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8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83화(783/1105)
783회
81. 공작님과 작은 단서들 (21)
논리에서 밀린 것이 분했던 걸까?
휴마누스는 바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지 않고, 시선을 살짝 내리깐 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불현듯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응? 잠깐만! 그런 논리라면 그냥 일행들을 전부 모아놓고 얘기하는 게 낫지 않아? 우리 셋이 모든 서류를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이 많으면 더 좋잖아.”
“아니죠. 그러다가 다른 일행들이 그 시기에 있었던 사건을 찾아내면요? 단체로 계시를 받았다고 하게요?”
“그냥 네가 미리 말해줬다고 하면 되잖아.”
휴마누스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올바른 방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다.
“그렇게 설명하면, 교황을 비롯한 성직자들이 어째서 자신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은 거냐고 물어보겠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네. 그러니까 제가 먼저 듣고, 내일 대신전에서 일행들이랑 성직자들을 모아놓고 얘기할게요. 오늘 밤에 받은 계시 내용이라고.”
“그게 좋겠네.”
어찌 되었건 자신이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했는지, 휴마누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의견에 동의했다.
내가 모르는 자잘한 사건이 몇 개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만 듣고 세세한 내용까지 전부 기억하는 건 무리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테이블 앞에 앉아서 받아쓰기를 준비했다.
“자~, 그럼 어디 얘기해 주실까?”
“너 일부러 악당처럼 말하는 거야?”
“진짜 악당처럼 대해주기 전에 빨리 얘기하는 게 좋을 겁니다.”
“······.”
내가 농담한 것임을 눈치채지 못한 걸까?
휴마누스는 정색하며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이럴 땐 똑같이 장난으로 맞받아쳐 줘야 티키타카가 성립되는 법이거늘, 참 놀 줄 모른다.
“그러니까 세르펜스가 휴마누스랑 일 얘기나 하다가 씻으러 간 거잖아요.”
“지금 뭔가 건너뛰고 말하지 않았어?”
“됐고, 빨리 얘기나 해 봐요.”
내가 휴마누스의 질문을 무시하고 본론으로 돌아가 버리자 기분이 상했는지, 휴마누스의 입이 댓 발 튀어나왔다.
삐졌나 보다. 그래도 특유의 성실한 성격은 어디 가지 않았다.
휴마누스는 내가 받아쓰는 속도에 맞춰서 꿈에서 본 2회차 내용을 천천히 읊었다.
“자잘하게 참 많이도 돕고 다녔네요.”
“그만큼 그 시기에는 악마 숭배자들이 활개를 치고 다녔으니까. 아마 네가 받아 적은 것 중에는 현재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더 많을 거야.”
얘기를 하다가 자신이 삐친 상태였음을 까먹기라도 했는지, 휴마누스가 내게 고맙다는 시선을 보내며 답했다.
그 시선이 마치 내가 이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꿔 놓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받아쓰기를 마친 종이를 흔들며 말했다.
“내일 대신전에서 이 내용을 전달할 때, 그 부분도 고려해서 잘 얘기해 볼게요.”
“응. 그런 건 네가 나보다 더 잘할 테니까 알아서 해.”
“그건 그렇고, 마지막으로 본 큼직한 사건은 뭐예요? 제가 알 만한 거.”
“그런 건 왜?”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는지 궁금해서요.”
처음 몇 번은 휴마누스가 2회차의 기억을 보고 난 다음 날 아침마다, 꼬박꼬박 어디까지 봤는지 물었다.
하지만 꿈속에서 본 대륙의 상황이 갈수록 나빠진 탓일까?
휴마누스가 그 내용을 입에 담기 힘들어하는 게 보여서 물어보지 않게 되었다.
“바스툴 왕국에 내란이 일어나서 베일 왕자가 왕위에 오르고, 나를 지지해 주겠다고 선언한 부분까지 봤어.”
“생각보다 얼마 못 봤네요.”
