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7화(77/1105)
77. 공작님과 투기장 (5)
“이전에 말씀하셨을 때는, 언제나 그러하듯 당신 특유의 난해한 행동 중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약간의 의구심 정도는 품을 줄 알았는데, 그냥 아무 생각도 없이 넘어갔을 줄이야.
설마, 내가 고통을 즐긴다는 이상한 오해를 아직도 하고 있다거나?
‘에이~.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그땐 세르펜스가 일부러 말을 돌리려고 그랬던거잖···아?’
···맞지?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그때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물어보고 싶다.
상황 하니까, 방구석에 기절해서 찌그러져 있는 녀석들도 신경 쓰이는데···.
‘뭐,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세르펜스가 알아서 나를 멈춰 세우든가 하겠지?’
애초에 먼저 운을 띄운 건 이 녀석이었다.
“···시온?”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생각이 바뀌셨다는 거지요?”
“네. 지금은 그 행동에 무언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보아도, 그 답을 제 안에서 찾을 수가 없어서···.”
나만 그러했다면 모를까, 유지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으니.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건지는 몰라도, 이상한 것이 내가 아닌 자신이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한 모양이다.
“이런 얘기를 하기에 부적절한 시기라는 건 알지만, 도저히···.”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좋은 생각입니다. 배움에는 때가 없고, 모르는 것 보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지 않습니까?”
여기는 없는 말인가? 세르펜스의 표정이 조금 미묘하게 변했다.
“크흠! 이겨낼 수 없는 충격이라면, 신성력에 의지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둬야 합니다.”
무작정 그것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툭 까놓고 말해서, 메마른 감정과 불안정한 정신 상태로나마. 그가 지금까지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 의존에서 벗어날 때도 되었지.’
세르펜스가 그런 방식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모두가 그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 또한 자신을. 고통을 외면하는 방법밖에 몰랐기 때문이니까.
“무슨 감정이든, 자신의 일부잖습니까? 아프고 괴롭다 하여, 그것을 외면하고 덮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째서?”
“···세르펜스. 당신의 현 상태가 아니었다면, 저도 눈치채는 것이 늦었을 겁니다.”
“저 말입니까?”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다.
세계를 구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에게 수많은 것들을 배우길 강요해놓고.
어째서 정작 그 누구도 그에게 인간다운 삶을 가르쳐주지 않은 것일까. 타고난 감정조차 잃어버리게 한 것일까.
“그렇게 흘려보내고, 묻어버렸으니. 결국에는 잃어버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까지도 잊어버리게 된 것 아닙니까.”
“또···. 자신을 드러내라는 얘기인가.”
“그 연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오래전부터 의식했던 문제였기에, 충분히 정리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처럼 충동적이고 격정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해할 수 있도록 차분하고, 차근하게 설명하자.
“고통스러워도, 그 또한 자신의 감정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겨낼 때, 사람은 비로소 성숙해질 수 있는 겁니다.”
“······.”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당신의 일부이니, 보듬고 다독여가며. 자신을 아끼고, 연민하고, 사랑하길. 그렇게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그게.”
미처 제대로 된 문장을 이어나가지 못한, 말의 첫머리가 그의 목구멍을 비집고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더이상 자기 자신을 죽이지 말아주세요.”
죽인다는 말에, 그가 흠칫 놀라는 모습이 보인다.
그 언사의 과격함이 아니라, 자신을 스스로 지키고자 했던 행동들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과 진배없다고 느낀 것일까.
세르펜스는 변장이 아니었다면 갑갑하다 할 정도로 크라바트를 조여 맸을, 목 주변을 매만졌다.
“그동안의 당신이 잘못되었다 말하는 게 아닙니다. 덕분에 지금까지 버텨오실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를 긍정하면 긍정했지,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자신까지 아껴주라는 얘깁니다.”
“···하지만.”
