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7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80화(780/1105)
780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18)
* * *
공작저에 도착하여 마차에서 내리자 에일리히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 모습이 묘하게 어제와 겹쳐 보였다.
혹시 오늘도 유니어를 가지고 나온 건 아닐까 싶어 에일리히의 손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빈손이었다.
하지만 세르펜스에게는 유감으로 다가왔는지, 짧은 순간 녀석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준 선물에 저렇게까지 집착할 줄은 몰랐는데···.’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
세르펜스가 자신의 방에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인테리어 용도의 선물을 준 거였는데.
가까이 없다고 불안해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가히 애착 화분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아닌가? 애착 1순위인 내가 항상 옆에 있어주니까, 애착 화분이 근처에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는 건가?’
이게 맞는 것 같다.
그리고 녀석이 여타 7살짜리 어린아이와 다르게 일찍 철이 든 것도 한몫했으리라.
만약 일반적인 어린아이였다면, 화분과 나. 양쪽 모두를 포기하지 못하여 울고불고 난리를 쳤겠지.
식사실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나는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
‘아이가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손에서 놓는 게 아니라. 아이가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애착이 형성된 물건을 강제로 떨어뜨려 놓는 건, 사회성 저하 및 분리 불안 증세를 야기한다고 배웠는데···.’
지금 있는 분리 불안도 못 고치고 있는데 더 심각해지면 곤란하다.
다음부터는 그냥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선물을 줘야지 안 되겠다.
그렇게 생일 선물 선정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다 보니, 어느덧 식사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식탁 위에 떡하니 놓여있는 유니어가 눈에 들어왔다.
세르펜스가 그것을 발견하고는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그런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그때, 유지스가 나를 불렀다.
“저기, 시온. 에일리히 님께 전해야 할 말이 있지 않아요?”
유지스는 굉장히 입이 간질간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리안느의 은퇴 소식을 듣고 에일리히가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되어 견딜 수가 없나 보다.
“아, 맞다! 육아 문제로 생각할 게 있어서 고민하다가, 하마터면 깜박할 뻔했네요. 근데 유지스가 얘기해도 되지 않아요? 딱히 저에게 전달해 달라고 콕 찍어서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
“프라시더스 가문의 일을 제가 먼저 나서서 얘기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요.”
하기야. 유지스가 세르펜스를 노리고 있기는 해도 아직은 친구에 불과하다.
친구 삼촌의 혼인 문제를 거론하는 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이겠지.
나는 머쓱해하는 유지스를 향해 이해한다는 눈빛을 보낸 뒤, 마리안느의 전언을 말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멈칫했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딱히 프라시더스 가문의 일원은 아니지 않나?’
이런 건 가주인 세르펜스가 말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러나 녀석은 아직 에일리히의 혼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자칫 녀석이 은연중에 반대 의사를 흘리기라도 한다면 에일리히가 할 행동은 뻔하다.
‘자신의 의사 따윈 고려조차 하지 않고 조카가 바라는 대로 비혼을 선언해 버리겠지.’
아직 어린 세르펜스를 대신하여, 녀석의 보호자인 내가 나서는 게 맞는 것 같다.
에일리히도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권리가 있으니까.
“대체 무슨 얘기이길래, 서로 미루며 언급하길 꺼리시는 겁니까?”
“꺼리는 게 아니라 그냥 조심스러워하는 겁니다.”
내 대답에 에일리히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 모습에서 세르펜스가 겹쳐 보였다.
전대 프라시더스 공작을 생각하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확실히 피가 물보다 진하긴 한가 보다.
“아무튼 일단 말을 전하기 전에 하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예, 말씀하십시오.”
“에일리히 님, 결혼 생각 있어요?”