“중급 악마가 소환되기 시작한 뒤로는 전투를 마칠 때마다 바로바로 끊었으니까. 시간대로만 따지면 지금보다 훨씬 이전인데, 마주친 중급 악마만 해도 벌써 두 자릿수에 가까워져 가는 거 있지? 하급은 스물이 넘어가고 난 뒤로는 세는 것도 포기했어.”
꿈속에서 싸웠던 악마의 수를 셈하는 것만으로도 지긋지긋하다는 듯, 휴마누스가 진저리를 쳤다.
현재 대륙에 소환된 악마는 얼마 전 연방에서 세르펜스가 해치운 하급까지 포함하여, 고작 여덟에 불과했으니.
새삼 2회차에서는 악마가 정말 많이 소환된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성검의 주인]을 읽었을 당시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주인공 휴마누스 혼자 하급 악마를 해치울 수 있는데 악숭이 따위는 위협도 안 된다.
그렇기에 매번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악마가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게다가 [성검의 주인]은 2부가 시작된 뒤로 일상적인 얘기는 거의 사라지고, 굵직한 사건과 전투 위주로만 진행되었으니.
어느 순간부터는 하급 악마조차 잡몹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함께 소환된 상위 악마에게 졸병처럼 부려지기도 했고.’
그렇게 속으로 [성검의 주인] 내용을 떠올리다 보니,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마침 세르펜스는 씻으러 가서 아직 나오지 않았다.
타락펜스와는 몇 번 마주쳤는지 물어보기 딱 좋은 타이밍이다.
5층에 있는 방은 모두 방음이 잘 되어 있지만, 욕실은 방에 딸려있는 공간이다. 방음 처리가 살짝 미흡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세르펜스의 청력은 평범한 사람과 비교할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으니.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목소리를 잔뜩 낮추어 물었다.
“세르펜스와는 몇 번 만났어요?”
“수도에서 마주치고 난 뒤로, 세 번 정도? 네가 그 시기의 세르펜스는 악마 숭배 세력에서 책사 역할을 수행했다고 해서, 마주칠 일은 얼마 없을 줄 알았···.”
“제가 일부러 목소리를 낮춰서 물어봤는데, 왜 그렇게 크게 답하는 겁니까?!”
“왜 작게 말해야 하는 건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 휴마누스가 멀뚱멀뚱 눈을 끔벅거렸다.
세상에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는 건가?
“그야 세르펜스가 듣지 않았으면 하니까···.”
“작게 말한다고 세르펜스가 듣지 못할 리가 없잖아?”
“그 정도로 욕실 방음이 안 좋아요?”
“지금 눈치 없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는 휴마누스의 표정에는 승자의 우월감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는 설마설마하며 욕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살짝 열린 문틈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깜짝아!! 다 씻었으면 나올 것이지, 거기서 뭘 하고 있는 겁니까?!”
“또 존댓말이군.”
“그야 놀랐으니까! 익숙한 말투가 튀어나오는 게 당연하지!”
“그것도 그렇군.”
누구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애쓰고 있건만.
세르펜스는 한가한 말투로 대답하며 욕실에서 나왔다.
“그래서 대체 왜 그러고 있었던 건데?”
“내가 없을 때 선우는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궁금해서?”
“나는 항상 똑같거든? 그런 걸 궁금해하는 걸 보면, 세르펜스는 내가 주위에 없으면 행동이나 말투가 많이 달라지나 봐?”
“음···.”
가볍게 받아치려고 던진 물음에 세르펜스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당연한 질문을 한 것 같다.
녀석은 대외 버전이 따로 있으니까···라고 생각한 그때.
“맞아, 엄청 다르더라.”
제보가 들어왔다.
심지어 불과 몇 분 전에 세르펜스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눈 휴마누스에게서.
“엥? 세르펜스는 이제 휴마누스 앞에서 대외 버전 연기 안 하잖아요?”
“응? 세르펜스는 네가 있어도 주변에 낯선 사람이 있으면 연기하잖아.”
