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1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19화(719/1105)
719회
77. 공작님의 짧은 휴가 (9)
* * *
유지스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후.
나는 세르펜스에게 간식을 쥐여주고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며 늘어지게 쉬었다.
그러다 저녁 시간이 되어 일행들과 식사하며 우정템을 자랑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와 육아 일기에 최근 세르펜스와 있었던 일들을 정리했다.
마르가리타 해안에 도착한 이후부터 쭉 적어 내려갔는데 쓸 내용이 참으로 많았다.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준 게 고맙고, 내가 울 때 위로해준 것이 기특했으며.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서 꾀부린 게 기껍고, 우정템을 맞춰서 즐거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일도 있었다.
– 똑똑똑.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공책을 덮어 펜과 함께 아공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세르펜스가 문을 열자 아주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나는 한달음에 문 앞까지 달려나가 소리쳤다.
“휴마누스! 보고 싶었어요!!”
“어, 엉? 고마워···?”
휴마누스가 주춤주춤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정말 너무하다. 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데.
나는 투덜거리며 휴마누스를 흘겨보았고, 눈새눈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벅거렸다.
“다른 일행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아냐, 아냐. 슬슬 잘 시간이잖아. 내일 아침에 보면 되니까, 굳이 불러올 필요는 없어.”
휴마누스가 일행들을 부르러 가려는 세르펜스를 말리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늦은 시간에 모두를 불러 모으는 게 미안했나 보다.
연락도 없이 제멋대로 공작저에 쳐들어오던 무례누스가 때를 가릴 줄 알게 됐다니.
크나큰 발전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그나저나 다른 일행들을 만나는 건 내일로 미뤄놓고, 우리 방에 찾아온 건···. 역시나 저거 때문이겠지?’
나는 휴마누스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성검. 정확히는 첫 번째 그것을 보호하는 검집을 힐끔 쳐다보았다.
애초에 휴마누스가 요 며칠 심해에 짱박혀있던 이유가 무엇이던가.
바로 첫 번째 용사의 무구로써 검집에 부여된 능력.
즉 성검의 힘을 제어하는 능력이 작용하는 방향을 틀어서,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기 위함이다.
그러니 휴마누스가 이 방에 찾아온 건 분명 그것에 관해 상담하려고···.
“선우야, 너 먹을 거 많지? 아무거나 좀 나눠줄래? 바다에 들어가기 직전에 네가 준 버터바 이후로 아무것도 못 먹었더니 배고파 죽겠어.”
···온 게 아니라, 음식을 얻어먹으려고 왔나 보다.
휴마누스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테이블에 엎어지며 배고픔을 호소했다.
‘얘가 이래 보여도 무려 황태자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신성 루멘 제국의 기나긴 역사 중.
굶고 다니는 황태자는 오직 휴마누스뿐일 거다.
나는 휴마누스를 가엾이 바라보며, 아공간 주머니에서 아까 낮에 산 음식 중 쉬림프 로제 리소토를 꺼냈다.
오랜만에 먹어도 위에 부담이 가지 않는 음식으로 죽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리소토가 죽은 아니지만, 대충 비슷하게 생겼으니까.
“고마워, 잘 먹을게.”
숟가락을 건네주자, 휴마누스가 황태자로서의 체면도 잊고 허겁지겁 리소토를 퍼먹기 시작했다.
정말 배가 많이도 고팠나 보다.
저러다 체하는 게 아닐까 싶어 천천히 먹으라고 하려다가, 조용히 컵에 물을 따라서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옆에 세르펜스가 있으니 체하더라도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휴마누스의 모습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셀라피엘을 따라 물속으로 뛰어들기 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거로 보아, 딱히 옷을 갈아입고 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물에 젖지 않고 보송보송한 걸 보면, 젖지 않도록 셀라피엘이 나름의 조처를 해준 모양이다.
‘비록 밥은 안 줬지만.’
휴마누스는 리소토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도 모자랐는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빈 숟가락을 입에 물었다.
먹을 것을 더 달라는 무언의 요구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깨끗한 접시를 꺼내어 샤무에 쿠키를 담았다.
