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6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69화(669/1105)
669회
75. 공작님과 백부님 (37)
* * *
일정을 마치고 내 방 욕실에 들어서자 못 보던 작은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저녁, 나는 세르펜스의 눈을 피해 욕실에서 쪽지를 하나 썼다.
그리고 오늘 오전 제온에게 달고나 도구 도안을 넘겨주면서, 그 사이에 쪽지를 끼워 넣어 건넸다.
‘세르펜스의 생일 선물로 줄, 꽃 화분을 하나 준비해 달라고 말이지.’
방 안에 인테리어로 둘 수 있으면서, 세르펜스가 가지고 다니려 하지 않을.
아니, 그렇다기보다는 가지고 다닐 수 없는 건 뭐가 있을까 곰곰이 고민해 보았다.
세르펜스가 나갔다 돌아왔을 때.
자신의 방을 반갑고 편안한 공간으로 느낄 수 있으면 해서 준비한 선물인데, 가지고 다니면 의미가 없으니까.
그 고민한 끝에 나온 결론이 바로 ‘꽃 화분’이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을 수 없으니, 세르펜스도 화분을 가지고 다니겠다는 억지는 부리지 못하리라.
곧 있으면 저택을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게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녀석 대신 화분을 돌봐 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작저에 널리고 널렸다.
‘유지스가 선물한 고양이 조각상을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가, 저택에 돌아온 후 서재에 되돌려 놓는 장면만 안 봤어도···.’
그 탓에 고를 수 있는 선물에 제약이 생기긴 했지만, 꽤 괜찮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물을 기르는 건 아이의 정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니까.
그리고 기왕 식물을 선물해 줄 거면 꽃이 자주 피는 게 좋겠다 싶었다.
지금이 겨울인데도 꽃이 피어있는 걸 보면, 제온이 내 요구 사항을 잘 반영해 준 듯하다.
‘제온이 직접 고른 건 아니고, 요구 사항을 전달받은 꽃집 사장이 추천해 준 걸 테지만···.’
나는 화분 옆에 놓인 쪽지를 읽기 전에 화분부터 자세히 살펴보았다.
풍성한 초록 잎사귀 사이로 군데군데 피어난 파란 꽃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새하얀 수술을 중심으로 꽃잎의 안쪽도 흰색이었는데, 그 덕분에 멀리서 보면 파란 꽃 속에 앙증맞은 하얀 꽃이 겹으로 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방에 두면 예쁘겠네! 생기도 느껴지고!’
나는 만족감을 느끼며 쪽지를 펼쳐 보았다.
그곳에는 ‘블루 데이즈’라는 꽃 이름과 관리 방법에 대해 적혀 있었다.
물도 자주 줘야 하고, 겨울에는 순 따기도 틈틈이 해 줘야 한다는 모양이다.
온도 관리만 잘하면 사계절 내내 꽃을 볼 수 있는 대신, 시든 꽃은 바로바로 정리해 줘야 하고···.
‘이거, 엄청 손이 많이 가겠는데?’
세르펜스의 생일 파티를 열기 전까지는 내가 관리해야 하는데,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벌써 불안해졌다.
생일 선물이라고 분명히 적어 뒀건만.
화분을 왜 이렇게 빨리 사 온 걸까, 죄 없는 제온이 원망스러워졌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먼저 관리 요령을 익혀두면, 세르펜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잖아?’
나는 마음을 다잡고 일단 화분을 옮기기로 했다.
햇빛을 잘 봐야 하는 품종이라고 하니 창가 쪽에 두는 게 좋겠지.
예전이라면 세르펜스가 내 방으로 자러 올 테니 턱도 없는 일이지만, 이제는 내가 녀석의 방으로 자러 가니까.
녀석이 내 방에 올 일이 없어져서 들킬 리는 없을 거다.
화분을 창가에 두고 다시 욕실로 돌아와 씻고 있는데, 문득 의문이 하나 떠올랐다.
‘카네이션은 아직도 못 구한 건가?’
세르펜스가 제온에게 카네이션을 구해오라고 한 건 그저께다.
그러니 아직 별 얘기가 없어도, 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구해 달라고 한 꽃 화분은 당일 도착이라니, 뭔가 이상하다.
세르펜스가 최대한 빨리 준비해 달라고 말했으니, 제온이 늦장을 부리고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이 세상에서는 카네이션의 수요가 없나? 그래서 공급량도 얼마 안 되어서 구하기 어려운 건가?’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더군다나 카네이션은 현재 개화 시기도 아니고, 반면에 블루 데이즈는 사시사철 예쁜 꽃이 핀다.
‘후자가 구하기 쉬운 게 당연하겠지.’
