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69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699화(699/1105)
699회
76. 공작님과 바다 (24)
나는 잠든 세르펜스의 옆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낯빛은 여전히 붉었지만, 표정만은 옷을 갈아입기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평온해 보였다.
손을 잡아준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윈스톤이 이마에 수건을 올리자, 차가운 느낌에 놀란 건지 세르펜스가 ‘으음’과 ‘으응’ 사이의 울림이 있는 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이내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방금 침대에 누운 것치고는 상당히 깊이 잠든 것 같네?’
하기야. 이제는 굳이 눈을 떠서 확인하지 않더라도,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
비로소 안심하며 잠이 든 걸 테다.
나는 녀석의 손을 꼭 잡은 채로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 손으로 베개를 헤드 보드에 기대어 세워 놓고, 그곳에 등을 댔다.
이런 내 행동이 의아했는지, 윈스톤이 젖은 수건을 가볍게 비틀어 짜면서 질문했다.
“더 안 자는 거요?”
“잠 다 깼다고 말했잖아요. 이따 졸리면 또 잘 수도 있지만, 당장은 안 졸려서요. 게다가 먹고 바로 잤더니 속도 더부룩한 것 같아서, 좀 앉아있으려고요.”
그렇게 답하며 윈스톤의 손에 들린 수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킨 후 손을 펼쳐 보였다.
바로 손바닥 위에 수건이 얹어졌다. 내 보디랭귀지가 윈스톤에게도 통한 것이다.
나는 건네받은 수건을 이마에 가져다 대며 쉬는 동안 뭘 하고 놀아야 하나 고민했다.
할 게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육아 일기를 쓴다거나, 가족들에게 편지를 쓴다거나. 아니면 원래 살던 세상에서의 추억들을 기억나는 대로 두서없이 써 내려 간다거나.
무언가 하고자 한다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전부 하고 싶지 않다.
아픈 건 많이 나아서 몸도 꽤 가벼워졌으나 그것과는 별개로 귀찮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욱 열성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러면서도 이 시간을 따분하지 않고 즐겁게 보내고 싶다.
‘이럴 땐 누워서 TV를 보거나 핸드폰을 하는 게 딱인데···.’
가끔 이렇게 시간이 붕 뜰 때면 원래 살던 세상의 최신 문물이 그렇게 그리울 수가 없다.
하다못해 세르펜스가 건강했다면, 녀석에게 재롱이라도 부려보라고 시켰을 터이나.
애석하게도 현재 세르펜스는 내 옆에서 앓아누운 상태다.
이 방에서 나와 세르펜스를 제외하면 남은 건 윈스톤 뿐.
아무리 꿩 대신 닭이라지만, 2미터가 넘는 거구의 근육남에게 재롱을 부려보라고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윈스톤을 힐끔 곁눈질로 쳐다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때 윈스톤이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뭘 하려는 건가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윈스톤이 내 침대 위에 방치된 이불을 들고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다음에 이어질 행동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윈스톤은 내 어깨에 이불을 잘 둘러준 뒤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폭신하고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나는 뇌를 거치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윈스톤, 재롱 한번 부려볼래요?”
“혹시 바다에 빠졌을 때 어디 머리를 부딪치기라도 한 거요?”
의식의 흐름대로 튀어나온 내 제안에 윈스톤이 와락 얼굴을 찌푸렸다.
극도로 나를 꺼리는 듯한 표정은 어딜 어떻게 봐도 걱정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정말로 내가 머리를 다친 것 같아서 묻는 게 아니라, 헛소리하지 말라는 얘기를 돌려서 한 걸 테지.
“설마하니 평소 세르펜스 님께···.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대답을 듣기 겁난다는 듯. 윈스톤이 무언가 질문하려다가 서둘러 철회했다.
나는 그의 의문을 눈치챘으나,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주기로 했다.
다시금 찾아온 무료함을 어떻게 이겨낼까 고민하던 그때.
– 똑똑똑
타이밍 좋게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들어오라고 말하려다가, 세르펜스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 윈스톤을 쳐다보았다.
윈스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고, 유지스가 살그머니 들어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선우는 깨어 있었네요?”
“잘 만큼 자고 일어난 겁니다.”