“네? 이 나이에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중요한 건 나이가 아니라 얼굴입니다! 젊은 거 말고는 볼 것 없는 생기다 만 귀족 자제들과, 오십이 넘어서도 찬란한 미모를 자랑하며 중후함까지 추가된 에일리히 님. 이 둘을 놓고 봤을 때 어느 쪽이 더 매력적인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세요. 백이면 백 에일리히 님이랑 결혼한다고 하지.”
“······.”
에일리히가 할 말을 잃고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세르펜스가 그러했듯, 혹시 에일리히도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뛰어난지 모르고 있던 걸까?
“에일리히 님은 엄청나게 잘 생겼어요. 세르펜스에 비하면 살짝 부족하긴 해도, 세계관 탑급입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잘생···.”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민망하니까 그 얘기는 이제 그만해 주셨으면 합니다.”
“엇, 그래요? 세르펜스는 모르고 있었길래, 에일리히 님도 모르시는 줄 알았지 뭡니까?”
어쨌든 알고 있었다니 다행이다.
모두의 앞에서 본인의 잘생김을 인정한 에일리히는 부끄러워하며 괜히 찬물을 들이켰다.
그리고 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실은···, 제 앞으로도 청혼서가 꽤 도착하긴 했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누군가와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세르펜스에게 피해를 줄까 봐 걱정되어서?”
“그런 이유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보다는 제게 그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체 에일리히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잘생겼지, 돈 많고 명예 높은 가문 출신이지, 예쁘고 똑똑한 조카도 있지.
이렇게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완벽남에게 결혼할 자격이 없다면, 이 대륙의 미래도 없는 게 아닐까?
내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그때.
에일리히가 씁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저는···, 이미 파혼한 전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제 독단으로. 상대방과 의논조차 하지 않고, 멋대로 의리를 저버렸던 제가 어찌 이제 와서 다른 누군가와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이라면, 마리안느 님이요?”
“···그걸 시온 님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본인과 만나서 그 얘기를 듣고 왔으니까 알죠.”
“그 사람이 지금 수도에 와 있습니까?”
“몰랐어요? 알타르 님이랑은 연락하고 지내시는 것 같던데?”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일리히가 도끼 눈을 뜨고 알타르를 노려보았다.
그에 조용히 스테이크를 썰어 먹던 알타르가 켁켁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고기가 목구멍에 걸렸나 보다.
하지만 알타르의 등을 두드려 주고자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는 없었다.
이단 심문관씩이나 되는 사람이 목구멍에 음식이 걸려서 죽지는 않을 테니, 이 틈에 나도 스테이크를 먹어야겠다.
예전에는 미디움 웰던 굽기를 선호했었는데 비싸고 좋은 고기를 써서 그런가, 미디움 레어를 먹어도 비리다는 느낌은 전혀 없다.
여리여리한 살이 입안에서 살살 녹았다.
이런 부드러운 고기를 먹으면서 어떻게 목에 걸릴 수 있는지 정말 미스터리할 따름이다.
“크흠! 흠! 당분간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과거 인연이 있는 지역에는 파견되지 않는 것이 원칙일 터인데···. 그분은 ‘심도 깊은 심문’에 소질이 없잖습니까?”
에일리히가 알타르에게 취조하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제국 출신인 에일리히가 대신전에서 머무를 수 있었던 건, 교단 제일의 고문 스페셜리스트였기 때문이다.
‘에일리히 님이 저리 말씀하시는 걸 보니, 마리안느 님도 수도에 진출한 제국의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인가 보네. 하지만 고문에는 소질이 없으시고.’
하긴 무기만 봐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어디 그게 악숭이가 죽지 않도록, 찔끔찔끔 고통을 주는 것에 소질 있는 사람이 쓸만한 무기인가?
단번에 머리통을 깨부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나 쓸법한 무기지.
“교황 성하의 호위로 와 계시는 겁니다.”
“그런 업무라면 반드시 마리안느 님이 아니어도 상관없을 텐데요.”
