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79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798화(798/1105)
798회
83. 공작님과 가면 무도회 (10)
소리 죽여 웃는 내 모습에 세르펜스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여 의아함을 표현했다.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가라앉히고 펜을 들었다.
[ 아냐, 아무것도. 그보다 그랬구나~, 우리 어리광쟁이가 이 형아랑 놀고 싶었구나?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할만한 놀이가 없으니 쓰담쓰담이라도 ]‘해줄까?’라는 글을 채 적기도 전에 세르펜스가 자세를 낮춰 머리를 들이밀었다.
얘도 참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변장 중이므로 세르펜스의 머리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나는 녀석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후 손을 거뒀다.
[ 벌써 끝난 건가? ] [ 지금은 잠입 중이잖아. 이따 돌아가는 길에 마저 쓰다듬어 줄게. ]세르펜스는 내가 적은 글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떼를 써 봤자 쓰다듬을 쟁취하기는커녕, 나중에 받을 수 있는 쓰다듬까지 압수당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거겠지.
나는 세르펜스의 응석을 간단히 해결하고, 우리가 필담을 나누는 사이에 소외된 에드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무슨 표정을 짓는지 모르겠지만.
세르펜스가 내게 놀아달라며 찾아온 이 상황에 에드나가 할법한 생각이야 뻔하다.
분명 아니마를 떠올리며 다른 일행들과 사이좋게 잘 기다리고 있는지 걱정하고 있겠지.
‘에드나를 위해서든, 아니마를 위해서든. 혹은 아니마를 달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동료들을 위해서든. 빨리 돌아가야겠네.’
하지만 찬물도 급히 마시면 체하는 법.
초대장을 받았으니 이것에 관해 얘기를 나누다가, 나중을 기약하며 무도회장을 떠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퇴장이다.
“저기, 어···. 섣불리 그, 뭔가를 하는 건 위험하다는 조언도 받았으니까···. 오늘은 이 정도로만 하고, 아까 받은 초대장이나 확인해 보는 건 어때요?”
“······.”
에드나는 무어라 대답을 하는 대신, 내 손에 든 펜을 검지로 가리킨 후 손바닥을 내밀었다.
뭔가 쓰고 싶은 말이 있으니 펜을 빌려달라는 뜻이다.
펜을 받아 쥔 에드나가 빠른 속도로 글을 써 내려갔다.
[ 어째서 말을 그렇게 하는 거죠? 마치 저랑 서··· <선우>? 이렇게 적는 거 맞나요? 어쨌든. 저랑 <선우> 씨가 뭔가를 하고 있던 것 같잖아요?! ] [ 다른 테라스에서 법숭이가 우리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긴 침묵으로 붕 뜬 시간을 얼버무리려면 이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제 본명의 표기법을 두 번째로 알게 되신 걸 축하합니다. ]나는 다시 에드나에게서 펜을 돌려받아 답글을 적었다,
테이블 옆에 서 있던 세르펜스가 슬로우 모션처럼 스르륵 천천히 주저앉는 게 보였지만, 일단은 무시하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에 마차에서 잘 달래면 어떻게든 되겠지.
[ 혹시 세르펜스 님이 저러시는 게, 제가 <선우> 씨의 이름을 적어서 그런 거예요? ] [ 네, 그렇습니다. ] [ 제가 모르길 바랐다면 애초에 적지 않으셨으면 됐을 텐데···. ] [ 항상 필담을 나눌 때마다 저를 그렇게 지칭했으니 익숙해져서 무심코 쓴 거겠죠. 아니면 자신은 제 본명 표기법을 알고 있다며 자랑한 거든가. 아무튼 그보다 대답 아직 안 하셨어요. ]좌절한 세르펜스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애당초 자기가 실수한 거다.
나는 에드나에게 더 이상 녀석을 신경 쓰지 말고 연기에 집중하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에드나가 이번에는 펜을 받아가 글을 적는 대신에 입을 열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요. 아 씹···지만, 오늘은 이 정도···만 하고 끝내기로 하죠.”
