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5화(75/1105)
75. 공작님과 투기장 (3)
세르펜스는 흑마력의 기운을 추적하고, 유지스는 투기장에 잠입하여 내부 구조 파악 및 서류 등을 조사하는 작업을 맡았다.
그리고 나는···.
“이제 뭐 하지?”
여관방에 혼자 덜렁 남겨졌다.
세르펜스는 흑마력의 기운이 사라지기 전 추적해야겠다며, 날이 밝기도 전에 훌쩍 나가버렸다.
그리고 저녁 시간대가 조금 지나 해가 저물어가자, 유지스가 출발하기 전에 잠깐 찾아왔다.
“검은 투사와 미리 접촉해 보시겠어요?”
“아뇨, 어제 그런 일이 있었으니. 당장은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못 될 것 같습니다.”
이번만은 검은 투사에게 세르펜스의 신성력이 필요할 것 같다.
‘ 그것이 신체적 상처가 되었든, 정신적 상처가 되었든···.’
신성력에 정신을 안정시킬 수 있는 기능이 있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고위급 기술인 이유는.
함부로 남발하지 말되, 일어날 수 없을 만치 무너져 내린 이들의 정신을 다독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또한, 흑마력의 존재로 인해 사실상 ‘검은 투사=흑기사’가 확실해졌다.
그런 이상, 굳이 내가 짐이 되면서까지 만나 볼 필요는 없었다.
유지스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은밀하게 투기장으로 향했다.
‘기분 전환 겸, 잠깐 밖에 나가 볼까?’
방 안에만 있으니, 한없이 우울해지는 기분이다.
경비대도 돌아다니는데 별일이야 있겠느냐 싶어, 스크롤이 든 가방과 지갑만 챙겨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에 시간에 쫓기지 않고 홀로 밖에 나와 느긋하게 바람을 쐬고 있자니, 어제 보았던 광경이 마치 지독한 악몽과 같이 느껴졌다.
아주 틀리진 않았나?
어젯밤, 내내 악몽에 시달렸던 것도 같다.
“그래. 내 정신, 내가 챙겨야지···.”
완전히 묻어버릴 생각은 없지만, 언제까지고 그것에 얽매여 우울해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과거의 망령에 붙잡혀 끌려다녔던 녀석의 최후를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럴 시간에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지.’
세르펜스야 원래 길을 걷다가도, 옆을 스쳐 지나는 사람까지 의심해 볼 녀석이다.
남도 못 믿고, 자기 자신도 못 믿고.
그러한 탓에 직접 신성력으로 내부까지 스캔하지 않는 이상 끝까지 가능성을 열어두려 하겠지만, 나는 흑기사가 흑마력에 침식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한다.
본디 그는 오러를 다룰 수 있는 기사다.
지금이야 구속구로 오러를 묶어두고 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내부에 흑마력이 스며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어디까지나 적을 대륙의 인간들로 한정 지어야 하니···.’
흑기사에게는 아직 직접 손을 써두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으나, 그동안 악마 숭배자들이 자신을 기만했다는 사실만 전달하더라도.
그들의 꾐에 넘어가 휘둘리는 일은 없으리라.
‘구해내는 것 자체야, 뭐···.’
당장에라도 그 하나 빼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단지 악마 숭배단체와 투기장이 엮여 있었기에, 그들이 꼬리를 자르고 내뺄까 봐 신중을 기하고 있을 뿐.
그래도 다음 경기가 열리기 전에 해결을 봐야 하니, 세르펜스도 새벽부터 홀로 나간 것이리라.
어련히 세르펜스와 유지스가 잘하겠지.
‘왠지 내가 일을 벌여놓고, 수습은 둘에게 떠넘긴 것 같은데···?’
하지만 가진 바 능력이 미천한 것을 어쩌겠는가.
내가 달리 해줄 만한 것도 없고. 그들이 다녀오면 배고플 테니, 토의하면서 입가심이라도 하게 차와 간식 등을 준비해 둬야겠다.
‘유지스야 저녁에 나갔으니, 그렇다 치지만. 세르펜스 이 자식은 새벽 일찍 나갔잖아?’
세끼를 꼬박 굶었을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식사 대용이 될 만한 샌드위치라거나···.
– 툭─, 투둑-.
딴생각을 하며 걸어 다녔던 탓인가, 다른 행인과 어깨를 부딪쳤다.
사과해야 할 것 같아 돌아보니, 방금 부딪힌 사람으로 추정되는 이와 눈이 마주쳤다.
몹시 당황한 듯한 표정. 눈을 동그랗게 뜬 상태 그대로, 그는 눈알만 데록 굴렸다.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가 보니···.
‘어라? 내 지갑이랑 비슷하게 생겼네?’
행인이 내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바닥에 떨어진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를 돌아 미친 듯이 달렸다.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되려 상황 파악이 늦어졌지만. 이건 분명···.
