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26)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27화(727/1105)
727회
77. 공작님의 짧은 휴가 (17)
휴마누스는 두 손으로 잔을 감싸 쥐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따뜻한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는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일단 겉만 봐서는 차분해 보이긴 하는데···.’
그게 더 불안했다. 차분한 분위기만큼 기분도 저조해 보여서.
평소 휴마누스가 활발한 성격이라는 걸 고려하면 더욱더 그러했다.
세르펜스도 걱정이 되었는지, 프레첼에는 손도 대지 않고 휴마누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안 물어봐? 뭘 봤는지?”
“굳이 재촉하지 않아도, 말할 준비가 되면 휴마누스가 얘기해 줄 테니까요.”
“그래도 전에는 물어봤잖아.”
휴마누스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따지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린 건, 2회차의 기억을 보고 온 탓에 예민해져서 그런 걸 테다.
볼타 산맥에서 처음으로 이전 회차 기억을 봤을 때, 휴마누스는 내가 물어보기도 전에 알아서 그 내용을 줄줄 읊었다.
지나칠 정도로 생생했던 그 꿈을 부정하고 싶다는 듯이.
그리고 세계수를 치료하고 나서 1회차의 기억을 봤을 땐 내가 먼저 물어봤다.
그때의 휴마누스는 위로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휴마누스는 위로가 아닌 다른 것이 필요해 보였다.
“어제저녁에는 크림소스 스파게티가 먹고 싶었지만, 오늘 저녁에는 토마토소스 스파게티가 땡길 수도 있는 것처럼. 비슷한 상황이라도 사람은 매번 바라는 게 달라지는 법입니다.”
“갑자기 웬 스파게티?”
“스파게티는 그냥 비유일 뿐이고, 지금의 휴마누스는 마음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는 뜻이었습니다.”
“······.”
내 대답에 휴마누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리고 본인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침묵 속에서 공연히 맹물만 들이켰다.
나는 그가 꿈속에서 본 기억의 잔영을 떨쳐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 줄 생각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르펜스는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간지럼 놀이를 즐기느라 완전히 잊고 있던 걱정이 다시 떠올랐나 보다.
‘딱히 휴마누스가 세르펜스에게 분노한다거나 적의를 보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지레 겁먹고 있는 세르펜스의 손을 잡자, 녀석이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프레첼을 하나 집어다가 녀석의 입에 넣어주고 싶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하기에는 휴마누스의 눈치가 보였다. 심각한 사람을 앞에 두고 장난치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만뒀다.
그 대신 손에 힘을 줘서 녀석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응? 아···.”
계속해서 물을 홀짝거리던 휴마누스가 의문스럽다는 소리를 냈다가, 멋쩍다는 표정으로 물잔을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보니 잔이 비어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물을 다 마신 것도 모르고 잔을 기울였다가,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나 보다.
“더 드릴까요?”
“목이 마른 건 아니니까, 괜찮아.”
휴마누스가 두 손으로 빈 잔을 매만지며 답했다.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래도 목소리에 힘이 생기긴 했다.
“이번 꿈은 내가 세르펜스와 싸워서 이긴 후 감옥에 가두는 것부터 시작해서···. 초토(焦土)가 된 수도에서 재회한 부분까지야. 얼마 안 되지?”
“그럴 것 같았어요.”
“···그렇게 바로 동의할 건 없잖아.”
내가 그럴 것 같았다고 말한 건 휴마누스가 깬 타이밍에 관해서다.
그러나 눈치 없는 휴마누스는 내 대답을 다른 뜻으로 오해하며,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우는소리를 했다.
“조금밖에 못 보고 깼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라, 그때 휴마누스의 스트레스가 최고치에 달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 지점에서 깨어날 줄 알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아, 그래?”
“네.”
고생하다 왔는데 친구가 그걸 몰라주면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하다.
그렇기에 나는 휴마누스의 반응을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휴마누스는 멋대로 착각하고 서운하다는 티를 팍팍 냈던 게, 상당히 부끄러웠나 보다.
“음, 그렇구나. 아하하···.”
휴마누스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동자를 대록대록 굴렸다.
그러다가 어서 민망함을 지워내고 싶은지 대뜸 말을 꺼냈다.