“그래도 좀 더 자도 될 텐데···.”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유지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이 얼마나 나는지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다.
“안색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열이 남아 있는 거로 봐서 아직 치료를 받지 못한 것 같은데···. 세르펜스가 자는 걸 보면 선우가 잘 설득했나 보네요.”
유지스가 신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역시 선우라면 세르펜스가 무리하지 못하도록 말려줄 거라고 믿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완전히 설득한 건 아닙니다. 녀석이 푹 자고 일어나서 몸 상태가 괜찮아지면, 절 먼저 치료해도 된다고 했거든요.”
“아무리 세르펜스가 고집을 부린다고 한들, 선우가 아픈 세르펜스를 두고 자신을 먼저 치료하도록 허락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혹시 무슨 이유라도 있나요?”
“아, 그게요···.”
나는 유지스에게 세르펜스가 세운 계획에 관해 설명했다.
그 내용을 듣자마자 유지스 또한 녀석의 어린 시절 일을 떠올렸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잠든 세르펜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녀석이 얕은 신음을 흘리며 바르작거리며 뒤척였다.
그 모습을 본 유지스가 황급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 저기 윈스톤 경? 세르펜스가 너무 흐트러져 있는데요?!”
유지스의 얘기에 나는 세르펜스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땀에 젖어 얼굴과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칼과 열로 인해 붉어진 얼굴. 살짝 가쁜 호흡.
그 모든 것이 유지스의 시선에서는 너무 자극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윈스톤은 귀를 파닥거리며 호들갑 떠는 유지스를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세르펜스 님은 그냥 아프신 것뿐이오.”
“아, 알고 있어요. 알고는 있는데···.”
유지스가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다가 천장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거듭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세르펜스가 자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아니었다면 유지스가 대체 왜 저러는 건지 설명을 해 줘야 하는데, 그건 세르펜스에게 너무 이르다.
‘그리고 유지스에게도 너무 가혹한 시련이겠지···.’
나는 세르펜스의 순수함과 유지스의 체면을 생각해서, 화제를 돌리는 게 낫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유지스는 세르펜스의 몸 상태에 관한 얘기만 듣고, 선원들에게 식사를 준비해 달라고 말하러 나갔던 거 아니었습니까? 귓속말을 들은 건 아니지만, 그런 타이밍이었는데?”
“아, 아! 네. 선우의 짐작이 맞아요. 그 이후의 얘기는 휴마누스에게 듣고 온 참이에요.”
유지스가 빠르게 침착함을 되찾으며 답했다.
그러고는 이것저것 설명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는 동안 한시도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아마 실수로라도 세르펜스를 쳐다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지 않을까 한다.
유지스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이제까지 한숨도 안 자고 혼자 갑판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모양이다.
푸로르는 리에나를 돌보겠다며 나섰고, 윈스톤은 나와 세르펜스를 따라왔다.
마력이 바닥난 두 마법사는 회복을 위해 쉬러 갔으며. 마지막에 메숭이를 정화하느라, 신성력이 간당간당해진 휴마누스도 휴식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으니.
소거법으로 따지면 남는 게 유지스밖에 없긴 했다.
유지스는 그렇게 배를 지키다가, 조금 전에 휴마누스가 깨어나서 잠깐 대화를 나눈 뒤 역할을 교대했다고 한다.
“피곤할 텐데, 바로 자러 가시지 그러셨어요.”
“윈스톤 경처럼 두 명을 동시에 간호하는 분도 계시는데, 피곤하기는요.”
“그래도 쉴 수 있는 사람은 쉬어두는 게,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기에 좋죠. 유지스도 어서 가서 쉬세요.”
“잠깐만요, 이것만 드리고요.”
유지스가 잠깐 내게 양해를 구하고,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냈다.
그 안에 든 것은 액체뿐만이 아니었다.
시나몬 스틱을 비롯한 다양한 향신료와 유자를 위시한 각종 과일이 함께 들어있었다.
“감기에 좋다는 뱅쇼에요.”
“직접 만드신 겁니까?”
“마음 같아서는 그렇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와인이 끓는 걸 지켜보다가 경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어서, 선원분들께 재료를 넘기고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요.”
유지스가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잔을 건넸다. 나는 손에 들린 수건을 내려놓고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유지스가 병에 담긴 붉은 와인을 잔에 따랐다.