“야, 이 소매치기야! 거기 안 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그를 뒤쫓았다.
생각보다 빠르지는 않아서 속도상으로는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좁은 골목길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통에 잡힐 듯 말 듯 약올라 죽겠다.
메고 있는 가방 안의 스크롤까지 생각이 미쳤으나, 지갑에 남은 돈보다 스크롤 한 장 값이 더 나가···.
‘···는데, 굳이 따라갈 필요가 있나?’
그런 생각이 들어 우뚝 멈춰 섰다.
소매치기가 모퉁이를 돌아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차피 돈이야 세르펜스에게 빌리면 그만. 바다에 물 한 바가지 더 퍼붓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다.
잃어버린 돈은 불쌍한 거지에게 적선한 셈 치자.
“자, 잠깐···! 더 안 쫓는 거냐?”
헉헉대는 숨을 고르며, 뒤를 돌아 골목을 벗어나려 할 때.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듯했던 소매치기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물었다.
“아, 자존심 상해! 또 당했어! 이거 그거지? 함정 맞지?”
어쩐지 소매치기가 너무 허술하고, 도망치는데 거리 유지가 절묘하다 했다. 방금 불러 세운 건 시선 끌기인가?
잽싸게 몸을 대각선 방향으로 굴리며, 스크롤이 들어있는 가방을 뒤적였다.
가방 내부는 3단으로 나뉘어 있었기에 공격용, 견제용, 그 외로 미리 구분해 놓은 상태.
대충 견제용 중 하나를 집어 들었고, 꼬리표를 확인해보니 상대의 발을 붙잡는 대지 마법의 일종이었다.
“······.”
“······.”
당연히 등 뒤에서 급습할 타이밍이라 생각했으나, 그 생각은 절반만 맞았다.
예정된 위치에 다다르기 전 멈춰 선 탓일까. 이제야 내가 왔던 길을 막아서는 사내의 모습이 보인다.
‘폼 잡지 말고, 그냥 뛰어서 도망칠걸.’
꺼내 든 스크롤은 언제든지 한 손으로 찢을 수 있도록 이로 문 채, 그들을 견제하며 다른 손으로 가방 안을 뒤적거리며 라벨을 확인했다.
원하던 것을 찾았기에, 스크롤에서 입을 떼고 그것을 고쳐잡았다.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날 유인한··· 으악!”
가방을 뒤적이는 것을 기다려주길래, 스크롤 때문에 주춤한 건 줄 알았는데 세 번째 동료가 있었다.
기절시키는 것이 목적인지, 반쯤 골로 보낼 작정인지 내 뒤통수를 향해 둔기를 휘둘렀다. ‘훙-‘하는 위협적인 소리가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난 그냥 기분 전환 겸 산책을 나왔을 뿐인데!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지, 그 이유나 좀 알려주고 공격하던가!”
내가 방금의 공격을 피해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세르펜스 덕분이다.
‘언제든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나?’
그를 위해선 육감(六感)을 길러야 한다며, 옅게 희석된 살기 비슷한 것을 툭툭 던져댔다.
검술 수련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당시의 내가 반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농도에서 점차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이제는 어지간한 실력자가 일부러 공격 의사를 갈무리한 것이 아니라면, 얼추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피해낼 수 있느냐는 별개지만.’
세르펜스는 역시 약해서 그런가, 생존 본능은 뛰어난 것 같다며 만족해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장난식으로 던진 살기에도 연신 움찔거리며, 심장이 곤두박질쳤으니. 그의 교육 커리큘럼 중 유일하게 싫어했던 과목이었으나···.
‘···유용한데?’
그냥 시도 때도 없이 깜짝깜짝 놀랐을 뿐인데, 나에게도 이런 지각능력이 생겨날 줄이야.
덕분에 당장 위기는 피했다.
하지만 3대 1의 상황. 동료를 더 불러올 수도 있으니, 보호막을 치고 버티는 것은 위험했다.
‘역시 도망을 치거나, 난동을 부려서 세르펜스가 알아채 주길 바랄 수밖에.’
경비대를 믿고 나온 것인데, ‘소매치기야!’를 외치며 달렸어도 도움이 오지 않은 것을 보아 이들과 한통속 같다.
스크롤을 바로 찢지 않고, 입을 놀리며 몸을 뒤로 뺀 탓일까.
내가 들고 있는 스크롤에 내장된 마법이 근거리에서 사용 시, 나까지 휘말릴 수 있는 종류로 판단한 모양이다.
등 뒤를 기습한 녀석이 집요하게 붙어오며 다시 한 번 둔기를 휘둘렀고, 나는 몸을 비틀어 피해냈다.
“젠장! 어차피 ‘그것’이 있으니까, 비루먹은 놈도 상관없다고! 그냥 만만한 놈으로 데려오랬더니···.”