“칭찬받아 마땅한 겁니다. 혼자서 많이 힘드셨을 텐데, 잘 버텨주셨습니다. 기특해요. 정말 잘하셨습니다. 제 칭찬 점수는 95점입니다. 조금만 노력하시면 만점이 되겠네요.”
“그, 무슨···.”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더는 자신의 일부를 도려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도 그러할 게, 앞으로는 혼자서 버틸 필요가 없잖습니까?”
“······!”
“이제는 그런 인위적인 억제가 없더라도. 손을 뻗으면 그것을 마주 잡아 줄 사람이 있잖습니까.”
그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그것은 동요로 시작하여, 동조로 끝맺음했다.
세르펜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천천히 내 쪽으로 뻗는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손을 무시하고, 뿌리쳤길래···.’
대다수의 사람에겐 별거 아닌 그 동작이, 그에게는 얼마나 버겁기에 저리도 긴장해야 하고,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지.
달달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았다.
‘이 녀석을 처음 만났던 날 이후, 두 번째 인가?’
아니다. 거짓과 위선에 불과했던 그 행위는, 아무런 의미도 담지 못했다.
그러니 ‘진짜’ 세르펜스의 손을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진정(眞情)을 담아, 처음으로 맞잡은 그 손은. 긴장한 탓에 하얗게 질리고, 차게 식어있었다.
“흔들리면 지탱해주고, 쓰러지면 일으켜 세워드릴 테니. 이제 더는 도망치지 않으셔도, 당신은 괜찮을 겁니다.”
“···읏.”
그의 눈동자를 적시며 눈가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눈물이. 그 위로 살며시 눈꺼풀이 내려앉고 나서야, 망울지고, 비로소 흘러내린다.
“이제야 우시네.”
다른 한 손도 들어 올려 양손으로 그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었다.
셀 수조차 없이, 몇 번이고 참고 억눌러야만 했던 울음을 터트린 세르펜스는 참 잘도 울었다.
안쓰러움과 흐뭇한 마음이 뒤섞였다.
“당신을 외면하는 손도 있지만, 이렇게 잡아줄 손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이제야 제대로 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많이 부족하고 미숙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의 감정도 마주할 줄 모르면서, 타인의 감정은 빨리도 알아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으나.
‘그런 게 가능할 리가.’
마음으로써 느낀 것이 아니라, 머리로써 분석하고 있었던 거겠지.
역설적이게도, 그가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달래주려 뱉었던 말이. 이제껏 그가 타인에게 진심으로 공감한 적이 없다는 증거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그가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시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드디어 그가 먼 길을 돌아, 출발선 앞에 도달했다.
자신을 마주하고. 연민하고. 사랑하고 나서야, 다른 이에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겠지.
하지만 오늘은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자.
“오늘은 실컷 울어도 좋습니다.”
맞잡은 손에 꽉 힘을 주자, 차갑기만 했던 그의 손에 조금씩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눈물을 닦아주는 것 조차, 울지 말라는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의 손등을 토닥여 주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0분, 30분, 1시간···, 2시간···?
‘뭐야, 얘. 안 그치는데?!’
모든 응어리를 풀어내기에, 오늘은 제대로 된 날이 아닌 것 같다.
유지스가 나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 당장 돌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 되어버렸고.
‘구석에 처박힌 세 명도 언제 깰지 모르고···.’
마음 같아서는 세르펜스가 지쳐서 울음이 멎을 때까지 내버려 두고 싶었으나, 도통 지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울다 지쳐 잠들려면, 꼬박 하루를 새어도 부족할 듯하다.
“···세르펜스?”
“흐윽···.”
“저, 리디아님도 슬슬 오실 시간인데···.”
“···흡.”
“어휴, 이러다 탈수 생기겠네. 무슨 놈의 눈물이 끊임없이 나옵니까? 가서 세수라도 좀 하고, 남은 건 다음에 웁시다. 예?”
“···언제는, 흑. 실컷 울라더니.”