병에 옮기자마자 바로 아공간 주머니에 넣어 온 것인지 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오래 끓여 알코올을 전부 날려버린 와인은 알코올 특유의 냄새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 자리를 새콤한 과일 향과 알싸한 향신료 향이 대신했다.
단 것을 좋아하는 세르펜스의 입맛에 맞춰 꿀도 아낌없이 넣었는지, 한 입 마셔보니 상당히 달달했다.
“오, 맛있네요! 달짝지근한 게 세르펜스도 좋아할 겁니다.”
“그런가요? 향신료 때문에 매워서 세르펜스가 못 먹으면 어쩌나 걱정이 많았는데···.”
“얘가 못 먹는 건 캡사이신 쪽의 매운맛입니다. 계피 사탕을 싫어하긴 하는데, 못 먹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예전에 츄러스를 먹인 적이 있는데, 그건 또 맛있다고 잘 먹었고요. 이것도 꿀이랑 과일이 들어가서 달달하니까 잘 먹을 겁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요.”
유지스가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을 지으며 뱅쇼가 든 병의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주고 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럴 생각이었는데, 세르펜스의 계획 얘기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따 선우가 세르펜스를 간호할 때, 병문안 온 친구 설정으로 다시 올게요. 그러니 그때 꼭 저도 불러주세요.”
유지스도 세르펜스 간호 놀이에 동참할 생각인가 보다.
세르펜스가 알면 기뻐할 만한 소식이다.
“그럼 저도 이만 쉬러 가볼게요.”
“네, 이따 봬요. 세르펜스도 안녕 합시다, 안녕~!”
내가 세르펜스와 잡고 있던 손을 이불 밖으로 꺼내어 흔들자, 유지스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고 방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따 다시 볼 땐, 부디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보며 귀를 파닥거리지 말아야 할 텐데···.”
나는 닫힌 방문을 향해 중얼거리며, 따뜻한 뱅쇼를 홀짝였다.
윈스톤은 내 혼잣말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내가 이불 위에 내려놓았던 수건을 가져갔다.
그리고 묵묵히 그것을 물에 담갔다가 쫙 짜냈다.
별로 힘을 들인 것 같지도 않은데 수건이 머금고 있던 물을 대부분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그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떠올랐다.
“있죠, 윈스톤.”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시오?”
“별건 아니고, 윈스톤이 시간 날 때마다 제 체력 단련을 도와주고 있잖아요.”
“아픈 사람에겐 안 시키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런 게 아니라. 검술이랑 회피 동작 같은 것도 가르쳐 주셨으면 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소?”
믿기 힘든 얘기를 들었다는 듯, 윈스톤이 수건을 들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제가 세르펜스에게 검술 훈련받는 거, 윈스톤도 봤잖아요.”
“보긴 했지만···.”
“네. 훈련이라기보다는 거의 놀이에 가깝죠. 세르펜스는 진심으로 저를 공격할 수 없고, 저 또한 세르펜스가 절 다치게 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대련하더라도 긴장감이 전혀 안 생기고, 그러다 보니 실력 향상이 아예 안 되는 것 같아서요.”
“과연 주군께서 허락하실지···.”
윈스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든 세르펜스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녀석은 아직도 세상 모르게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허락은 제가 알아서 받아낼 테니까, 그건 윈스톤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소.”
“아! 참고로 윈스톤이 못 미더워서 검술을 본격적으로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닙니다. 그냥 제가 너무 보호만 받는 것 같아서 그럽니다. 앞에 나서서 싸우는 일은 없겠지만, 제가 적의 공격을 한 번만이라도 피하거나 막을 수 있다면···. 세르펜스든 윈스톤이든. 누군가가 꼭 저를 구해 줄 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되도록 그런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노력하겠지만···. 선우 선배의 뜻이 정 그러하다면, 최선을 다해서 돕겠소.”
“고마워요.”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윈스톤은 잠든 세르펜스와 손을 맞잡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와인잔을 들고 있느라, 양손이 봉쇄된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수건을 내 목에 걸어주었다.
그러고는 세르펜스의 이마에 올려둔 수건을 가져다가 물에 적시고, 짜내고, 곱게 접어 이마에 다시 올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