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75)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76화(776/1105)
776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4)
연극을 마치고 마차에 올라타는 우리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무대에 난입했던 시온의 가짜 지인들도, 소란을 듣고 하나둘 모여든 행인들도.
길 가장자리로 비켜서며 마차가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작은 흔들림과 함께 마차가 움직였고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창밖의 풍경이 휙휙 뒤로 밀려나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별안간 새하얀 커튼이 시야를 가로막았다.
세르펜스가 커튼을 친 탓이다.
‘커튼을 치고 싶으면, 창가 쪽에 앉은 사람에게 미리 물어보는 게 예의 아닌가?’
얇은 쉬폰 소재의 커튼인지라 빛이 투과되었기에 마차 안이 어두워진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 싶다.
그래서 따지려고 고개를 돌렸다가 헤실헤실 웃고 있는 세르펜스와 눈이 마주쳤다.
“왜 웃어요?”
“당신이 많은 사람 앞에서 평생 제 곁에 머물며 저를 지켜 주겠노라 선언하셨잖습니까. 그게 너무 기뻐서···.”
요컨대 너무 기쁜 나머지 표정 관리가 잘 안 돼서 커튼을 쳤다는 소리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나머지 정신이 멍해진 탓일까?
뇌가 제 기능을 하지 않아, 필터링 안 된 날 것의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야, 좋냐?”
“네, 무척이나.”
내가 시온의 가족들을 대하기 껄끄러워 하는 것을 아는 까닭인지, 아니면 그냥 본인이 비비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마지막 대사를 말하는 녀석의 표정이 어두워 보여서 걱정했었는데.
아무래도 기쁨이 불안을 누르고 승리했나 보다.
세르펜스가 이렇게 연극을 하면서까지 시온의 가족을 돕고자 하는 건, 오로지 내가 그들을 신경 쓰기 때문이다.
내가 연극 중에 말했던, 세르펜스에게 더는 부담을 주지 않았으면 한다는 대사는 사실 그냥 대사가 아니다.
그 대사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사들에도 내 진심이 담겨있었다.
그래서 웃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놓였다.
‘하기야 비비와 리벨론 백작 부인이 저택에 오기 전에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니까. 행여 그 전에 오더라도 바쁘다는 핑계로 피해 다닐 수도 있고.’
이런저런 이유로 당장은 눈앞에 놓인 행복을 붙들기로 한 게 아닐까 싶다.
나중 일을 미리 걱정하느라 당장의 행복을 놓치는 건 크나큰 손해다.
그런 점에서 지금 녀석이 보여주는 태도는 아주 바람직한 삶의 자세라 말할 수 있다.
이제라도 세르펜스가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것 같아서 다행이다.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좋네.’
나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끼며 세르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녀석은 내 손길을 만끽하며 얼굴을 행복으로 물들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불현듯 녀석이 방금 내게 존댓말을 썼다는 게 떠올랐다.
분명 마부가 우리의 대화를 들을까 염려한 까닭이리라.
그러면서도 솔직하게 기쁘다고 말해주다니. 혹시 이건 기회가 아닐까?
“그런데요, 세르펜스. 이제 슬슬 제게 말을 편하게 놔 주실래요? 세르펜스가 타인을 존중하는 것도 알고, 신의 사자인 저를 존경하는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세르펜스와 좀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그러니 저를 신의 사자가 아닌, 보좌관이자 친구로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응? 세르펜스는 원래···.”
“네! 원래 모두에게 존댓말을 쓰는 사람이죠. 가장 가까이에서 세르펜스를 쭉 지켜봐 온 제가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오늘도 눈새눈새가 휴마누스짓을 하려고 하기에 나는 서둘러 그의 말을 끊었다.
더욱 확실한 입막음을 위해 시도했던 발 밟기는 미수로 돌아갔지만, 이는 항상 있었던 일인지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세르펜스는 원래 네게 하대하지 않았어?’라는 말을 끝까지 못하게 막았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이번에는 또 왜···?”
기막힌 회피를 선보였던 휴마누스가 억울하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따졌다.