“실은 더 버틸 수 있었어. 그런데···. 아 참. 이 얘기를 하려면 먼저 다른 걸 설명해야겠구나.”
“다른 거 뭐요?”
“이번에는 이전 회차의 나와 정신이 섞이지 않고 분리된 상태였어. 내 의식은 계속 유지되고, 이전 회차의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전달받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용사의 무구가 이전 회차의 기억을 볼 수 있도록 해 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내 의식을 보호해 주는 기능도 하나 봐.”
휴마누스의 설명을 듣는데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세르펜스가 제시한 두 개의 가정 중, 정답은 두 번째라고 생각했었는데.
“···첫 번째 가정도 맞았네?”
“응? 무슨 가정?”
“아까 세르펜스가 그랬거든요. 어쩌면 용사의 무구 능력을 써서 이전 회차의 기억을 불러오면, 현재의 자아가 또렷하게 살아있을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그 경우에는 휴마누스가 더 많은 기억을 확보하고자, 일부러 깨어나지 않고 버티려 할 거라고 했는데···.”
“내가 잠든 사이, 둘이 그런 얘기를 나눈 거야?”
“그럼 저희가 진짜로 놀고 있는 줄 알았어요?”
놀았던 건 사실이지만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고로 나는 당당하게 따질 수 있었다.
이런 내 모습에 휴마누스는 확신을 잃고,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이상하네···? 진짜 노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불안해서 잠도 못 자고, 휴마누스가 깨어나길 뜬눈으로 기다렸는데. 대체 사람을 어떻게 보는 겁니까?”
“미안해. 둘의 연기가 너무 실감 나서 내가 헷갈렸나 봐.”
“아니, 저기, 사과할 필요까지는 없는데···.”
그저 가볍게 놀릴 생각이었는데.
휴마누스가 진심으로 사과하자, 기분이 괜히 이상해졌다.
그도 그러할 게 세르펜스와 간지럼 놀이를 하며 논 건 사실이니까. 어째 교묘한 말로 순박한 시골 청년을 속여먹는 사기꾼이 된 것 같다.
비록 휴마누스는 시골이 아닌 제국 수도 출신이었지만.
‘이대로 넘어가도 되는 건가?’
모르는 척 넘어갈까 하는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세르펜스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아이 교육을 생각해서라도 사실대로 이실직고하는 게 옳다.
“사실 진짜로 연출하려 했던 장면은 따로 있었습니다. 세르펜스가 제 무릎을 베고 누워서 과자를 집어 먹고, 저는 녀석의 머리를 땋아주는 컨셉을 준비 중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세르펜스를 간지럼 태우게 됐습니다.”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야?”
“그 원인에 관해 설명하자면 약 2년 하고도 몇 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얘기해 드릴까요?”
“···그렇게까지 긴 이야기면 됐어.”
듣는다고 하면 제온과 츄르 얘기부터 해 줄 작정이었다. 오늘 세르펜스가 내 손바닥을 먼저 간지럽힌 사건이랑.
그런 얘기들을 하고 나면 분위기도 가벼워지고 좋을 텐데.
아쉽게도 휴마누스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보다 첫 번째 가정이 있다면 두 번째, 세 번째도 있다는 거야?”
“두 번째가 끝이었습니다. 용사의 무구 능력을 쓰면 기억을 재생하는 속도가 느려져서 뇌의 부담을 줄여 준다, 대충 그런 내용이었죠.”
“그런 얘기가 나올 정도면, 내가 오래 잠들어 있었나 봐?”
“상대적으로 그런 편이었죠. 대략 반년 정도의 기억이면 금방 깰 줄 알았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반응이 없어서 뭔가 잘못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르펜스가 그런 얘기를 하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 줘서, 덕분에 마음을 좀 놓았죠.”
내 말에 휴마누스의 시선이 세르펜스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몸을 웅크리며 내 등 뒤로 숨었다. 당연하게도 그런다고 가려질 리가 없다.
휴마누스는 그런 세르펜스의 행동을 모두 눈에 담았다.
“쟤 왜 저래?”
“뻔하죠. 휴마누스가 자신을 미워하거나 원망할까 봐 이러는 걸 겁니다.”
“그러지 않을 거라고, 내가 저번에 얘기하지 않았어?”
