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92)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93화(793/1105)
793회
83. 공작님과 가면 무도회 (5)
머리를 펴는 건 세르펜스도 처음 해 보는 작업일 텐데.
전문 미용사가 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요령이 상당히 좋다.
욕심을 내서 머리카락을 한 번에 너무 많이 잡거나 세게 잡아당기는 일 없이, 적당한 양의 머리카락을 잡아서 적절한 속도로 슥슥 빗어 내리듯 집게를 움직였다.
‘과연 만능펜스!’
눈을 감은 채로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을 가만히 느끼고 있으니, 술렁이던 마음이 잠잠히 가라앉고 평온이 찾아왔다.
이래서 세르펜스가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걸 즐기게 된 거려나?
‘그나저나 이 검정 염색약은 대체 언제 사 둔 거람?’
오두막에서 머무르던 지난 일주일간 녀석은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
즉, 예전에 사놓고 계속 가지고 다녔다는 뜻이다.
언제 어디서든 변장할 수 있도록 염색약을 무슨 상비약처럼 가지고 다니는 녀석이니, 단순히 대량 구매를 하면서 딸려온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강 쿠키 미선이 일을 떠올리면, 작정하고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말도 없이 염색약을 머리에 들이부은 건 좀 그렇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나도 어제 가면을 쓴 상태로 거울을 보며 무심결에 머리카락이 거슬린다고 생각했으니까.
나름 이 육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따금 괴리감이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본래의 내 몸으로 살아온 세월만큼의 시간이 흐르면 익숙해질까?
“다 됐다.”
세르펜스의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랜 시간 공들여서 편 덕분인지 천연 생머리가 따로 없다. 머릿결도 평소보다 좋아 보였다.
이쯤 되니 대체 세르펜스가 못 하는 게 뭘까 궁금할 지경이다.
뭘 배워도 다 잘하니 어디 가서 굶어 죽을 일은 없겠다.
“세르펜스는 악숭이 본거지 바로 옆에 미용실을 차리고 운영해도, 의심받기는커녕 머리 맛집으로 입소문이 나서 악숭이 단골도 잔뜩 생길 거야. 아! 물론 얼굴은 가려야겠지만.”
“머리 맛집이라니···. 무슨 뜻으로 한 얘기인지는 알겠지만, 휴마누스가 진짜 머리를 먹는 건 줄 알고 오해하니까 그런 표현은 삼가길 바란다. 그리고 위장 창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디저트 가게가 좋다.”
사심 가득한 세르펜스가 단호하다 못해 강경하게 말했다.
그리고 어디선가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의 주인공은 휴마눈새였다. 세르펜스가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정말 오해했었나 보다.
“휴마누스는 눈치를 챙기시고, 세르펜스는 사심 집어넣고 헤어 왁스나 꺼내 줘.”
한 손을 들어 올리며 그리 말하자 세르펜스가 내 손바닥 위에 왁스가 든 통을 올려 주었다.
그저 열심히 펴 놓은 머리칼을 오래 유지하기 위함이라면, 이대로 세르펜스에게 맡겨도 상관없다.
하지만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뚜껑을 열어 왁스를 적당량 덜어내어 손바닥을 비벼서 넓게 편 뒤, 손가락을 세워 머리를 빗어 내리며 가르마 방향을 살짝 바꿨다.
원래는 머리를 감고 나서 대충 빗고 말리기만 하면 나오는 스타일인데.
이렇게 일부러 세팅하고 있자니 새삼 생머리가 편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비가 또다시 곱슬머리로 태어났다고 한탄한 것도 이해가 된다.
“아니마, 준비 끝났다고 에드나 씨에게 연락해 주세요. 그럼 전 손 씻고 올게요.”
나는 세르펜스에게 왁스 통을 돌려주고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에 묻은 왁스를 씻어냈다.
그러면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이러니까 진짜 내 몸으로 돌아온 것 같네.’
크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지만, 가면 아래로 보이는 하관은 여전히 시온의 것이라는 게 살짝 아쉽다.
그러고 보니 세르펜스가 받은 웨이터용 가면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디자인이던데. 이따가 한 번 써볼까 싶다.