나는 휴마누스에게 귀를 대 보라고 하려다가, 그 옆에 앉은 윈스톤과 눈을 한 번 마주쳐 주고 휴마누스를 턱짓했다.
윈스톤이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작은 목소리로 휴마누스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참 피곤하게도 산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휴마누스의 반응을 보아하니, 윈스톤이 내 의도를 제대로 알려준 모양이다.
나는 휴마누스에게서 신경을 끄고 다시 옆자리에 앉은 세르펜스를 보았다.
내가 이렇게 예고도 없이 모두의 앞에서 반말을 공개하자고 할 줄 몰랐는지, 녀석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런 녀석을 쓰다듬어 살살 달래며, 나는 내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말했다.
“왜요? 이제까지 관철해온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게 싫어서 그래요? 하지만 저 정도면 나름대로 세르펜스에게 특별한 존재라고 할 수 있잖아요. 그럼 예외로 삼아도 되는 거 아닌가?”
“나름대로가 아닙니다. 당신은 누가 뭐래도 제게 특별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럼 반말하실 겁니까? 지금부터 바로?”
“으음···.”
세르펜스는 그러겠노라 말하는 대신 침음을 흘렸다.
기분도 좋겠다, 증인이 될 마부도 있겠다. 그러면서 쓰담쓰담으로 정신을 딴 데로 돌릴 수 있으니.
천재일우의 기회라 여겼건만, 시기상조였던 모양이다.
기대가 컸던 만큼 비대하게 덩치를 키운 실망감을 뒤로하고 손을 거두어들이려는 찰나.
“그 대신, 당신도 제게 말씀을 낮춰 주시지 않겠습니까?”
“엥?”
“공적인 행사가 있을 때는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서로 존댓말을 써야겠지만···. 안 됩···니까?”
역으로 세르펜스가 거래를 제안해 왔다.
제온이랑 내가 서로 반말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통 부러웠던 게 아닌가 보다.
침음을 흘리며 머뭇거렸던 것이 내 반말을 듣기 위해서였다니. 그 발칙함에 ‘하!’ 하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로르가 자신에게 반말을 써 달라고 했을 때, 존대가 익숙하고 편하다는 이유로 거절했었는데. 이제 와서 세르펜스가 이렇게 나오시면 어떡합니까?”
“안 되는···, 겁니까?”
내가 불만스럽다는 티를 내자, 세르펜스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내 표정을 살폈다.
녀석에게 반말을 듣기 위해 들인 노력.
그리고 반말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가 매정하게 거절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몇 번 더 튕기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이 소심한 녀석이 토라져 버릴 테지.
그럼 다음 기회가 언제 또 올지 모른다.
“알겠어요. 세르펜스가 그렇게나 바란다면야 어쩔 수 없죠. 그럼 지금부터 반말한다?”
“그럼···, 나도 말을 놓겠다.”
세르펜스가 입으로는 조심스러운 말투를 구사하면서 두 눈은 초롱초롱 빛냈다.
짜식, 진작에 이럴 것이지. 고작 반말로 대화하는 것뿐인데 참 오래도 걸렸다.
나는 잘했다는 뜻으로 씩 웃어 보이며 녀석의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렸다. 머리가 망가져도 좋다고 웃는 모습이 순수한 어린아이 그 자체다.
“세르펜스. 저도 세르펜스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죠?”
조용히 나와 세르펜스를 지켜보고 있던 유지스가 툭 질문을 던졌다.
그 의도는 분명했다.
“유지스는 세르펜스가 급박한 상황에서 박력 넘치게, 첫 반말을 써 줬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랬었죠. 하지만 시온이 바다에 빠졌던 날 깨달았어요. 그러한 상황이 오려면 제가 위험에 빠져야 하고, 그럼 세르펜스가 굉장히 슬퍼하고 괴로워할 거란 사실을요. 게다가 저는 이미 한 번 심하게 다친 적이 있잖아요? 그때도 세르펜스가 힘들어했는데, 또다시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유지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내 물음에 대답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지스가 설정극을 포기할 줄이야. 정말 큰 결심을 했다.
“그럼 유지스도 제게 말을 놓으실 겁니까?”