문맥의 흐름으로 봤을 때 에드나는 아쉽다고 말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인가 ‘아 씹···.’ 하고 욕을 하려다 만 것처럼 들렸다.
나는 그저 착각이겠거니 생각하며 아까 테일러에게 받았던 샴페인을 한 모금 마신 뒤, 검은 봉투를 다시 열었다.
에드나도 부스럭 소리를 내며 봉투 안에서 초대장을 꺼내 읽었다.
“날짜는 보름 뒤네요? 그때까지 또 한참 기다려야 하나···?”
“왕왕! 보름 기다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그렇게나 아쉬우셨어요?”
“아 씹···다마다요.”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되도록이면 에드나의 입에서 아쉽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주의하며 대화에 임해야겠다. 아니면 장난을 그만 치거나.
나는 진지하게 초대장에 적힌 글을 한번 쓱 읽고, 크게 반응해야 할 부분을 골라 어리둥절한 척 연기했다.
“그래도 드레스 코드가 있으니, 옷을 새로 맞추려면 빠듯할 겁니다. 저희야 있는 옷 중에서 적당히 규정에 맞는 옷을 골라 입으면 그만이지만, 이 부분을 보면 시중을 들 사람과 호위 기사에게도 각각의 드레스 코드가···. 아니, 뭐야? 살롱에 시종이랑 기사들까지 대동해야 돼?!”
“반응 속도가 왜 그래요?”
“숙녀분께 잘난척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탓에 이상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어요.”
“참···, 어수룩한 개자식이네요.”
에드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가 맡은 배역의 성격을 정의 내렸다.
이제까지 나온 내 배역 설정을 모아보자면 ‘야망 있는 개자식이지만, 어수룩한 면이 있음’인가?
내 앞에 앉은 누군가가 맡은 배역 설정에 비하면 귀엽기 그지없는 수준이다.
“제가 그런 면이 없잖아 있죠. 귀엽게 봐 주세요, 누님!”
“어째서 갑자기 호칭이 누님으로 바뀐 거예요?”
“언제까지고 숙녀분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고 투자자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벽을 치는 것 같고. 한 발짝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아양을 조금 떨어 봤습니다.”
“호칭을 바꾼 건 이해해 볼게요. 하지만 아직 제 나이도 모르시면서 누님이라 부르는 건···.”
“돈 많으면 다 형, 누님입니다.”
“가지가지 하는 개자식이네요.”
에드나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데 몸짓까지 신경 쓰다니. 역할에 제대로 몰입했나 보다.
그렇게 속으로 감탄하며 에드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주저앉았던 세르펜스가 스르륵 일어나더니 검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돈이라면 자신이 더 많으니, 자기도 형이라 불러줄 거냐는 뜻이다.
‘얘가 헛소리를 다 하네! 그렇게 따지면 휴마누스도 형이라 불러줘야 하게?’
어림도 없다. 나는 세르펜스의 검지를 접어주며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러자 세르펜스가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지가지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세르펜스 같다. 물론 이 녀석은 개자식이 아니라 새끼 고양이지만.
“가지가지 하는 김에 누님의 성함을 물어봐도 될까요? 부담스럽다면 제 이름을 알려 드려도 되고요.”
이쯤 했으면 됐다 싶어 나는 세르펜스를 향해 훠이훠이 손짓하며, ‘헤어지기 직전에 해야 할 대사’를 입에 올렸다.
세르펜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종이와 펜을 챙기고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췄다.
리에나와 테일러에게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알리러 간 거다.
“살롱 초대장을 받지 않았다면, 그쪽의 정체를 파악해 놓고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해 봤겠지만···. 어차피 살롱에서 만날 테니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에드나가 심드렁한 말투로 주어진 대사를 읊었다.
약간 성의 없이 들릴 수도 있지만, 뻣뻣하게 긴장하며 말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기도 하고.
자신은 개자식을 길들이는 쪽이지, 개자식에게 휘둘리는 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개성이 더 살아나는 느낌이다.
‘그러고 보니 에드나의 설정은 본래 준비했던 것과 정 반대가 되어버렸네?’