세르펜스가 비죽거리듯 말했다. 훌쩍이는 건 아직도 마찬가지나, 그래도 얼굴을 보니 눈물은 가까스로 멈춘 듯하다.
그런 그를 화장실에 밀어 넣었다.
차는 없으니 냉수를 한 잔 가득 따라, 씻고 나온 세르펜스에게 그것을 마시게 했다.
그 얼굴을 바라보니, 붉게 충혈된 눈은 신성력으로 가라앉힌 듯하다.
누가 봐도 두 시간 가까이 내리 운 사람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여전히 울 것 같은 얼굴이네.’
정신에는 손대지 않은 모양이다.
눈망울이 울먹울먹하여, 톡하고 건들면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다.
“아직도 진정이 안 되셨나 보네.”
“···티 많이 납니까?”
20년 가까이 참아 왔던 감정이다. 그동안의 설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계속해서 눈물이 차오를 이유는 얼마든지 있었다.
강제로 억누를 줄만 알았지, 세르펜스는 그것을 스스로 추슬러본 적이 없다. 그러다 보니 제어가 안 되는 것도 당연지사.
멀쩡하다면 몰래 신성력을 운용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 보아야 했다.
– 똑똑.
예상은 했으나 세르펜스가 감정을 추스르는 것 보다, 유지스의 도착이 빨랐다.
‘그래도 한창 울고 있을 때 오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가?’
방구석에 세 명의 낯선 사내들이 꽁꽁 묶여 기절한 채 나뒹굴고 있고, 세르펜스가 내 손을 붙잡고 펑펑 우는 와중에, 나 홀로 멀쩡해서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 모습을 누가 봤다면···.
‘뭐야, 그거 무서워!’
이제 와 냉정하게 제삼자의 시점을 상상해서 그려보니, 혼돈과 공포 그 자체다.
그나저나 저 범죄자 셋은 아직 살아있는 게 맞긴 한건가? 어째 미동도 없···.
“페, 페르센트님?! 왜 울고 계시는, 아니. 울려고 하시는 거죠?”
잠깐 상념에 빠진 사이, 세르펜스가 문을 열어주었나 보다.
이전엔 그래도 어떻게든 내게 시키려 들었는데, 포기한 건가.
상하관계 따위는 개밥에 말아먹은 듯한 것이, 서로를 야야거리며 부를 날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는 좀···.’
딴 생각하느라 멍때린 내 잘못이긴 하지만, 저 녀석이 울먹거리면서 문을 열어주면 내가 굉장히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마치 내가 괴롭힌 것 같잖아?
“저, 저 녀석들이 그랬습니다! 저놈들이 범인입니다! 쟤들이 우리 애···가 아니라 세르펜스를 울렸어요! 제가 다 봤습니다!”
나는 기절하고 입에 재갈까지 물려, 말을 할 수 없게 된 녀석들을 가리키며 외쳤다.
“네?! 그게 무슨···.”
“저것들 진짜 나쁜 놈들입니다!”
어차피 정보 교환도 해야 했기에, 유지스에게 나와 세르펜스가 알아낸 것들을 정리하여 전달했다.
“그, 그런 천인공노 할···!”
그녀도 어제의 참혹했던 광경을 떠올린 것일까. 분통을 터트리며, 비탄에 젖어 눈시울을 붉혔다.
“아아···.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더이상 이런 피해자들을 늘려서는 안 돼요.”
“···예, 맞습니다. 절대로.”
그들에게 조금도 공감하지 못하는 세르펜스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아니, 이 광경도 조금 이상한데?’
이미 한 번 분노를 터트려서 진정이 된 탓에, 괜히 나만 감정이 메마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동참하며 울상을 짓기에는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언제까지나 감상에 젖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으로 피해자들을 생각한다면, 지금은 추모보다 응징이 필요한 때입니다.”
“역시나, 냉철하고 정확한 판단이에요.”
···그냥 그렇다 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