‘괜한 짓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내가 세르펜스처럼 뛰어난 미모를 갖춰서, 얼굴에 대단한 애착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나도 내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그냥···.
수도꼭지를 잠그자 쏴아아 하고 쏟아지는 물소리가 멎었다.
그와 동시에 찾아온 정적과 함께 잡생각도 가라앉았다.
손의 물기를 닦아내고 방으로 돌아오자, 세르펜스가 후드가 달린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에드나 씨는 준비 끝났대?”
“그쪽도 지금 막 준비가 끝나서 연락하려던 참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지금 바로 출발할 테니, 5분쯤 기다렸다가 나오라고 얘기해 뒀다.”
여성 귀족들은 준비하는 데 심하면 몇 시간씩 걸린다던데.
드레스와 장신구를 고를 필요가 없고, 얼굴을 가려야 하니 화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가. 나와 엇비슷하게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억울하다는 표정을 한 아니마를 애써 못 본 척 지나치고, 나는 일행들에게 다녀오겠다는 말을 건넨 뒤 밖으로 나왔다.
여관 앞에는 미리 대기시켜 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가문의 문장은 그려져 있지 않았지만, 라빌루츠 남작가에서 보내온 마차다.
마차가 출발하고 단둘이 되자 세르펜스는 내 모습을 대놓고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뭘 봐요?”
“한 번 웃어보지 않겠는가?”
정말 가지가지 한다.
녀석의 요청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웃음 말고. 평소 자주 짓는 표정 있잖은가.”
“그렇게나 지금 이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내가 씨익 웃어주며 말하자, 세르펜스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만 보면 얘도 참 별나다. 진짜 내 모습을 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저토록 반가워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녀석이 내 모습을 계속 구경하게 내버려 두고, 나는 머릿속으로 오늘 내가 맡은 배역 설정을 떠올려 보았다.
‘제대로 된 연애도 못 해본 내가 과연 누군가를 꼬시는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대본이 없는 것은 아니니, 무슨 말로 꼬셔야 할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문제는 바로 그 대본 자체다.
차마 내 입으로 내뱉고 싶지 않은 대사들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았다. 너무 느끼해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다행히도 내가 극심한 멀미를 느끼기 전에 마차가 멈춰 섰다.
“그럼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그때까지 몸조심하고. 무슨 일 있으면 우선 소리를 지르고, 작전 생각하지 말고 검을 꺼내라.”
“네, 네. 알겠습니다요. 어서 잠입이나 하세요.”
내가 존댓말로 빈정거리듯 말하자, 세르펜스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얼굴 전체를 덮는 가면을 쓰고 검은 로브를 단단히 여몄다.
그리고 마차의 문을 열자마자 쏜살같이 튀어 나가더니 어둠 속으로 완벽하게 자취를 감췄다.
‘오늘 세르펜스가 맡은 배역이 웨이터가 아니라 괴도였나?’
나는 혀를 내두르며 마차에서 내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 문양도 그려지지 않은 밋밋한 마차들이 여기저기 멈춰서 있다.
그곳에서 내리는 사람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상태였다.
소란 피우는 사람이 없는 거로 보아, 세르펜스가 마차에서 나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는 모양이다.
저택 현관에서 초대장을 제출하자, 세르펜스와 똑같은 복장을 한 웨이터가 다가와 무도회가 열리는 홀까지 안내해 주었다.
“그럼 오늘 하루 마음껏 즐기다 가시길···.”
홀에 도착하자 웨이터는 다음 사람을 안내해 주기 위해 다시 현관으로 돌아갔다.
길을 헤맬 만한 구조는 아니었기에 굳이 안내가 필요하진 않았으나, 일종의 서비스 같은 거겠지.
겸사겸사 모험심 강한 누군가가 여기저기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막고.
‘에드나 씨는 아직 도착 안 했겠지?’
나는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입구가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벽에 기대어 섰다.
악단이 곡을 연주하고 있었으나, 무도회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아직 춤을 추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만큼, 다들 분위기를 살피며 오늘 파트너가 될 사람을 물색하는 중인가 보다.