본래 에드나는 남편의 죽음 때문에 외로움과 불안정함을 느끼며, 충동적으로 가면 무도회에 참석했다가.
사기꾼 역을 맡은 나에게 잘못 걸리는 바람에 어물어물 휘둘려야 했다.
외로움을 타며 나쁜 사람에게 쉽게 휘둘리는 사람은 악숭 세력의 주요 표적이니, 분명 잘 먹힐 거라며 유지스가 자신했던 설정이다.
그런데 에드나는 자신만의 설정을 새로 쓰며, 악숭 사상에 잘 맞는 성향을 지녔다는 사유로 당당히 초대장을 받아냈다.
남이 짜준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든 설정으로 목표한 바를 이뤄내다니.
이제 에드나도 어엿한 일루미나티 일원이 다 되었다.
“누님, 정말 멋져요···!”
“대체 뭐가 멋지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보다 신발이나 다시 신겨 주실래요?”
“넵, 당연히 그래야죠!”
나는 다시 에드나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조심스레 구두를 신겨 주었다.
그러고 있자니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누나가 대학교 새내기였던 시절.
술을 진탕 마시고 만취한 채 돌아와 신발장 앞에서 뻗어버리는 바람에, 내가 신발을 벗겨줘야 했던 일이 몇 번 있었다.
‘그러면서 나중에 내가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 누나에게 똑같은 대접을 받으리라 다짐했는데···. 나는 아빠를 닮아 알코올 쓰레기였지···.’
아무튼 이 기억에서 중요한 건, 내가 누나의 신발을 벗겨 준 적은 있어도 신겨 준 적은 없다는 거다.
내 친누나에게도 안 해준 것을 다른 사람에게 해 주려니 기분이 뭔가 이상하다.
“이만 나갈까요?”
“그러죠.”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내밀자, 에드나가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나는 그대로 에드나를 에스코트하며 무도회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각자의 마차로 향하기에 앞서 저택 현관에서 잠시 멈춰 섰다.
“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렇게 주어진 마지막 대사를 말하며 나는 귀족 신분에 걸맞게, 오늘 하루 파트너가 되어준 에드나의 장갑 낀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내가 하면서도 어색하고 민망하기 짝이 없는 동작이다.
그건 에드나도 마찬가지였는지 움찔하며 손을 뒤로 뺐다.
“네, 그럼 보름 후에 다시 뵙도록 하죠.”
이로써 에드나 또한 모든 대사를 마쳤다.
애드리브가 난무하긴 했지만, 성황리에 연극을 마친 우리는 서로를 등지고 걸음을 옮겨 각자의 마차로 향했다.
마차에 올라타자 아니나 다를까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세르펜스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나는 녀석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문을 닫고 마차를 출발시켰다.
마차가 흔들리며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고, 세르펜스는 내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눈을 붙이고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휴식을 취하니, 마차는 금세 우리가 출발했던 여관에 도착하여 멈춰섰다.
나와 세르펜스는 마차에서 내려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방으로 향했다.
“언니이···! 보고 싶어어─!”
{ 나도 그래. 정말 빨리 보고 싶다. }
방에 들어서자마자 언니를 부르짖는 아니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여관으로 갔던 에드나의 목소리도 함께 들리는 걸 보니, 저쪽도 무사히 여관에 도착한 모양이다.
“어서 와, 수고했어. 살롱 초대장은 잘 받았어?”
휴마누스가 나와 세르펜스를 반기며 물었다.
나는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당당히 웃으며, 품속에 넣어뒀던 초대장을 꺼내서 흔들어 보였다.
“그야 당연히 받아 왔죠!”
“다행히 제가 짜 준 설정과 모두가 함께 만든 대본이 제대로 먹혔나 보네요!”
배역을 맡지 못한 탓일까?
유지스가 어떻게든 자신도 연극에 이바지했음을 어필하려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유지스의 기분에 맞춰주고 싶다.
그러나 살롱에서 써먹을 대본을 작성하려면 그래서는 안 된다.
에드나가 맡은 배역의 설정이 180도 바뀌어 버렸음을 설명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