“그건 휴마누스가 멸망한 제국을 보기 전에 한 말이었잖아요. 막상 그 기억을 보고 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겁먹은 겁니다.”
“···하긴. 정말 다르긴 하더라.”
무언가 많은 의미를 내포한 듯한 휴마누스의 중얼거림에 불안이 더 커진 걸까?
세르펜스가 움찔하며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치 없는 휴마누스가 보기에도 녀석이 겁먹은 게 확연히 느껴졌는지, 그의 얼굴에 걱정의 빛이 떠올랐다.
세르펜스가 봤다면 안심했을 일이다.
그러나 녀석은 휴마누스의 표정을 살필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선우야, 네가 어떻게든 해 봐. 아까처럼 간지럼을 태운다거나···.”
“휴마누스가 자신을 싫어하게 될까 봐 이러는 거니까, 지금 이 녀석을 달랠 수 있는 건 휴마누스 뿐입니다.”
“나는 세르펜스를 만지는 걸 금지당해서 간지럼 못 태워.”
진지한 얼굴로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가 싶다.
애를 달래는 방법이 오직 간지럼뿐인 줄 아는 듯한 그 발언에 순간 어처구니를 잃었다.
“왜 갑자기 간지럼에 꽂히게 된 겁니까?”
“조금 전 즐겁게 웃는 모습을 봤는데, 갑자기 겁먹고 숨으니까 그렇지.”
“설마 그런 단순한 이유로 겁먹어서 숨는 아이를 간지럼 태우자고 제안한 겁니까?!”
“그럼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이래서 관련 지식이 없거나, 육아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아이를 함부로 맡기면 안 되나 보다.
휴마누스의 일차원적인 사고에 나는 기함할 뻔했다.
“간지럼은 당장 아이를 웃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일시적으로 기분이 나아졌을 때, 잘 얘기해서 안심시킬 수는 있잖아.”
“그거야말로 큰일 날 소립니다! 설마 아이의 불편한 기분을 ‘빨리 처리해야 할 성가신 일거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그게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습니다!”
“저기, 그 전에 나는 세르펜스를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완전 말세다, 말세.
아이를 아이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존중하지 못하는 어른이 많아도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휴마누스는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진짜 실망이다.
성검의 주인이자 제국의 차기 황제인 휴마누스가 그런 부류의 어른이었다니.
이래서야 최종 보스인 마왕을 무찔러도 세상이 개판 나게 생겼다.
그럼 애초에 이 세상의 지도자를 구슬려서 정책을 다시 세우면 되잖아?
원래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지만, 달리 방법도 없으니 휴마누스를 고쳐 쓰자.
“그러니 황태자님, 회개해주세요!”
“회개?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라는 접속사는 대체 어떤 흐름으로 튀어나온 거고?”
휴마누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연달아 질문을 쏟아냈다.
지금은 그런 걸 하나하나 설명할 때가 아니다. 세르펜스의 불안감이 길어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휴마누스. 아이가 삐졌을 때 화해의 제스쳐로 간지럼을 태우는 장난을 거는 것조차, 아이의 기분을 잘 살펴서 시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움츠러든 아이를 간지럼을 태워서 강제로 웃게 한다니요? 그건 아이의 감정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존중하고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에 강제적인 수단으로 덮어버려서 좋은 감정은 그 어디에도 없어요.”
“아, 내가 실수했구나···.”
다행히 휴마누스는 타인의 조언을 고깝게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머릿속에다 ‘황태자 회개 프로젝트 : 난이도 下’라고 적었다.
“자! 이해했으면 이제 차근차근 접근해가며, 세르펜스를 달래보세요.”
“···내가?”
“아까 휴마누스가 직접 기억을 보고 오니까 생각이 달라졌다고 말해서, 얘가 더 겁먹은 거잖아요? 이제 휴마누스가 자신을 싫어하게 된 줄 알고.”
“응?! 그건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아니라면 어서 그것부터 해명해 주세요.”
오해라며 펄쩍 뛰는 반응에 세르펜스가 내 어깨에서 이마를 떼고, 휴마누스를 힐끔 쳐다봤다.
이렇게 가까이에 대화로 푸는 길이 존재하거늘.
대뜸 간지럼 태우자는 소리부터 해댄 휴마누스가 나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