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7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74화(774/1105)
774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2)
‘잠깐만. 이거, 준비했던 연극이랑 자연스럽게 엮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다 같이 준비한 각본을 내 독단으로 수정하려니, 작은 망설임이 찾아왔다.
상대방 역의 제온이 곤란해할 것 같기도 하고, 함께 고민해준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연극의 도입부는 관객들의 난입으로 이미 무너진 지 오래다.
어차피 인생은 애드립의 연속이라고 했다.
이런 돌발 상황조차 자연스러운 연극의 일부로 이끌어 나갈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라 불릴 수 있겠지.
옛말에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 법이랬다.
나는 올해로 연기펜스의 보좌관 3년 차고, 제온은 집사가 된지 2년을 살짝 넘겼다.
우리는 분명 잘할 수 있을 거다.
“뭐···. 그래요. 아는 사람이 성공했다고 하면 슬쩍 발을 걸치고 싶을 수도 있죠. 직접 노력해서 성공하는 건 너무 막막하니까, 인맥을 통해 쉽게 쉽게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머리를 스쳐 지나갈 만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생각에서 그칠 테지만.”
그저 대사를 줄줄 읊기만 해서는 함께 무대에 오른 배우와 관객들을 몰입시킬 수 없다.
적당한 완급 조절을 통해 긴장감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관객 겸 엑스트라들을 쭉 둘러보았다. ‘이곳에 온 너희는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라는 뜻을 담아서.
이렇게 눈치를 준다고 부끄러워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안 왔겠지만.
“그러니까 이렇게 저를 찾아와서 없는 추억을 꾸며내어, 기억의 왜곡 효과를 유도하고. 그렇게 사기를 쳐서 만들어낸 친분으로 제게서 무언가를 뜯어내려 한 건···.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원래는 그럴 수 없지만,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그렇다 치자고요. 하지만 여러분이 원하는 그거, 제가 가진 것이 아니잖아요. 저를 통해 공작님의 것을 뜯어내려던 거 다 압니다.”
“나는 너랑 결혼하는 게 목적이었는데?”
시온의 짝사랑 영애가 반론을 제기했다.
일견 예리한 지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뭘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건 공작님의 보좌관이자, 미래의 보육 도우미인 저를 뺏어가려는 거잖습니까? 여기 모인 사람 중 그쪽이 제일 나빠요!”
“정말 진심이었구나···?”
“그렇다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합니까?”
“그렇···구나.”
같은 말을 반복하게 하여 짜증이 난다는 티를 팍팍 내고 나서야, 시온의 짝사랑 영애는 내 말을 겨우 믿어 주었다.
정말 질긴 상대였다.
“각설하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공작님의 등을 벗겨 먹을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공작님은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 지냈던 지난 25년으로도 모자라,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륙을 위해 희생을 자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쪽들이 대체 뭐라고, 공작님의 재물을 탐내고 권력을 이용하려 합니까? 예?”
나는 자칭 시온의 지인들을 쭉 둘러보며 모두에게 물었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없었다.
돌연 없던 양심이 생겨나 고통을 호소한 건 아닐 테고. 그저 내세울 말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리라.
자신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세르펜스와도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이라는 걸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공작님께서 성검의 주인이신 황태자 전하를 도와 목숨 걸고 싸울 때. 여러분은 뭘 하셨습니까? 모르실 것 같으니 제가 대신 정답을 알려 드리죠. 여러분은 황제 폐하 다음으로 고귀하신. 공작님과 황태자 전하, 두 분께서 힘들게 유지하고 있는 평화라는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즉 여러분은 이미 공작님을 실컷 부려 먹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대체 뭘 더 빼먹고 싶어서 이러시는 겁니까? 욕심도 정도껏 부리세요.”
내 말에 제온이 움찔 어깨를 들썩이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약간의 변형이 있긴 했지만, 원래 이 얘기는 내가 제온에게 하기로 계획된 대사였기 때문이다.
몇몇이 그런 제온의 반응을 보긴 했으나 상관없다.
어차피 제온도 세르펜스에게 가족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할 예정이었으니까.
