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60)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61화(661/1105)
661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29)
* * *
점심 식사를 마친 후.
에일리히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가주 대리로서 가문의 일을 하러 집무실로 향했다.
알타르도 그를 따라갔다. 도와주려는 건 아니고 가만히 앉아서 쉴 거라고 했다.
얄밉기 그지없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행동이다.
아무리 에일리히와 친하다고 한들 알타르는 외부인이다. 가문의 중요한 서류를 함부로 보여줄 수는 없다.
고로 알타르는 전 직장 선배가 업무에 치이는 동안, 합법적으로 게으름 피우는 게 가능해졌다.
그리고 본래 공작가의 업무를 봐야 하는 사람.
진짜 가주인 세르펜스는 나와 함께 5층에 있는 방으로 올라왔다.
“백부님께서 내 일을 대신해 주시고 계시는데, 정말 쉬어도 되는 건가···?”
내게 떠밀려 반강제로 침대에 눕혀진 세르펜스가 소심하게 질문했다.
에일리히 혼자 일하게 두고, 본인은 낮잠을 잔다는 게 몹시 미안한가 보다.
나는 괜찮다는 의미로 이불을 녀석의 목까지 끌어올린 뒤 가슴께를 토닥였다.
“당연히 되고 말고요. 에일리히 님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서류 작업 같은 머리 아픈 일은 어른에게 맡기고, 세르펜스는 아이답게 낮잠이나 자면 됩니다.”
“그래도···.”
“정 신경이 쓰인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요?”
“이렇게라니, 어떻게 말인가?”
내가 가볍게 운을 떼자 세르펜스가 바로 관심을 보였다.
“세르펜스는 한창 뛰어놀 나이인 열다섯 살에 공작가를 혼자 이끌어 왔잖습니까? 지금 해야 할 일을 그때 미리 당겨서 했다 쳐요.”
“선우가 살던 세상에서 열다섯은 뛰어놀 나이인가?”
세르펜스가 이런 질문을 던진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도 열다섯은 어린 나이였지만, 마냥 어린아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 집안의 후계자라면 가문의 일을 하나둘 맡아서 처리해 보며 경험을 쌓아가야 하고.
평민이라면 가업을 잇기 위해 부모님 밑에서 일을 차근차근 배워나갈 나이였다.
“제가 살던 세상에서는 장래를 위해 학업에 열중할 나이죠.”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기만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다.
미래를 꿈꾸며 자신의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나이다.
“그래도 충분한 휴식이 보장되어야 할 나이입니다. 아직 성장기니까요. 실제로 제가 그 나이 땐, 점심시간마다 운동장에서 친구들이랑 뛰어놀았습니다.”
“그렇군.”
“딴 세상 얘기를 듣는다는 듯한 표정 짓지 마세요.”
“···다른 세상 얘기, 맞지 않나?”
세르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확실히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들릴 만도 했다. 인정한다.
하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따로 있었기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열다섯 살이 성장기라는 건 이쪽 세상도 마찬가지잖아요. 육체와 정신이 자라는 중이니까, 어른의 보호를 받으며 이것저것 배워나가야 할 시기라는 건 똑같습니다. 슬슬 자신의 행동을 책임질 줄 알아야 하지만, 자기 자신 이외에 다른 누군가를 책임지기에는 너무 어려요.”
세르펜스가 열다섯의 나이에 짊어진 책임과 업무량은 성인조차 버거워할 수준이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성인 몇 명이 달려들어서 해야 할 일을 혼자 떠안았다.
다 큰 성인도 일을 그렇게 시키면 고용노동부에 신고해야 한다.
“그때 고생도 하고, 많은 책임을 짊어졌으니.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쉬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냥 다른 사람이 아니고 집안의 어른이죠. 그 시기의 세르펜스를 돌봐 줘야 했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던.”
“즉···. 백부님을 위해서라도 그분께 일을 맡기고 쉬어야 한다는 건가?”
“바로 그겁니다! 세르펜스는 쉴 수 있어서 좋고, 에일리히 님은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어서 좋고!”
“으음···.”
분명 내 얘기를 제대로 이해를 한 것 같은데 대체 뭘 고민하는 건지 모르겠다.
반박할 말이 있으면 어디 해 보라는 시선을 보내자, 세르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선우의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지금 꼭 낮잠을 자야 하는 건가? 그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
“세르펜스는 두 명을 상대로 혼자 싸웠으니까, 두 배로 지쳤을 거 아닙니까? 게다가 간식 먹고 또 대련할 거라면서요?”
“내가 체력 배분도 안 했을 것 같나?”
서운하다는 듯 세르펜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혹시 힘들면서 안 힘들다고 우기는 건 아닐까, 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두 눈동자는 초롱초롱 반짝였고 눈 밑 피부는 맑고 투명했으며, 미간도 찌푸려지지 않고 평평했다.
‘대련을 끝낸 직후에는 살짝 지쳤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또 괜찮아 보였다.
아까는 그냥 몇 시간 동안 쉼 없이 움직이고 난 직후라서 그랬나 보다.
“그럼 세르펜스는 지금 뭘 하고 싶은데요?”
“아까의 대련을 복기해 보고 싶다.”
“그런 거면 진작 말씀하시지!”
나는 세르펜스에게 덮어줬던 이불을 치우고 양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르펜스는 멀뚱멀뚱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내 손을 붙잡았다.
“영~차!”
녀석의 팔을 끌어당기어 일으켜 앉혔다.
구령을 붙이긴 했으나 별로 힘들진 않았다. 내 의도를 알아챈 세르펜스가 코어 근육에 힘을 줘서 자력으로 일어난 덕분이다.
세르펜스가 방금 뭘 한 거냐는 시선을 보냈다.
