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6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70화(770/1105)
770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8)
“아무튼! 이번 연극의 핵심은 첫째, 비비를 보호할 것. 둘째, 제가 리벨론 가문의 안전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 이 두 가지입니다.”
나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고자 가볍게 운을 뗐다.
그러고 나서 일행들을 둘러보며 시나리오 아이디어 공모전을 열었다.
이런 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건 유지스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내 믿음을 배반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유지스의 모습이 무척이나 든든하다.
“그래도 너무 무관심하게 행동하는 건 되려 의심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요?”
“유지스의 말이 맞습니다. 당신이 진짜 ‘시온 리벨론’이 아니라는 건 악마 숭배자들도 아는 사실이지만. 그자들은 당신이 타인의 안전을 등한시할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 못 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을 겁니다.”
유지스의 말에 세르펜스가 동조했다. 아부성 멘트를 장착하긴 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때 어디선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제온이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어떻게든 해 달라며 떠넘긴 후 멀뚱히 있는 게 아니라, 회의에 적극 참여하려는 자세가 무척이나 보기 좋다.
“그렇죠. 명색에 신의 사자인데, 몸을 내어준 사람의 가족들을 너무 신경 쓰지 않으면 이상하겠죠. 하지만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미리 생각해 둔 변명이 있으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온이 반색하며 나를 쳐다봤다.
굉장히 부담스러운 눈빛이었으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기에, 나는 덤덤한 척 다시 입을 열었다.
“다들 아시겠지만. 세르펜스는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눠 가져야 할 불안과 책임을 홀로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세월이 자그마치 25년입니다.”
“당신을 만난 이후에는 혼자가 아니었으니, 그중 8개월은 제외해도 됩니다.”
세르펜스가 굳이 끼어들어서 정정을 요청했다.
그렇게 일일이 따지자면 녀석이 12월 태생이라는 점까지 고려해야 하고, 더 깊이 파고들면 지난 회차까지 셈해야 한다.
그리 중요한 문제도 아닌 거로 걸고넘어지는 걸 보니, 입이 매우 심심한가 보다.
입을 다물게 할 요량으로 뭐라도 먹일까 하고 슬쩍 테이블 위를 보니, 그 많던 테린느는 누가 다 먹었는지 한 조각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디저트를 더 먹이는 건 좀 그렇고···.’
고민하다 보니 불현듯 아공간 주머니 속에 고이 모셔두었던 달고나 조각이 떠올랐다.
나는 세르펜스의 빈 잔에 홍차를 절반가량 채우고, 아공간 주머니에서 우유를 꺼내어 잔을 가득 채운 뒤.
마무리로 잘게 부순 달고나 조각을 그 위에 잔뜩 뿌렸다.
그렇게 완성된 달고나 밀크티를 티스푼과 함께 세르펜스에게 건네자, 녀석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그것을 저어서 한 모금 마셨다.
밀크티 용도로 진하게 우린 홍차가 아니라서 맛이 밍밍하면 어쩌나 했는데.
잔을 꼭 쥐고 연거푸 홀짝거리는 녀석의 모습을 보니 다행히 괜찮은가 보다.
“잠깐 말이 끊겼는데 그 기간이야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신 룩스메아께서 이 녀석을 굉장히 아끼고, 또 가엾이 여긴다는 겁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지만, 세르펜스는 그중에서도 특히나 아픈 손가락인 거죠. 그리고 마왕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요. 그 새끼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자세한 건 묻지 마세요. 알면 다치니까.”
나는 세르펜스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얘기를 이었다.
룩스메아를 운운하며 자세히 알면 다친다는 말로 끝낸 덕분일까?
전·현직 이단심문관 두 사람이 알겠다는 말도 못 꺼내고, 입을 꾹 다문 채 몹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즉 시온은 세르펜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리벨론 백작가의 사정을 애써 외면한다는 설정인 거죠?”
우등생 유지스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나는 정답을 맞힌 유지스에게 짝짝짝 박수를 보냈다.
“네, 그렇습니다. 세르펜스가 직접 비비를 보호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공작저에 들이는 것뿐이라면, 사실 이 녀석이 할 일은 딱히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이 없는 건 아니잖아요?”
누군가를 보호한다는 건, 그 사람의 목숨을 책임지고 일이 잘못되었을 때 원망을 들어야 한다는 거다.