진짜 막이 오르고 나면,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그랬던 거라고 충분히 포장할 수 있다.
그렇게 준비한 연극과의 연결성을 생각하며 다음 대사를 떠올려 보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아니라. 시온 경께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같은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다는 것 말고는 시온과 접점이 하나도 없고, 심지어 반조차 달랐던 놈이 목소리를 높였다.
개구리가 되기 전, 올챙이 시절을 떠올려 보라는 소리였다.
‘그래. 네가 여기서 제일 뻔뻔한 놈일 줄 알았다!’
놈이 시온과 전혀 모르는 사이라는 걸 알게 된 순간.
나는 놈이 오늘 최고의 진상이 되리란 걸 예상할 수 있었다.
“왜 안 되죠? 저는 공작님의 보좌관으로서, 그리고 신의 사자로서 제 역할을 다 하고 있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아니면요?”
“힘없는 가문의 둘째로 태어나, 가진 것 없는 약자의 설움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뜻이었습니다!”
본인의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세르펜스를 따라다니며 위험한 상황에 자주 노출된다는 건 고려하지도 않고.
나를 자신과 같은 급으로 깎아내리려 하는 작태가 추잡스럽기 그지없다.
“이봐요, 그쪽도 귀족 아닙니까? 정말로 어디 사는 누구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옷차림을 보면 귀족이 확실해 보이는데. ‘가진 것 없는 약자’가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면 양심이···. 아, 양심 없으시죠? 그래도 눈은 있으신 것 같으니까, 평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정도는 보셨겠죠. 그들과 비교해도 자신이 가진 것 없는 약자로 느껴지십니까?”
“그, 그건···. 비교 대상이 잘못되었잖습니까?”
“같은 사람과 비교했는데 대상 설정이 잘못되었다니. 혹시 사람이 아니라 개새끼세요? 개랑 비교해 드려요? 그래도 그쪽이 어지간한 개보다 많은 것을 가진 건 확실한 듯한데.”
“지금 절 모욕하시는 겁니까?!”
“그럼 목욕시키는 거겠어요?”
“······.”
말장난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이름 모를 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순간 무안한 기분이 들었지만, 티를 내면 지는 거다.
나는 그래서 뭐 어쩌란 거냐는 표정으로 당당하게 코웃음 쳤다.
“지금 그쪽을 모욕하는 건 다름 아닌 그쪽 본인입니다. 자신의 가문이 그렇게나 하찮게 느껴지세요? 가진 게 쥐뿔도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집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말 한 번 안 섞어본 사람에게 구걸하러 오신 거라면, 돈 안 드는 동정 정도는 기꺼이 해 드리죠. 정말 불쌍한 사람이니까.”
“이, 이이···!”
구걸하러 왔냐는 말에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돈도 안 되는 동정을 줬다고 화내는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온의 옆 반이었다던 놈은 꽉 말아쥔 주먹을 덜덜 떨며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나를 향해 달려들며 그 주먹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내 곁에 막강한 지원군이 있으니까 참는 거겠지.
계속 그렇게 분노 조절에 힘쓰도록 놈을 내버려 두고, 나는 다시 엑스트라들을 향해 말했다.
“선택의 날. 공작님은 성검이 다른 사람의 손에 갔을 때, 자신은 성검이 없어도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성검의 주인 내정자로 치켜세워지며 억지로 떠안았던 짐을 내려놓을 만도 한데, 그 무거운 짐을 계속 떠안고 모두를 위해 희생하겠다고 나서셨단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저를 찾아와 주신 여러분께서는 뭘 하셨죠? 실천에 옮기지 않았더라도, 자기 자리에서 이 대륙의 미래에 이바지할 방법이 있을지, 고민해 보려는 시도라도 해본 적 있습니까?”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래, 없을 줄 알았다.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여러분은 단 한 번도 완전한 약자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신세를 한탄만 할 뿐. 그 무엇도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하다못해 가만히 있기라도 하던가. 그런 주제에 한다는 짓이, 공작님의 보좌관인 저를 이용해 등쳐먹으려고 집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거라니. 누가 보는 장소에서 딱한 사연을 늘어놓으며 사정하면, 저와 공작님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뭐든 들어줄 거란 계산이라도 한 겁니까? 그런데 어째요? 사연 팔이는 시도조차 못 하고, 이렇게 욕만 들어 처먹고 있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는 한 명 한 명 그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사실 눈을 마주칠 생각이었으나 다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던 탓에 어쩔 수 없었다.