나는 카네이션에 관한 의문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세르펜스의 방에 도착하니, 빈 종이와 씨름하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에일리히 님께 드릴 답장을 쓰고 있었나 보네.’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돌돌 말아 어깨에 척 얹어 놓고 종이를 들여다보는 꼴이란.
세르펜스와 처음으로 함께 기차를 탔을 때가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래서 그때와 똑같이 녀석의 뒤에 서서 머리를 말려 주었다.
“날도 추운데, 본인 머리부터 말리는 게 낫지 않겠는가?”
“춥기는요, 누가 벽난로에 장작을 잔뜩 넣어 놔서 따뜻하기만 한데.”
“그래도 앉아라. 오늘은 가족들에게 보낼 편지를 쓸 계획이라고 자기 입으로 말했잖은가. 그래 놓고 내 머리카락을 말려주느라 시간이 다 가서, 다음으로 미룰 생각은 아니겠지?”
“그런 거 아니거든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녀석의 머리에 수건을 씌워놓고 마구 문질 문질 비벼댄 뒤 손을 뗐다.
자리에 앉으니 세르펜스가 펜과 편지지 두 장을 내밀었다.
“오늘은 무슨 내용을 쓸 생각이지?”
“저번에 친구 소개를 다 못 끝냈잖아요. 그거마저 쓰려고요.”
“그다음에는?”
“그건 그때 가 봐야죠. 그러는 세르펜스는 오늘 편지에 무슨 내용을 쓰려고요?”
“음···.”
질문을 받은 세르펜스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아무래도 떠오르는 게 없어서, 내 편지 아이디어를 참고할 생각이었나 보다.
“에일리히 님의 답장은 무슨 내용이었는데요?”
“직접 읽어 보겠는가?”
“아뇨, 그건 예의가 아니죠.”
“백부님께서도 선우가 읽는 것쯤은 염두에 두고 계실 거다.”
“그걸 왜 염두에 둡니까?!”
얘도 그렇고, 에일리히도 그렇고. 대체 언제까지 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주고받을 생각인 건지 모르겠다.
앞으로 두 프라시더스가 주고받는 편지는 절대 읽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휴마누스와 주고받은 편지는 다 읽었으면서···.”
“그쪽은 공적인 일도 겸한 내용이었잖아요. 반면에 에일리히 님께서 세르펜스에게 보낸 편지는 철저하게 사적인 내용이고.”
“백부님께서 편지에 무슨 내용을 쓰셨고, 내가 뭐라고 답장할지. 선우는 궁금하지도 않는가?”
세르펜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날 떠보듯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무진장 궁금했다. 그리고 걱정스럽기도 했다.
‘둘 다 자존감이 낮아서, 툭하면 삽질을 해대니까···.’
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끄응 앓는 소리를 흘리자, 세르펜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웃음 지었다.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직접 읽지는 않고, 세르펜스에게 대충 듣기만 할래요.”
“뭐가 다른 거지?”
“어떠한 내용의 편지를 받았는데 답장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고 상담하는 것. 그리고 편지를 읽어 보라고 내어 주는 건 완전히 다릅니다. 세르펜스가 에일리히 님께 보낸 편지를 알타르 님이 읽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싫다.”
“거 봐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세르펜스는 슬그머니 꺼냈던 에일리히의 편지를 도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대략적인 내용을 얘기했다.
부족한 사람이 어쩌고 하며 자책하는 부분은 넘기고 본론만 간단히.
“진짜로 편지 내용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쓰셨구나···.”
나는 아연하여 혀를 내둘렀다. 정말 뭐라 할 말이 없다.
특히 경전의 교리 중 좋아하는 구절은 대체 왜 쓴 건지 의문이다.
세르펜스와 신학 토론이라도 벌이고 싶으셨나?
“그래서 나도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어볼까 하는데···.”
“···얘기는 잘 통하겠네요.”
“선우도 그렇게 생각하나?!”
내 비꼬는 말에 세르펜스가 눈을 반짝이며 좋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끈지끈 골이 울리는 것 같다.
“그 내용을 적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게 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편지의 중심은 세르펜스의 생각이나 경험 등.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어야 합니다!”
“선우는 저번에 이어서 이번까지 친구 소개로 편지를 채운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편지를 쓰다 보면 친한 사람 이름이 언급될 텐데, 그때마다 얘가 누구라고 설명하면 본론이 흐려지잖아요? 그러니 미리 등장인물 소개를 쭉 적어 놓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입니다.”
“그것도 그렇군···!”
세르펜스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펜을 들어 올렸다.
“에일리히 님께서는 세르펜스의 주변인을 전부 알고 계시니까, 굳이 편지에 적을 필요는 없습니다.”