내가 룩스메아였다면 세르펜스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지 못했을 거다.
‘공작저는 경비도 잘 갖춰져 있고, 전·현직 이단심문관이 둘이나 있으니 안전하겠지만···.’
도리어 그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지금은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기에도 바쁜 시기다.
이런 불안한 시기에 선뜻 타인을 집안에 들이면서까지 보호해 주겠다고 나선다면, 자신들도 보호해 달라며 안전을 맡겨둔 것처럼 구는 사람이 나타날 테다.
‘그런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도 방지해야 하고···. 신경 쓸 게 많네.”
고려해야 할 점들을 명확하게 잡아 놓자 대충 시나리오가 그려졌다.
구체적인 대사를 쓰고 무대 배경을 정하고 가볍게 리허설까지 마치고 나니, 어느덧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저녁 먹고 한 번만 더 맞춰 보죠? 어차피 주연은 집사님이랑 저랑 세르펜스뿐이니까, 다 같이 모일 필요는 없고. 집사님만 세르펜스 방으로 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애드립 위주의 연극이었기에 리허설을 두 번이나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도 제온을 방으로 부른 건 그와 나눌 얘기가 있어서다.
가족의 안전이 걸린 일이라서 그런가, 제온은 내 말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식사 후 찾아오기로 약속했다.
“나도 놀러 가도 돼?”
“같은 연극을 세 번이나 보면 질릴 테니까, 오늘 말고 나중에 오세요.”
휴마누스가 눈치 없이 끼어들려 했지만, 어차피 그의 목표는 5층과 세르펜스의 방을 구경하는 것뿐일 터.
무조건 안 된다고 거절하는 대신 나중을 기약하니 순순히 물러났다.
식사실로 자리를 옮겨 만찬을 즐긴 뒤.
세르펜스는 테이블 앞에 앉아 유니어를 관찰했고, 나는 침대에서 뒹굴 거리며 녀석을 지켜봤다.
봄이 된 터라 순따기를 멈춰야 했는데, 그게 아쉬운지 세르펜스는 애먼 잎사귀를 조심스레 매만졌다.
“그렇게 좋아요?”
“누가 준 선물인데 당연하지. 꽃도 꽃이지만, 잎과 가지에 난 보송보송한 솜털까지. 어느 곳 하나 어여쁘지 않은 구석이 없다.”
세르펜스가 퍽 어여쁘게도 웃으며 대답했다.
선물 받았던 당일과 저택을 떠나던 날 아침에 잠깐 보고 오랜만에 보는 거라, 지금 실컷 봐두는 건가 했더니.
그냥 유니어에게 푹 빠진 모양이다.
이해할 수 있다.
나도 세니어를 손에 넣고, 한동안은 그 아름다움에 이끌려 시도 때도 없이 구경하곤 했으니까.
그 이전에는 가공되기 전의 신성석 모습을 잔뜩 봐 둬야겠다는 생각에, 틈만 나면 그것을 꺼내보기도 했고.
그때의 나를 보는 세르펜스의 심정도 이러했을까?
내가 준 선물을 저렇게나 좋아해 주니, 기쁘다 못해 고맙고 마음이 벅차올랐다.
이 맛에 선물을 하나 보다.
그렇게 가슴 찡한 감동에 코끝이 간지러워졌을 때, 제온이 방에 도착했다.
“어째서 보좌관님께서 주인님의 침대에서 뒹굴고 계신 겁니까?”
“사실 리허설은 거짓말이고, 그냥 대화하려고 불렀어. 지금은 사적인 자리니까 편하게 얘기해. 세르펜스는 꽃구경하느라 바쁘니까 없는 셈 치고.”
“···지금은 이쪽을 보고 계시는데···요?”
제온이 쭈뼛거리며 세르펜스의 눈치를 살폈다.
조금 전까지 꽃구경에 여념이 없었으면서. 녀석은 녹색 눈동자 가득 질투를 담아 제온을 노려보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내가 너한테 반말하니까 부러워서 그래.”
“그 얘기를 들으니까 더 신경 쓰이는데···.”
중얼거리는 제온의 목소리에 얼떨떨한 기색이 가득 묻어났다.
세르펜스가 너무 신경이 쓰인 나머지 침대에 관한 건 뇌리에서 싹 지워버린 듯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얘기에 시간 소비를 안 해도 되어서 다행이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으며 바로 본론을 꺼냈다.
