라도 들은 양. 낯빛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눈을 크게 떴다.
그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 이제···, 나와 함께 자 주지 않는 건가···? 어, 어째서? 편지에도 나와 같이 자서 좋다고 썼으면서···. 간식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내가 많이 자랐기 때문인가? 그, 그런 이유라면, 간식 같은 거 안 만들어 먹어도 되니까···. 부디 나를 쫓아내지 말아다오.”
아무래도 얘가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다.
간절하다 못해 절박하게 사정하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대역 죄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그런 거 아닙니다. 여기보다 세르펜스 방이 더 넓잖아요? 그리고 이제까지는 매일 제 방에서 잤으니까, 앞으로는 세르펜스의 방에서 자자는 얘기를 하려 했습니다. 뭐, 세르펜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절대 싫지 않다. 그 정도가 아니라 매우 좋다.”
세르펜스가 몹시 단호하게 말했다.
내가 ‘미트볼 토마토 리조또’에서 ‘미트볼’을 빼먹고 말했을 때. 그것을 정정하며 지었던 표정만큼이나 단호하고 박력이 넘쳤다.
“그럼 빨리 챙길 거 챙기지 않고 뭐 합니까?”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르펜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자신의 물품들을 치웠다.
그러고는 튕기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를 아공간 주머니에 담았다. 자신의 것뿐만 아니라 내 것까지.
그러고는 빨리 자기 방으로 가자는 듯, 눈을 빛내며 방문 손잡이를 잡고 나를 기다렸다.
그 모습에 ‘푸핫!’ 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보채지 않아도 갑니다, 가요.”
나는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두 개의 편지 봉투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