“없는 양심 찾아봤자 시간만 낭비니까 넘어가지만, 자신들이 얼마나 비겁한 사람인지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거짓된 친분을 내세우질 않나. 거짓으로 약자의 가면을 뒤집어쓰질 않나. 당신들은 전부 사기꾼입니다. 그런 당신네의 타겟이 된 우리 공작님이 너무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시선을 피해도 귀를 막지 않는 이상 목소리는 전달된다.
그래서 나는 계속 말했다.
“다들 아시잖아요? 공작님은 정말···, 지나칠 정도로 좋은 사람이란 거. 기나긴 시간 홀로 책임을 짊어지고 살아온 만큼. 그러고도 대륙의 모두를 위해 스스로 전장에 발을 내디딘 만큼. 공작님은 그 누구보다 행복해져야 합니다. 자신의 권리를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제발 우리 공작님 좀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알겠노라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만족스러웠다.
극에 난입했던 관객들이 슬슬 관객석으로 내려가고 있다는 뜻이니까.
“저는 공작님의 보좌관으로서, 당신들처럼 비겁한 사람들이 공작님의 것을 탐하도록 놔두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마무리로 쐐기를 박았다.
이 정도로 말해 놨으면, 앞으로 나를 통해 세르펜스를 이용하려는 마음을 먹는 사람은 없겠지.
덤으로 내 앞으로 날아오는 청혼서를 폐기하는 제온의 업무도 사라질 거고, 종이 낭비도 줄어들 테다.
‘하지만 여기서 끝낼 수야 없지. 진짜 무대는 지금부터니까.’
나는 흡족함에 위로 당겨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그리고 제온을 향해 슬쩍 눈짓을 보낸 뒤, 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공연히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다들 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요. 그리고 집사님도 이제 들어가세요. 저딴 거지 같은 놈들도 이 형의 지인이랍시고 달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실제론 지인도 뭣도 아니었지만. 그럼 저는 이만 갈 길 가 보겠습니다.”
“자, 잠깐!!”
내가 모두에게 해산하라고 말한 뒤, 마차에 올라타려 하자 제온이 크게 소리쳤다.
그 짧은 두 자. 더듬은 것까지 포함해도 고작 석 자에 불과한 그 외침에, 흩어지려던 관객들도 걸음을 멈추고 제온을 돌아봤다.
‘꽤 하는데?’
속으로는 제온을 칭찬하면서도 나는 인상을 쓰면서 제온을 노려봤다.
대신전에 가야 하는 일정이 자꾸 늦춰지고 있으니, 시계도 한 번쯤 다시 확인해 주는 게 좋겠지.
“급한 일 아니면 이따 다녀와서 들어도 됩니까?”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아, 진짜···. 딱 5분 드리겠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얘기하세요.”
나는 회중시계 뚜껑을 열어둔 채 신경질적인 투로 말했다.
고개는 계속 시계 쪽을 향하게 고정하고, 힐끔 눈동자만 굴려 제온을 쳐다보았다. 갑자기 생긴 시간제한에 몹시 당황한 눈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흘렀기에, 제온은 허둥지둥하다가 세르펜스를 향해 냅다 허리를 숙였다.
“그, 그러니까···. 주인님, 부탁드립니다! 저희 가족을 지켜주세요!”
대본에 있던 대사였다.
이제 내가 대사를 할 차례였으나,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인해 대본대로 진행할 수 없는 바.
지금 상황에 맞는 애드립은 이것뿐이다.
“제온···? 너도 저 사람들이랑 같은 생각이었어? 염치도 양심도 없는 비겁한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나와있던 게 아니라, 저들의 진상 짓에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정문 앞에서 기다렸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