“저는 가끔 부모님이나 누나한테 일으켜 달라고 손 내밀곤 했거든요.”
“혹시 몸이 많이 약했나?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일어나기 힘들 정도로?”
“아뇨, 건강했는데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냥 어리광 부린 거죠, 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르펜스가 도로 누웠다.
이번엔 힘주지 않을 테니까 다시 일으켜 달라는 거다.
나는 아까보다 더 많은 힘을 써서 세르펜스를 일으켜 앉혔다.
반대로 힘 하나 안 들이고 일어나 앉게 된 세르펜스가 배시시 웃음을 흘렸다. 재밌었나 보다.
고작 이 정도로 즐거워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선우는 남는 시간 동안 뭘 할 생각이지?”
“에일리히 님께 서류 받아와서 일하려고요.”
“···뭐?”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세르펜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때 돌연 몸이 앞으로 쏠렸다. 세르펜스가 잡아당긴 탓이다. 반사적으로 ‘으악!’ 하는 비명이 튀어나오긴 했으나 아프지는 않았다.
폭신한 침대에 풀썩 걸터앉자, 세르펜스의 손이 바로 이마에 얹혔다.
“이상하군. 열은 없는데···.”
진심으로 걱정하는 세르펜스의 표정을 마주하니,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뭘 착각한 건지 녀석의 얼굴이 한층 더 심각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신성력을 쓰게 해 다오.”
“저는 멀쩡합니다.”
“아니, 선우는 지금 아픈 게 틀림없다.”
세르펜스가 단호하게 말하며, 기어이 내게 신성력을 들이부었다.
그러고 나서 하는 소리가 아주 가관이다.
“아직도 일을 하고 싶은가?”
세상에 일하고 싶은 욕구가 솟아나는 병이 어딨다고.
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의문스럽다.
“세르펜스. 대련은 오늘만 하는 게 아니라, 저택에서 머무르는 동안 매일 할 거죠?”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할 생각이다.”
“대련 상대는 에일리히 님과 알타르 님. 두 분이고요.”
“으음···. 백부님께서 일하실 시간이 줄어들 테니, 도와주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원래 제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는 겁니다. 제가 세르펜스의 보좌관이라는 사실을 잊으신 거 아니죠?”
나는 이마에 얹어진 세르펜스의 손을 치워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허리에 얹어 위풍당당한 포즈를 취했다.
그런데도 세르펜스는 나를 우러러보기는커녕, 한 입으로 두말 하는 어른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냈다.
“나한테는 쉬라더니···.”
“세르펜스도 쉬는 거 아니잖아요. 대련 내용을 복기할 거라면서요? 세르펜스가 향상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데, 어떻게 제가 아무것도 안 하고 탱자탱자 놀 수 있겠어요?”
“내 눈치 보지 말고 쉬어도 괜찮다.”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세르펜스가 열심히 수련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려는 겁니다. 에일리히 님께서 처리하실 서류 양이 줄어들면, 남는 시간에 휴식을 취하든 세르펜스처럼 대련을 복기하며 실력을 키우든 하시겠죠. 그럼 덩달아 대련의 효율도 좋아질 거 아닙니까?”
나는 말을 다다다 쏟아낸 후, 이제 내 큰 뜻을 알겠냐는 의미를 담아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세르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매우 감격했다는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일하기 싫어서 업무시간에 딴짓하던 선우가, 나를 위해 자진해서 일을 하다니···.”
은퇴한 사용인들이 실종되었을 때도 자진해서 일을 떠맡았었는데.
이번이 두 번째인데도 저렇게 반응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내가 일하기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나 보다.
“네, 맞아요. 에일리히 님이 아니라, 세르펜스를 위해 일하려는 겁니다. 왜냐? 저는 세르펜스의 보호자이자 보좌관이니까!”
내 말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세르펜스가 무척이나 기뻐하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심지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서 서류를 가지러 가자며 앞장서기까지 했다.
‘혼자 다녀오거나, 제온을 호출해서 가져다 달라고 해도 되는데···.’
그래도 녀석이 저리 기뻐하는데 초를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려간 김에 세르펜스는 응접실로 보내놓고, 나는 오랜만에 내 자리에 앉아 서류를 처리해야겠다.
‘분명 그리할 생각이었는데···.’
내가 세르펜스의 분리 불안을 너무 얕보았나 보다.
세르펜스는 의자를 하나 가져와 정자세로 앉아, 일하는 내 옆에서 명상에 잠겼다.
‘응접실의 푹신한 소파를 놔두고,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반면에 알타르는 나와 세르펜스가 오자마자, 소파가 있는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보다 강한 세르펜스가 왔으니 에일리히를 밀착 경호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 하는 틈틈이 조카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에일리히 님이 좋아하시니까 그냥 놔두자.’
나는 세르펜스를 관상용 나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며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공작가의 업무를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 잠깐 헤매긴 했지만, 다행히도 금방 적응이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류와 싸워나갔을까.
“그런데 오늘 간식은 직접 만들어 먹을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조용히 눈 감고 앉아있던 세르펜스가 툭 질문을 던졌다.
에일리히의 시선이 자동으로 이쪽을 향했다.
필요한 재료와 도구는 진작 종이에 적어 제온에게 전달했고, 세르펜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니 재료 준비 때문에 걱정하는 건 아닐 테고.
‘3시에 바로 간식을 먹으려면 미리 만들어 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뜻으로 말한 거겠지.’
기대하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또 확인하게 되니 웃음을 참기가 힘들다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엎드려 웃기만 하자, 세르펜스가 내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빨리 대답해 달라는 뜻이다.
“금방 만들 수 있는 거라서, 만들어가며 먹을 겁니다.”
“그렇군.”
세르펜스가 다시 눈을 감았다.
에일리히의 시선도 다시 책상 위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