휴마누스가 손을 뻗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잽싸게 쿠키를 하나 집어갔다.
눈앞에 있는 간식을 먹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쩔 수 없이 통에 남은 쿠키를 전부 접시에 쏟았다.
“일은 잘 마치고 오셨습니까?”
“당연하지!”
세르펜스가 어른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질문을 던져놓고 쿠키를 또 날름 집어 먹었다.
휴마누스도 짧게 대답하고 쿠키 하나를 자신의 입에 쏙 넣었다.
두 사람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손이 접시 위로 향했다.
파사삭 부스러지는 쿠키 사이로 달콤한 건크랜베리가 쫄깃하게 씹혔다.
“근데 휴마누스, 거기 가서 뭐 했어요?”
“검집에 세계수 가지의 재를 바른 뒤 심해에 던져놓고 나서, 셀라피엘이 만들어준 구(球) 안에서 명상···이라고 해야 하나, 기도라고 해야 하나?”
“예?”
“용사의 무구는 사실 도구라기보다는 성검의 주인이 시련을 마친 시점에서, ‘무의식중에 가장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능력’ 그 자체잖아? 그래서 그 능력의 방향성을 틀려면, 무의식에 깔린 바람을 완전히 덮어버릴 만큼 확고한 염원이 필요하다나? 아무튼 그래서 계속 생각했어. 심해에 가라앉았던 검집이 다시 떠오를 때까지.”
나는 깊은 바닷속을 배경으로, 커다란 공기 방울 안에서 명상하는 휴마누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바닷속 공기 방울을 동굴로 치환하면 딱 무협지에 나오는 면벽수련(面壁修鍊) 느낌이다.
차라리 동굴이면 벽의 무늬라도 감상할 수 있을 텐데.
‘어두컴컴한 심해에서 밥도 안 주고 사람을 방치하는 건, 수련보다는 정신적 고문에 가깝지 않나?’
보통 사람이라면 없던 심해 공포증도 생겨서 돌아올 것 같다.
그런데도 휴마누스의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한없이 빠져들 것만 같은 심해를 보면서 두려움 따위를 느낄 겨를이 없을 정도로, 생각에 집중했다는 걸까?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지금 이 삶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계속해왔던 생각.”
그렇게 말하며 휴마누스가 슬쩍 세르펜스를 쳐다보았다.
쿠키를 하나 더 집어 먹으려고 손을 뻗던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손을 내렸다.
딱히 휴마누스가 눈치를 준 건 아니지만. 그가 진지한 얘기를 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일 테다.
“내가 세르펜스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게 된 건. 그래서 세르펜스에게 친구로 받아들여진 건, 이번이 처음이잖아? 그리고 세르펜스가 진심으로 웃을 수 있게 된 것도 처음이지.”
“그렇···죠.”
“그러니까. 만약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기회가 있더라도, 이 소중한 시간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앞으로 마주할 적을 상대하기 역부족이라서, 반드시 이전 회차에서 내가 얻었던 경험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그 기억을 보는 것이 괴로워도, 현재를 잃는 것만큼은 아니라고. 그러니 이번만큼은 절대로 실패하고 싶지 않다고.”
“······.”
“···그냥 그렇게 간절히 바랐을 뿐이야.”
휴마누스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입안에 머금은 그 웃음이 너무 쓴 까닭일까? 아니면 그저 멋쩍었을 뿐일까?
그는 달콤한 슈가 파우더가 잔뜩 묻은 샤무에 쿠키를 집어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열심히 씹어 삼켰다.
쿠키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는데도, 세르펜스는 휴마누스가 쿠키를 먹어 치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쿠키가 몇 개 남지 않았을 때.
휴마누스가 특유의 쾌활한 웃음을 얼굴에 띠며 말을 꺼냈다.
“아무튼 고마워, 덕분에 잘 먹었어.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오늘 밤, 그 기억을 보실 생각입니까?”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에 휴마누스는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며칠 동안 고생해서 얻은 능력이니 빨리 써 보고 싶어. 중간중간 기간을 둬야 하니까, 너도 될 수 있으면 일찍 보기 시작하는 게 좋다고 말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선우에게 대강 듣긴 했지만, 그래도···.”