“······.”
“날로 먹을 생각 하지 말고, 제대로 고민해 보세요.”
세르펜스가 좋다 말았다는 표정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런 녀석을 내버려 두고, 가족들에게 보낼 수 없는 편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편지지에 다섯 줄가량 채웠을 때.
드디어 세르펜스가 고민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좋아하게 된 계기에 관한 건?”
“그건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도 읽고 싶습니다!”
“안 읽는다고 하지 않았나?”
“에일리히 님이 쓰신 편지를 안 읽겠다고 했지, 세르펜스가 쓴 걸 안 읽겠다고는 안 했습니다.”
“선우의 표정에서 둘 다 읽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느꼈는데···.”
“제 의지는 아주 말랑해서 유연성이 뛰어나거든요. 얼마든지 굽힐 수 있습니다.”
“······.”
내 말에 세르펜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에일리히에게 편지를 보내기 전 내게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다 쓰고 나면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주제가 잡히고 두 번째로 쓰는 편지라서 그런가?
세르펜스는 지난번 편지를 썼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초고를 완성했다.
그동안 나는 두 개의 언어로 편지를 써 놓고도 시간이 남아, 세르펜스의 머리를 마저 말려주었다.
세르펜스는 자신의 편지를 내 자리에 갖다 놓고, 내가 쓴 편지 두 장을 자신의 앞에 나란히 펼쳐놓고 비교해가며 읽었다.
나도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녀석이 쓴 편지를 읽었다.
녀석이 가장 먼저 내게 마음을 열게 된 계기를 쓸 거라고는 예상했었다.
하지만 처음 기차를 탔던 날이 아니라, 쿠키를 건네준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줄은 몰랐다.
처음으로 단 것을 접했을 때의 감상.
서서히 그것에 빠져들어, 저도 모르게 간식 시간을 기다리며 난생처음 느낀 설렘.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간 보아온 이 녀석의 성격을 생각하면, 마냥 즐겁지는 않았을 텐데···.’
속으로는 나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함이라는 변명을 끊임없이 늘어놓으며, 불안함을 느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 뒤로는 기차에서 내가 혼자 희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 그리고 그날 먹었던 미트볼 토마토 리조또에 관한 얘기가 이어졌다.
그 후에는 프라시더스 령에서 암행을 다니며 이것저것 군것질했던 내용이.
그다음에는 내가 한스와 말다툼을 벌인 사건이···.
‘에일리히 님께서 슬퍼하시거나 자책할만한 요소는 적당히 건너 뛰어가며 쓴 것 같기는 한데···.’
어째 편지의 절반이 넘어가도록 내 얘기뿐이다.
나는 바로 마지막 줄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자리가 없으니, 다른 사람들에 관한 얘기는 다음 편지에서 쓰겠다는 글이 적혀있었다.
“어째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 거지? 선우도 저번 편지에서 미처 소개하지 못한 친구들에 관한 건, 다음 편지에 적겠다고 했잖은가.”
“전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많이 찔렸나 봐요?”
“이것도 많이 생략한 거다. 마음 같아서는 모두 적고 싶었다. 전부 소중한 추억이니까.”
세르펜스가 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냐고 시위라도 하듯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쓴 편지를 읽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으니, 기분이 상할 만도 하다.
나는 밝게 웃으며 녀석을 칭찬해 주었다.
“그 마음 알죠. 저한테도 전부 소중한 추억이니까.”
“정말로?”
“물론이죠! 아, 그건 그렇고 편지 잘 쓰셨네요. 에일리히 님께서 이 편지를 읽으면, 세르펜스에 대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되실 겁니다.”
“그렇겠지. 선우, 그대와 함께한 시간이야말로 현재의 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니까.”
세르펜스가 행복하다는 듯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녀석의 입을 통해 들으니 괜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이게 바로 아이에게서 ‘낳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모님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행복해요.’라는 인사를 처음 듣게 된 부모의 마음인가 보다.
감동이 벅차올랐다.
“세르펜스도 제 아들로 태어나줘서···가 아니라! 제게 마음을 열어 줘서 고맙습니다!”
“······.”
내 말실수가 어처구니없었는지, 세르펜스가 멀뚱멀뚱 눈을 깜박거리다가 픽 하고 실웃음 지었다.
멋쩍은 기분이 들어, 나는 괜스레 헛기침하며 화제를 돌렸다.
“크흠! 편지지에 옮겨 쓰는 건 내일 일찍 일어나서 하고, 오늘은 이만 자러 갑시다.”
“그럽시다.”
세르펜스가 그 어느 때보다 흔쾌히 ‘그럽시다’를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