“저 녀석 생긴 걸 봐! 누가 알았겠어?!”
느닷없는 외모 비하도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호구 취급당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보다 앞의 얘기가 더 신경 쓰인다.
‘그런 말을 하면 도망 대신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잖아···?’
게다가 방금 두 번의 공격을 겪어보니, 실전은 아직 멀었다는 세르펜스의 말과 달리 나름대로 할 만했다.
상대가 세르펜스여서 몰랐을 뿐, 아무것도 아닌 놈들 사이에선 나도 꽤 괜찮지 않아?
‘거기다 솔레르티아님의 가호도 함께한다 이거야!’
그녀가 이 상황을 미리 예견한 것은 아니겠지만, 사두면 쓸모가 있을 거라는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그나저나 만만한 놈 운운한 거로 보아, 이 녀석들도 꽤 만만한 축에 속하는 것이겠지?’
그들이 철저히 일반인만 노려왔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세 명의 포위가 점차 좁혀진다. 당연히 둘러싸이는 것은 피해야 할 터.
생긴 것 운운했던 소매치기 녀석에게 달려들며, 과장된 동작으로 스크롤을 찢으며 외쳤다.
“가라, 화염구!!”
녀석이 화염구를 피하고자, 이를 악물고 몸을 옆으로 날렸으나.
“유감! 방금 찢은 것은 처음 꺼내 들었던 스크롤이었습니다!”
무게 중심이 이동된 상태로 땅에서 솟아오른 손 모양의 흙이 그의 발목을 붙드니, 허우적거리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여유롭게 그의 옆을 지나쳐 포위에서 벗어나며, 두 번째로 꺼내 들었던 스크롤을 찢었다.
이번에야말로 화염구가 생성되어 하늘 높이 솟아올라, 공중에서 폭발했다.
신호탄 대신이다.
“제길, 미끼였나?! 어디서 얘기가 샌 거지?”
오늘만큼은 하늘에 맹세코, 미끼 작전 따위 펼치지 않았다.
내가 그들의 범행을 미리 알고 함정을 파 놓은 것으로 판단한 모양.
신호탄을 보고 내 동료들이 몰려들 것이라 생각했는지, 녀석들이 도망가려는 태세를 취했다.
이거, 잘만 하면 혼자서도 되겠는데?
“여기 네 녀석들의 동료가 있으니, 도망가봐야 너희를 찾는 건 일도 아니다 이거야! 그러니 순순히 잡히는 편이 이로울 거다!”
그렇게 소리치며, 아직 발목이 붙잡힌 녀석에게 검을 겨눴···.
“···어? 검을 안 챙겼잖아?”
그 사이 마법의 효과가 끝나버린 듯, 소매치기 놈의 발목을 굳건히 붙잡고 있던 흙더미가 바스러지며 모래처럼 흩어졌다.
다른 두 명은 내 위협 따위 무시한 채,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친 모양.
내가 가방에서 또다시 스크롤을 꺼내려 하니, 놈이 품속에서 단검을 여럿 꺼내어 나에게 던지는 모습이 보였다.
따로 빼두었던 방어 스크롤을 꺼내 들 새도 없었다.
한 손에 세 개씩, 도합 여섯 개의 단검이 넓게 흩뿌려졌다. 근거리에서 일어난 일이고, 단검을 넓게 퍼트리듯 던졌기에 회피도 요원한 상황.
‘어떻게든 즉사만 면하자!’
고통은 길지만, 죽음은 영원이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는 것 보다,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
살아남기만 하면 세르펜스가 치료해주겠지, 라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고 양팔로 머리와 심장을 보호했다.
“······?”
당연히 느껴져야 할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날카로운 쇳소리들이 울렸고, 그 뒤로 둔탁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어찌 된 일인가 싶어 슬그머니 눈을 떠보니, 반투명한 은빛의 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단검을 날렸던 소매치기 녀석은 발치에 쓰러져 기절한 상태.
“···세, 페르센트?”
“당신은 정말이지···.”
그 짧은 시간에 도망간 녀석들까지 잡으러 갔는지, 세르펜스가 그들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질질 끌고 왔다.
“그대는 안전 불감증에라도 걸린 건가?”
“아닌데요? 저 겁도 엄청나게 많고, 걱정도 사서 하는 스타일인데요?”
“퍽이나.”
그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 아주 질렸다는 표정으로 나를 싸늘하게 노려봤다.
‘이제까지 위험한 행동을 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왜 저런 반응이지?’
오늘만 해도 그렇다.
내가 비록 저녁에 혼자 싸돌아다니고, 검도 놓고 나오고, 낯선 사람도 쫓아다니고, 도망칠 기회를 잡아 놓고···.
“···이 녀석들, 아까 이상한 소리를 하던데. 일단 깨워서 심문해볼까요?”
나는 말을 돌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