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07)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08화(808/1105)
808회
84. 공작님과 살롱 (6)
어쩌면 악마가 주최자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다. 하지만 주최자를 마주하게 되자 생각이 바뀌었다.
고위 악마일수록 사람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을 고려해도 저자는 악마로 보이지 않았다.
‘그도 그러할 게 오만한 악마가 인간에게 사과의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오자마자 죄송하다고 말문을 연 것도 그렇고, 정신이 나간 듯 보이는 것과 별개로 말투와 태도 자체는 몹시 정중했다.
몸에 밴 습관처럼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게 연기는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저 성직자 같은 의상···.’
이것만은 아니길 바랐으나 짚이는 구석이라고는 하나뿐이다.
마인 러스티는 공국에서 실종되었던 성직자 중, 악숭이들에게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가 있다고 말했다.
역시 주최자는 그들 중 하나일까?
악숭이들의 고문에 견디다 못해 정신이 망가져서 저런 눈을 하게 된 걸까?
“모두 반갑습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려대자, 주최자는 내게서 관심을 거두고 살롱에 모인 이들 전체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들려왔다.
“아아···, 사제님! 오늘도 불민한 저희를 가르침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부디 저희에게 축복을 내려 주소서!”
악숭 귀족뿐만이 아니라 그들을 따라온 기사와 시종, 시녀들까지 ‘인도를! 축복을!’ 하고 외쳤다.
이내 그들의 목소리가 별장 안을 가득 채웠다.
졸지에 광기 어린 군중 사이에 끼어든 꼴이 되어버렸다.
악숭 살롱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다들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악숭에 동참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기껏해 봐야 피 좀 뽑고, 악숭 세력이 대륙을 지배하게 되는 날을 망상하며 떠드는 게 고작일 거라고 생각했건만.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다가 옆에 서 있던 공깃밥과 눈이 마주쳤다.
두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했다. 나보다 더 당황한 것 같다. 하기야 공깃밥은 이곳이 악숭하는 장소라는 것을 모르고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 이상··· 않···? 혹시······.”
공깃밥이 귓속말로 내게 무어라 말했다.
인도와 축복을 부르짖는 민숭이들의 목소리에 묻혀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다시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려는 그때.
“다들 조용, 조용! 한 달 만에 사제님을 만나 반가워하시는 그 마음은 이해하나, 오늘은 신입분들이 셋이나 있잖습니까? 모두 진정하고 신입 분들에게도 가르침의 기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십시오. 우리는 먼저 깨달음을 얻은 자로서, 이 어리석은 자들을 이끌어나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주최자의 시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사람이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저렇게 거들먹거리나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초전자였다.
좀 재수 없긴 했지만, 덕분에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민숭이들의 외침이 사그라진 것 하나는 고마웠다.
“미안, 주변이 시끄러워서 못 들었어. 방금 뭐라고 말한 거야?”
“여기 조금 이상···한 것 같다고···. 사제라는 호칭도 그렇고, 축복이라니···. 마치, 그···. 그거 같잖아.”
공깃밥이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대충 ‘그거’라고 얼버무리긴 했으나 사실은 ‘이단’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을 테다.
이 세상에서 축복을 내려달라는 말은 주로, 성직자들에게 앞날의 평안함을 기원해 달라고 부탁할 때 쓰인다. 덤으로 잔병 치료도 받고.
그런데 룩스메아 교단의 성직자 중에 ‘사제’라는 계급은 존재하지 않으니, 눈치채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다.
드디어 이 살롱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을 축하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나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공깃밥에게 더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들었으니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 흥분하여 소리를 질러대던 민숭이들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피식피식 웃기만 할 뿐.
적의를 불태우며 공깃밥에게 달려드는 이는 없었다.
“저희도 이 세계의 신은 하나뿐이라고 믿었던 시기가 있었지요.”
“사제님께서 보여주신 힘을 보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마신 테네브리오 님이시야말로 진정한 구원이자 진리입니다!”
“우리는 교활한 룩스메아 교단과 그들이 따르는 신에게 속고 있었습니다.”