“하지만 무리하는 건 좋지 않습니다. 며칠간 심력 소모가 많으셨을 테니, 오늘 하루는 쉬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눈썹을 팔(八)자로 휘며 걱정을 드러내는 세르펜스의 얼굴에 휴마누스가 히죽 웃었다.
녀석이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하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만족스러운가 보다.
“그래? 그럼 그럴까?”
“네. 그렇게 하십시오.”
“알겠어. 그럼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보는 건 내일부터 시작할게.”
“그리고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부탁? 네가 나에게? 뭔데?”
세르펜스의 말이 의외였던 걸까?
휴마누스가 괜스레 자세를 고쳐앉으며 눈을 빛냈다.
“다른 회차의 기억을 보는 날에는 혼자 주무시지 마십시오.”
“깨고 나면 혼란스러우니까?”
“그런 것도 있고···. 악몽에 시달리다가 깨어났는데 주변에 아무도 없다면, 너무 외롭고 무섭잖습니까.”
악몽을 꾸고 혼자서 눈을 뜨길 수도 없이 반복해 왔던 세르펜스가 하는 말이다.
녀석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저희와 함께 주무셨으면 좋겠지만···. 으음···. 기억을 보고 난 이후 제 얼굴을 보면 혼란만 가중될지도 모르니, 원하신다면 윈스톤 경을 빌려드리겠습니다.”
“악몽에 시달리다가 깼는데, 위협적으로 생긴 덩치 큰 남성이 보인다면 그건 그거대로 놀랄 것 같은데?”
“그, 그렇다면 서, 선우도 함께 빌려···드리겠습···니다···.”
세르펜스가 내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며, 큰맘 먹고 내어준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 모습에 휴마누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사람을 더 늘리는 거야?”
정정한다.
그가 어이없어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선우의 무해한 분위기가 윈스톤 경의 위협적인 분위기를 중화시켜 줄 겁니다.”
“됐어. 꼭 누군가랑 자야 한다면 그냥 너희 둘이랑 같이 잘래. 눈을 떴을 때 너희가 함께 있는 모습을 봐야, 상황 파악이 빨라져서 쉽게 진정할 수 있을 것 같아.”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의 헛소리를 무시하며 말했다.
그 얘기를 듣자 볼타 산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세르펜스가 무릎 꿇은 채 내게 쓰다듬을 받는 장면을 보고, 휴마누스는 빠르게 제정신을 되찾았다.
‘그때처럼 휴마누스가 크게 당황할 만한 장면을 연출해야 하나···?’
매번 같은 레퍼토리를 하면 익숙해져 효과가 반감될지도 모르니, 다양하게 구상해 봐야겠다.
“저만 믿어요, 휴마누스. 무엇을 상상하던 기대 이상일 겁니다.”
“응?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 아니지? 내일 밤에 시도하는 거니까, 모레 아침이나 새벽이면 알게 되실 겁니다.”
“무슨 얘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부탁해···?”
“예압!”
내 당당한 대답에 휴마누스는 하하 웃었고, 세르펜스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녀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눈치챈 모양이다.
그래도 말리지 않는 걸 보면 암묵적으로 내 계획에 동의한 거라 봐도 무방하겠지.
“난 이만 자러 갈게. 배가 채워져서 그런가, 잠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네.”
휴마누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가리고 크게 하품을 했다.
아무래도 그동안 식사만 거른 게 아니라 잠도 못 잤나 보다.
나와 세르펜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배웅하려 하자, 휴마누스는 됐다고 손을 내저으며 문고리를 돌렸다.
“아 참, 세르펜스. 그 안경 줄 못 보던 건데, 새로 산 거 맞지? 잘 어울리네. 아무튼 그럼 잘 자!”
쿵, 작은 울림을 만들어내며 문이 닫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세르펜스는 안경 줄을 사 준 게 나라는 것. 그리고 유지스까지 포함하여 셋이서 한 세트라는 걸, 휴마누스에게 자랑할 기회를 놓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