“신경 쓰지 말래도 그러네. 그보다 비비랑 리벨론 백작 부인은 좀 괜찮대?”
“큰 형이 보낸 편지에 의하면 비비는 놀란 것 같긴 해도 괜찮아 보인다나 봐. 아직 아기라서 훗날 문제가 드러날지도 모르니,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지만···. 사실 비비는 어른이니까 어딘가 불편한 게 있으면 진작 티를 냈겠지. 다친 곳도 없다는 모양이고. 문제는 엄마야.”
살해 위협을 당한 사람은 괜찮다는데, 리벨론 백작 부인이 왜 문제냐고 따질 수는 없다.
아이가 혼자 놀다가 철봉에서 떨어져 다쳐도 괜히 자신을 탓하게 되는 게 부모 마음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의 원인인 아이루고 자작 부인은 리벨론 백작 부인의 지인이다.
자신이 초대한 사람이 귀하디귀한 늦둥이를 죽이려 했으니.
아이에게 미안하고, 가족들을 볼 면목이 없고, 그딴 사람을 지인으로 둔 것에 후회하며 자신을 죄인이라 생각하겠지.
그것도 온종일. 한시도 빠짐없이.
“충격이 크시겠네.”
“그런가 봐. 종일 비비를 끌어안고 안 놔준대. 그간 비비를 돌봐줬던 유모나 주인님께서 붙여주신 시녀에게도 안 맡긴다니 말 다했지.”
“리벨론 백작님이랑 카론은?”
“두 사람한테는 믿고 맡기긴 하는데···. 그마저도 밥 먹을 때랑 화장실 갈 때 잠깐뿐이래.”
지인에 의한 범죄였던 터라, 주변인을 못 믿고 의심하게 된 모양이다.
“엄마가 그러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위로해 주려는 건지 비비가 엄청 애교를 부린다나 봐. 그걸 보고 엄마는 잠깐 즐거워하며 웃었다가, 갑자기 미안하다며 울었다가. 계속 오락가락하신대.”
“생각보다 더 심각하시네.”
“후우···.”
어머니 걱정에 마음이 무거워졌는지, 제온은 더 이상 말을 얹지 못하고 한숨만 푹 내쉬었다.
단순히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준이 아닌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에일리히 님과 알타르 님도 신성력으로 신경 안정제 효과를 낼 수 있으려나?’
둘 다 신성력 다루는 실력이 뛰어나고, 심문하는 방법이 꼭 고문만 있는 게 아니니 쓸 수 있을 것 같다.
설령 그쪽 방면으로 신성력을 안 써 봤어도 상관없다.
세르펜스와 리에나가 개인 교습을 해 주면 금방 배우겠지.
“비비를 죽이려 한 건 민숭이들이니까, 전·현직 이단 심문관들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이 저택에서 지내다 보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머릿속으로는 신성력 치료를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제온이 괜히 더 불안해할 것 같아서 다른 얘기를 꺼냈다.
그게 효과가 있었는지 제온의 입이 다시 열렸다.
“위로해 줘서 고마워.”
“고맙긴. 그보다 너, 지금 이 얘기 누구에게 했어?”
“아무에게도 안 했는데···, 왜?”
“너 결혼했잖아. 배우자한테도 안 했어?”
“얘기 안 해도 다 알고 먼저 위로해 주던데? 정보원이잖아.”
제온의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 결혼 생활에, 장가를 잘 갔다고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 헷갈렸다.
그래도 제온의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진 걸 보면 당사자는 만족하는 모양이다.
“그럼 됐어.”
“그거 확인하려고 물어본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야, 말 나온 김에 하나 물어보자. 너 왜 나한테 먼저 도와달라고 안 했어? 아무리 알타르 님이 대신 얘기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도 그렇지. 하다못해 설명하는 자리에는 네가 있었어야 하잖아. 어차피 네가 직접 부탁하지 않아도 도와줄 테니까 상관없다 이거야?”
“그런 거 아니야!”
내가 짐짓 얼굴을 굳히고 인상을 쓰며 묻자, 제온이 깜짝 놀라서 부정했다.
나도 제온이 그런 뻔뻔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리벨론 백작 부인의 상태가 심각한데도, 내가 묻기 전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는 게 서운해서 일부러 표정을 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