“그, 그렇긴 한데. 어차피 곧 은퇴하실 예정인지라···. 굳이 출신 지역을 따질 필요가 없어져서, 교황 성하의 배려로 대신전에 머무르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예? 은퇴라니, 대체 어째서···.”
“그야 에일리히 님과 다시 잘 해보려고 그러시는 거겠죠.”
알타르의 말에 에일리히가 미간을 팍 찡그렸다.
마치 ‘되지도 않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는 듯한 에일리히의 표정에, 알타르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두드렸다.
“넘겨짚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제게 에일리히 님께 잘 보이고 싶으니, 호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물어보셨단 말입니다!”
얘기가 흥미진진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들 음식을 먹으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세르펜스만 빼고. 녀석은 좀 심란한가 보다.
“그래서 알타르 님은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조카인 세르펜스 님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사주면 에일리히 님의 호감도 얻고, 덤으로 신의 사자인 시온 님께 점수까지 딸 수 있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뿌듯하게 말하는 알타르를 보며, 유지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해가 안 가는 반응이다.
‘적절한 조언 아닌가? 아이 있는 사람과 결혼하려면, 아이의 호감을 얻는 게 최우선이잖아.’
물론 세르펜스는 에일리히가 아닌 내 아이지만, 에일리히가 속한 프라시더스 가문의 가주니까.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에일리히의 혼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세르펜스다.
“알타르 님의 말이 맞습니다. 마리안느 님께서 가문 간의 약속이 어쩌고 하면서, 에일리히 님께 결혼할 준비 하며 기다리라는 말을 전해달라 했어요.”
“당시 혼인을 추진했던 가문의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는데, 구두로 진행된 약속이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약혼을 깬 것은 저이니, 의무에 얽매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지금 에일리히는 무슨 의도로 말하는 걸까?
한 번 깨졌던 약혼을 다시 진행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돌려 말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마리안느가 의무감 때문에 자신과 결혼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인지, 살짝 헷갈렸다.
‘표정이나 목소리 톤으로 봤을 때, 두 번째 이유로 저리 말하는 것 같은데···.’
에일리히의 얼굴에 환장하던 마리안느의 모습을 봤던 터라 황당함이 밀려들었다.
심지어는 휴마눈새까지 어처구니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와···, 내가 눈치 없는 행동을 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던 거야?”
“알면 고쳐.”
“아니마 님,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는 거 아니에요.”
“맞아, 휴마누스는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도 안 되는 거라고.”
휴마누스의 말에 성검 일행이 한 마디씩 말을 덧붙였다.
일부러 비꼬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배려를 하고 있는데도, 어째 더 배려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따뜻하다기보다는 따끔한 일행들의 조언과 위로에, 휴마누스가 기운 없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다들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저와 마리안느 님의 약혼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목적과 후계를 위해 성사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단 한 번도 제게 애정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어른들이 둘만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도,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가셨을 뿐이고···. 아무튼 그래서 저도 큰 고민 없이, 약혼을 깨고 교단에 귀의하겠다는 선택을 내릴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잘했다는 건 아닙니다. 그분의 사회적 체면까지 고려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마리안느 님께서 교단에 귀의하셨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던지···.”
“장담하건대 그 사람, 에일리히 님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말이 없었던 걸 겁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시온 님 같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아니, 진짜라니까요? 마리안느 님은 남은 평생 에일리히 님의 얼굴을 뜯어 먹고 살 생각이 만만했다고요!”
“마리안느 님께서 제 얼굴을···, 뭐 어쩌려 한다고요···?”
창백하게 질린 에일리히가 기겁하며 제 얼굴을 양손으로 감쌌다.
이 세상에는 얼굴을 뜯어 먹고 산다는 관용구가 쓰이지 않는가 보다.
나는 그 말이 ‘얼굴만 봐도 배가 부를 정도로 흐뭇하고 만족스럽다.’라는 뜻임을 설명하느라 진땀을 빼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