세르펜스도 큰 결심을 했다.
그 누구보다 반말을 싫어했던 주제에 이제는 반말 수집가가 되어버렸다.
그런 녀석의 질문에 유지스는 상큼한 유자 미소를 날리며 입을 열었다.
“급박한 상황에 박력 넘치게 써 드릴 테니 기대하세요.”
“···저는 그런 취향이 없습니다.”
“제게 있으니까 괜찮아요. 아 참. 그렇다고 일부러 위험에 빠지지는 마세요. 전투 시 위기 사항은 포함하지 않고, 일상 속에서 기회를 찾을 거니까요.”
정정한다. 유지스는 설정극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만 배역을 바꿨을 뿐.
세르펜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유지스를 빤히 쳐다보다가, 돌연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라고 하면 되는 건가?”
“네!!”
세르펜스의 첫 반말을 듣고 감격에 겨워하며 유지스가 귀를 마구 파닥거렸다.
만약 유지스의 귀가 10센티만 더 길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파닥거리는 귀로 옆자리에 앉은 세르펜스의 턱을 사정없이 후려갈겼을 테니 말이다.
“나한테도 반말 써줘! 나도 세르펜스에게 소중하고 특별한 사람이잖아? 그래서 세례명도 알려준 거고! 그렇지?”
“저도···.”
나와 세르펜스, 유지스. 심지어는 세르펜스에게 반말을 졸라대던 휴마누스까지.
우리 넷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로 몰렸다.
모두의 주목을 이끌어낸 인기쟁이 윈스톤이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커튼이 드리워진 창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윈스톤의 피부는 구릿빛을 띠는지라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평소보다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에 휴마누스가 윈스톤을 가엾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던 걸까?
휴마누스는 윈스톤의 어깨에 팔을 걸쳐 어깨동무하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윈스톤 경도 세르펜스가 말을 편하게 해 주길 바랐구나? 하긴. 윗사람이 너무 깍듯하게 예의를 지키면 아랫사람은 오히려 불편하다고 하더라. 그동안 맘고생 심했겠네.”
“죄송하지만, 팔은 치워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언제 부끄러워했느냐는 듯. 윈스톤이 정색하며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휴마누스의 팔을 걷어냈다.
세르펜스가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보다, 직속 상사도 아닌 윗사람 휴마누스가 지나친 친근감을 표현하는 게 더 불편한가 보다.
나는 윈스톤에게 내쳐지고 의기소침해진 휴마누스에게 속으로 동정을 표했다.
“윈스톤 경은 괜찮지만, 휴마누스는 곤란합니다.”
“왜?!”
“실은···. 시온의 부탁도 있고 해서 말을 놓는 연습을 해 봤는데, 그러다 보니 하대 위주가 된 터라···. 아랫사람이 아닌 사람에게 사용하는 반말은 감을 못 잡겠습니다.”
“그냥 써! 내가 허락해 주겠다는데 무슨 상관이야?”
여차하면 자기 혼자 반말을 듣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다급해진 걸까?
휴마누스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려대며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르펜스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혹시 휴마누스는 아랫사람에게 역으로 낮은 대우를 받는 취향이라도 있습···, 있는가?”
“일단 내게도 반말을 써준 건 고마워! 고맙기는 한데···, 그게 왜 그렇게 되는 거야?!”
“그간 선례가 꽤 있었던지라···.”
세르펜스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이며, 나와 유지스에게 한 번씩 눈길을 던졌다.
몹시 억울하다.
나는 절대로 그런 취향 비슷한 것도 없건만, 도대체 이런 오해가 왜 생긴 건지 모르겠다.
“으음···. 그런 취향이 아니시라면, 당장 말을 놓는 건 불가능···.”
“아냐. 그냥 그런 취향 할게.”
당장 말을 놓지 못하겠다는 말은 곧, 하대가 아닌 예사 낮춤체나 비격식 반말을 연습해 오겠다는 뜻이건만.
휴마눈새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남다른 취향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그렇게 우리가 세르펜스의 반말을 쟁취하고자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동안.
마부는 착실하게 마차를 몰아서 우리를 대신전에 데려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