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68)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69화(769/1105)
769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7)
에일리히의 부끄러움이 가실 때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응접실에 들어온 제온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고 정중해 보였다.
하지만 비비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라 그런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굳어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저희가 왜 집사님을 불렀는지, 알고 계시죠?”
“네. 얼마 전, 제 동생이 살해를 당할 뻔한 사건 때문에 부르신 거로 압니다.”
내 물음에 제온이 감정을 절제하며 대답했다.
그래도 미미하게 긴장과 초조함이 묻어났다.
“꽤 긴 얘기가 될 테니, 우선 자리에 앉으시죠.”
“자리라니, 어디에···?”
제온이 이미 만석인 소파를 슥 둘러보더니 황당해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자리가 꽉 찼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남의 집안일에 함부로 끼어들기 뭐해서 그런가. 다른 일행들이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앉아만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자리가 없다고 해서 제온을 계속 세워두거나, 다른 누군가를 일으켜 세울 필요는 없었다.
자리가 없다면 새로 만들면 되니까.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의자를 꺼내어 상석 맞은편에 놓았다.
소파만큼 푹신하진 않더라도, 내가 집무실에서 쓰던 고급 의자라 제법 편할 거다.
내가 다시 자리를 권하자 제온이 부담스럽다는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두 손은 가볍게 주먹을 쥐어 무릎에 올려둔 채, 다리를 모으고 정자세로 앉은 모습이 마치 면접을 받으러 온 사람 같다.
그럼 내가 면접관이 되는 건가?
나는 다리를 척 꼬고 손은 깍지를 껴서 허벅지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았다.
“집사님은 가족과 동생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각오가 되어있습니까?”
“네, 당연합니다.”
“좋아요, 그럼 해 봅시다!”
“···문장의 필수 구성 요소를 빼먹고 말씀하시는 버릇은 여전하시군요.”
제온이 살짝 체념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그가 바라는 대로 빼먹었던 목적어가 무엇인지 알려주기로 했다.
“연기, 자신 있죠?”
“예? 연기라니, 그게 무슨···.”
“그렇게 겸손해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이미 한 번 같이 호흡을 맞춰 봤잖아요?”
마왕의 예언자를 자청했던 악숭이가 나타났을 때, 놈을 속이기 위해 나와 제온은 함께 열연을 펼쳤다.
나는 아직도 그날 보았던 제온의 연기를 기억한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해도 답이 없길래 그가 긴장한 줄 알았지만, 사실 그건 철저히 계산된 연기였지.
설정에 걸맞은 완벽한 캐릭터 분석과 그에 걸맞은 의미심장한 대사. 그리고 더없이 싸늘했던 시선.
정말 연기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집사님은 아직 신인이지만, 거대한 가능성을 품고 있어요. 그것을 알기에 저는 고민 없이 집사님을 캐스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이해 못 할 얘기는 그쯤 하시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온이 피곤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세상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깜박했다.
나는 뻘쭘함을 느끼며 꼬았던 다리와 깍지낀 손을 풀었다.
“흠, 흠! 제가 직접 나서서 리벨론 백작가를 보호하려 들면, 오히려 악숭 세력의 타겟이 될 뿐이라는 건 알고 계시죠?”
“네. 작은 형이 예전에 쓰던 물건들을 고향에 보내는 것조차 조심하며, 변명거리를 고안해야만 했으니.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제온의 얼굴에서는 깊은 수심이 아닌 옅은 기대가 묻어났다.
앞서 연기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운운했으니. 어쨌거나 가족들을 지킬 방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알고 계시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집사님께 연기를 제안한 건 그래서입니다. 집사님은 작은 형인 줄 알았던 제가 위험한 일을 당한 후. 곁에서 뭐라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세르펜스에게 공작저에 취직시켜 달라고 간청할 만큼, 가족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성격이잖습니까?”
“그, 그땐 제가 사회생활을 안 해 봐서···.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이제와서 그때의 일이 부끄러워진 것일까?
아니면 푸로르가 작게 휘파람을 불며, ‘제법 대담한걸?’ 하고 감탄하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제온이 민망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찮습니다. 저는 다아~ 이해합니다. 한창 치기 어린 나이였잖아요? 집에서 형들이 저지른 사고를 수습하며 항상 똑 부러진다는 얘기를 듣고 자랐으니. 소심하고 유약한 작은 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며, 동시에 ‘유능한 나’에 취해 있었겠죠.”
“이해해 주셔서···, 참···. 감사···.”
불시에 마주하게 된 흑역사에 제온이 정자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이리저리 꼬았다.
맨 마지막 문장은 반쯤 넘겨짚은 건데 저 반응을 보니 정곡을 제대로 찔렀나 보다.
“다들 제 잘난 맛에 사는 거지, 뭘 그렇게 부끄러워합니까? 결혼하니까 갑자기 막 어른이 된 것 같고, 과거의 자신은 세상 물정 모르고 떼쓰는 어린애 같고 그래요?”
“···이제 슬슬 본론으로 돌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아차! 너무 옆길로 샜나? 그래도 딴소리 한 번만 더 할게요. 결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치고는 눈초리가 제법 사납다.
지금 병 주고 약 주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는 눈치다.
“아무튼 집사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가족을 사랑하여, 리벨론 백작가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염치 불고하고, 초면인 사람에게 뻔뻔한 부탁도 서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잖아요.”
“······.”