“···그러게요?”
즉, 세르펜스에게 내가 모르는 버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나는 세르펜스를 돌아보며 눈으로 그게 사실이냐고 물었다. 녀석의 표정이 당황에 물들었다.
“휴마누스가 무언가 착각한 거다.”
“그렇게 당황에 찬 표정으로 말해 봤자 설득력 없어요.”
“정말인데···.”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면 의심만 짙어질 뿐입니다.”
“······.”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짓든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세르펜스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휴마누스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눈치를 줘 봤자 소용없다. 눈새가 괜히 눈새겠는가?
“제가 없을 땐 어떻게 다른데요?”
“세르펜스는 네가 없을 땐 저렇게 어린애 같은 표정은 안 지어. 목소리 톤도 살짝 침착해진다고 해야 하나, 차가워진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느낌이고 말투도 묘하게 더 딱딱해지더라. 표정 변화도 훨씬 적고.”
“그거 그냥 휴마누스를 싫어하는 거 아닙니까?”
“······!!”
신나게 고자질하듯 떠들어대던 휴마누스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내가 너무 직설적으로 보다.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살짝 돌려서 말할 걸 그랬다.
나는 휴마누스를 어떻게 달래야 하나 고민하다가, 세르펜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안 돼, 아도르. 친구랑 친하게 지내야지.”
“휴마누스가 싫어서 일부러 그런 태도로 대한 게 아니다. 그는 이제 내게 있어 소중한 친구 중 하나인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하겠는가?”
세르펜스 쪽을 찔러본 게 정답이었다.
녀석의 얘기를 듣고 휴마누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의문이 남았기에 재차 세르펜스에게 질문했다.
“그럼 왜 그랬는데?”
“내가 휴마누스에게만 유독 차갑게 구는 게 아니라 그 반대다.”
“반대면 내 앞에서만 태도가 달라진다는 거야?”
“그러하다. 이조차 내가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선우는 내게 특별한 존재니까. 함께 있으면 그 온기에 마음이 풀어지는 기분이 들어서,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더 자주 웃게 된다거나.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것뿐이다.”
난 또 뭐라고.
친구를 대할 때와 부모님을 대할 때의 태도가 달라지는 아이는 수없이 많다.
그냥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절대다수라 해도 좋을 정도로 대부분이 그러하다.
“어유, 그랬쪄요? 우리 공작님, 내게 어리광부리고 싶었구나?”
내가 어르듯 말하자 세르펜스가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바로 머리를 쓰다듬어 줬겠지만, 오늘은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녀석을 우쭈쭈 해주고 싶다는 충동이 찾아왔고, 나는 그것을 외면하지 않았다.
“···서, 선우?!”
“야, 그거 성희롱이야!”
난생처음 받아보는 궁디팡팡에 놀란 세르펜스가 후다닥 뒤로 물러났고, 휴마누스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내게 삿대질을 했다.
세르펜스가 놀란 건 그렇다 쳐도, 휴마누스의 말은 너무 지나쳤다.
“남의 애도 아니고 내 아이 엉덩이를 토닥였을 뿐인데, 무슨 놈의 성희롱입니까? 그리고 고양이는 원래 궁디팡팡 받는 거 좋아하거든요?”
“세르펜스는 네 진짜 애도 아니고 고양이가 아닌 사람이잖아!”
휴마누스가 소리쳤다.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나는 세르펜스를 쳐다보며 휴마누스의 저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눈으로 물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선우의 아이이자 고양이입니다.”
“거 봐요, 세르펜스도 인정하잖습니까? 본인이 제 아기 고양이라는 사실을.”
“대체 왜 그렇게 된 거야···?”
세르펜스와 내가 하는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휴마누스가 넋을 놓은 표정으로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정말 대답을 듣고 싶어서 질문한 게 아니라, 그저 혼잣말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눈치로 알 수 있었다.
그냥 저대로 내버려 두고 잘 준비나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