덕분에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어도 의심스럽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네, 친구? 이런 곳엔 자주 오나 봐?”
내가 서 있는 곳이 입구가 바로 보이는 명당자리라서 그런가.
들어오자마자 내 근처로 직행하여 벽에 붙어 서는 이들이 꽤 되었다.
“어이!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을 해야지.”
“······.”
“이봐, 무시하지 말라고!”
“···저요?”
계속 옆에서 떠들어대는 말소리에, 설마 아니겠지 하는 심정으로 손가락을 들어서 나 자신을 가리켰다.
그러자 화려한 공작새 깃털로 장식한 가면을 쓴 놈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 곳에서 무슨 존댓말을 쓰고 그래? 명당에 자리를 잡고 있길래 꽤 놀아본 놈인가 했더니, 처음 오는 건가?”
“뭐···. 사업이 잘 안 풀려서, 이런 곳에서 놀 시간이 별로 없었거든.”
“그럼 지금은 잘 풀렸고?”
“···그런 개인적인 사정까지 파고드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잘 해결됐다고 하면 축하해 주려고 그랬지. 그런데 심사가 꼬인 거 보니 그냥 포기하고 손 놨나 보네! 하하하!”
진짜로 내 사업이 망한 건 아니지만, 남이 망했다는데 웃어 젖히다니.
매우 밥맛없는 놈이다.
“너 저리 가. 마음에 안 들어.”
“고작 웃은 거 가지고 뭘 삐치고 그래?”
“······.”
“알았어, 알았어. 웃은 거 사과할게.”
공작새 깃털 장식 가면을 쓴 밥맛없는 놈. 줄여서 공깃밥이 자꾸만 친한 척하며 말을 붙였다.
가라고 하고 말을 씹어도 꿈쩍도 안 하는 게, 잘못 걸려도 아주 단단히 잘못 걸린 것 같다.
“오늘은 사업 같은 머리 아픈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마시고 놀자고!”
“혹시 칵테일 필요하십니까?”
갑자기 웨이터 하나가 불쑥 끼어들더니, 공깃밥에게 칵테일 잔이 올라간 쟁반을 내밀었다.
낮게 깔리는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오랜만에 들었지만, 이건 분명 호위 도련님 버전의 세르펜스 목소리다.
그것을 인식하고 웨이터의 모습을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맞았다.
귀신 같다고 해야 할까, 홀로그램 영상을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녀석이 앞에 있다는 게 왠지 실감 나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바로 녀석의 모습을 놓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자, 자. 너도 한 잔 받아!”
공깃밥은 세르펜스의 모습을 확인하지도 않고, 쟁반에서 칵테일 두 잔을 집어 들더니 그중 하나를 내게 권했다.
다른 웨이터가 가져다준 술이라면 거절했을 테지만, 세르펜스가 갖다 준 거라면 괜찮겠지.
‘그리고 세르펜스가 이 공깃밥을 가만히 내버려 둔 걸 보면 위험한 놈은 아닌 거려나···?’
흑마력이 없는 민숭이는 세르펜스도 구분할 수 없다.
그러니 완전히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되겠지만, 여차했을 때 내가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는 건 확실한 듯하다.
괜히 공깃밥을 떼어놓으려고 자리를 옮겼다가 에드나의 입장을 놓칠지도 모르니, 그냥 옆에서 떠들도록 내버려 둬야겠다.
친해 보이는 놈이 하나 있으면 정체를 의심받는 일도 없을 것 같고.
“저기 입장하는 저 여자, 어때? 저런 파스텔 색조의 드레스는 이제 막 성인이 된 20대 초반 레이디들 사이에서 요즘 유행하는 건데.”
“난 연상이 좋아.”
“이 자식, 뭘 좀 아는데?”
입을 좀 닥치게 하려고 대충 던진 말이었건만.
공깃밥은 멋대로 공감대를 느끼며 성숙한 연상에 대한 찬미를 늘어놓았다.
나는 칵테일을 홀짝이며 놈이 떠드는 소리를 한 귀로 흘리는 한편. 입장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자 눈에 불을 켰다.
그렇게 몇 분이나 흘렀을까?
마침내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입구를 통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