긍정하자니 민망하고, 부정하자니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리는 상황에 제온은 침묵을 택했다.
이렇게나 흑역사를 잔뜩 들쑤셔 놨으니 원망의 눈빛을 보낼 만도 하건마는.
제온은 그냥 빨리 이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시선을 내리깔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제가 아니라 집사님께서 나서 주셔야 한다는 겁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세르펜스에게 무릎이라도 꿇으면서 간절하게 부탁하세요. 절대 거절할 수 없도록.”
“네? 하지만 그건···.”
“왜요? 집사가 되어서 집주인에게 무언가를 강요한다는 게, 직업의식에 어긋나서 그래요? 아니면 세르펜스의 이미지에 누가 될까 봐 염려되어서?”
“······.”
내 물음에 제온은 대답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대외펜스가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고 제온을 바라봤다.
“제가 먼저 제안한 일입니다. 그러니 부담 갖지 마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애초에 가주가 가문에서 일하는 이들을 지키는 건 당연한 의무잖습니까? 하나 그 당연함을 당연함으로 여기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 탓에 집사의 자존심을 지켜 드리지 못하여 도리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제온은 탄성을 흘리며 감동한 얼굴로 감사를 표했고.
그에 세르펜스는 눈썹을 팔(八)자로 모아 한껏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꾸며내며 답했다.
그러자 제온의 얼굴에 떠올랐던 감동이 더욱 진해지고, 부담감 또한 짙어졌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 그러지 말아 주십시오. 이번 일이 아니어도 주인님께는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절차도 예의도 지키지 않고, 다짜고짜 이곳에서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했음에도. 저를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시온의 정체를 몰랐을 때라, 그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으음···.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집사께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다면야···.”
내가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옆구리를 쿡 찌르자, 세르펜스가 대충 말을 얼버무리고는 어색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당연히 대화도 어색하게 끊겼고, 분위기도 어색해졌다.
“자, 자! 그럼 주연 배우님도 오셨겠다, 슬슬 대본을 작성합시다!”
“그럽시다.”
내가 짝짝 손뼉을 쳐서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내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주입된 가르침에 따라 반사적으로 답했다.
말 잘 듣는 어린아이 같은 녀석의 행동에 손이 근질거렸다.
당장에라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줘야 할 것 같은데, 제온 앞이라서 살짝 조심스럽다.
이런 내 망설임을 눈치챘는지 세르펜스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민숭이들의 목표는 오직 비비 뿐일 겁니다. 다른 가족의 목숨을 빼앗아 봤자 신경만 긁을 뿐, 제가 신의 사자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인질로 잡고 협박할 수도 없죠. 자신이 민숭이라는 걸 만천하에 떠벌리는 셈이니까요. 어찌어찌 납치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교단이 나서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들도 알 겁니다. 그도 그러할 게 악숭이는 그딴 뻘짓에 가담하지 않을 테고, 평범한 병사나 기사들은 악숭 행위에 동조하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민숭이들이 다른 가족들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근거를 제시했다.
제온은 내 설명을 듣고 있는지 아니면 한 귀로 흘리는 건지, 쓰다듬 받는 세르펜스를 벙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집사님, 듣고 계시죠?”
“아! 네, 듣고 있습니다.”
“그럼 마저 설명할게요. 집사님은 비비를 이 저택에서 보호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세르펜스에게 부탁해 주세요. 후견인 얘기도 꺼내면서 살짝 협박해도 좋고요.”
“···네. 알겠습니다.”
협박이라는 단어에 제온이 흠칫 놀랐다가, 다시 세르펜스를 보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제온이 설명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으니까 그만 쓰다듬어야겠다.
“그리고 리벨론 백작 부인도 함께 데려올 수 있도록 잘 부탁해 보세요.”
“어머니까지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 비비는 아직 부모님의 애정과 돌봄이 필요한 아기잖아요? 부모님이 따라와야 하는 게 당연하죠! 리벨론 백작은 영지를 다스려야 해서 못 오겠지만, 백작 부인 혼자라도 따라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백작 부인은 이번 일로 비비만큼 큰 충격을 받았을 테니, 그 점을 들먹여 보세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정말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게 아니면 뭐가 문젠데요?”
“어머니까지 오시면 보좌관님이 곤란해지실 텐데···.”
제온이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은 줄 아나?
“전 또 뭐라고. 이번에는 일이 있어서 제국 수도에 오긴 했지만, 필요한 정보만 얻고 나면 바로 떠날 겁니다. 아마 다시 돌아오는 건 악숭 세력을 정리하고 난 후겠죠. 그리고 그때쯤엔 비비를 해하려 드는 자들도 없을 테니, 백작 부인과 비비를 백작령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제가 곤란해질 일도 없으니, 걱정 마세요.”
“······!”
무슨 얘기가 오가든 흐뭇하게 세르펜스만 바라보던 에일리히가 돌연 눈을 부릅떴다.
마른하늘에서 떨어진 날벼락에 놀라기라도 한 모양새다.
“저, 정말···.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한 번도 들리지 않을 생각이십니까···?”
오랫동안 조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안달이 났는지, 에일리히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내게 질문했다.
누가 세르펜스와 혈연지간 아니랄까 봐.
슬픔 가득한 에일리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무진장 잘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공사가 다망하다 보니 일부러 들릴 수는 없겠지만···. 일부러 피하지는 않을게요.”
“감사합니다.”
에일리히가 세르펜스와 닮은 얼굴로 환히 웃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