“그자들이 말하는 규칙이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사람들을 편리하게 관리하기 위해, 우리의 발목에 채워둔 족쇄입니다! 함께 힘을 모아 우리가 빼앗긴 자유를 되찾읍시다!”
얘네가 대체 어쩌다 이렇게까지 악숭 사상에 심취한 건가 했더니.
마지막에 웅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드높여 개소리를 주장하는 사람 덕분에, 어찌 된 영문인지 잘 알 것 같다.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고 싶은데, 룩스메아 교단은 청렴과 결백을 지향하니까 마왕 쪽에 붙었다는 거잖아?’
쓰레기 인증 한 번 제대로 한다.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그 헛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기사들은 무력이라도 있지···. 시종과 시녀들은 대체 왜? 특히나 조금 전까지 나랑 같이 바닥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더더욱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신이 소속된 귀족가의 힘을 자신의 것이라 착각이라도 한 걸까?
아니면 악숭 세력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약속했다거나.
혹은 모시는 귀족을 따라 살롱에 참석하여 악숭 사상을 듣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세뇌된 걸지도 모른다.
그조차 아니라면 자신보다 더 아래에 있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겠지.
“아까 그냥 돌아갔어야 했는데···.”
공깃밥이 식은땀을 흘리며 후회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가면 무도회에 참석한 그때부터, 자신은 이미 악숭이들에게 찜 당한 지 오래라는 사실을 알면 저런 소리는 못 할 텐데.
모르는 게 약일 테니 알려주지 말자.
“불안해 보이시는군요? 사제님의 축복을 받는다면, 편안해질 겁니다.”
“맞아요. 축복을 받으면 모든 걱정과 고민이 사라진답니다. 평생 느껴본 적 없는 극도의 환락을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민숭이들이 공깃밥에게 축복을 권유했다.
옆에서 그 얘기를 듣고 있는데 단어 선택이 예사롭지 않다.
극도의 환락을 느끼게 하는 걸 과연 축복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혹시 축복이란 이름의 마약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의심이 들었고, 그건 공깃밥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게 무슨 축복이야?! 단체로 마약에 취하기라도 한 거야?”
공깃밥의 외침에 장내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미소를 띠던 악숭 귀족들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이거 안 되겠네요. 아무래도 그들의 사상에 단단히 세뇌된 모양이에요. 과격한 수단을 동원할 수밖에 없겠어요.”
“전부 신입분을 위한 것이니,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도 우리에게 분명 감사할 겁니다.”
과격한 수단이라는 단어가 언급되기 무섭게, 악숭 기사들이 출구와 커튼으로 가려진 창문 쪽을 막아섰다.
그들은 악숭 귀족들이 각자의 가문에서 한 명씩 데려온 것이니, 그들이 입고 있는 제복을 자세히 보면 전부 다른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제복의 기본 형태는 거기서 거기다.
검정 제복에 검정 가면. 그리고 붉은 어깨띠를 매고 나란히 서 있자, 하나의 기사단에 소속된 이들처럼 보였다.
“네가 데려온 기사, 강해?”
“저 덩치를 보면 알잖아?”
“···엄청 강해 보이네.”
내 대답에 공깃밥이 윈스톤을 힐끔 쳐다보더니 살짝 안도하듯 말했다.
신성력과 오러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는 덩치가 곧 강함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으나, 그래도 윈스톤의 덩치는 공깃밥에게 믿음을 주기에 충분했다.
“좋아, 그럼 힘을 합쳐서 도망치자. 내가 데려온 기사도 상당히 강하거든.”
“어어···, 지금 당장?”
“당연한 거 아니야?!”
내가 미적거리자 공깃밥이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쳤다.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악마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적당히 싸워서는 악마가 내려오지 않을 테고, 그렇다고 제대로 실력을 발휘하면 이상함을 감지한 악마가 도망쳐 버릴지도 모른다.
‘그냥 에드나더러 화끈하게 천장을 날려버리라고 할까? 그럼 폭발의 반동을 추진력으로 삼아 더 빠르게 도망치려나?’
어떻게 생각해도 도망 엔딩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치사하고 구차한 악마들 같으니. 오만하게 굴 거면 끝까지 방심하다가 얌전히 죽어줄 것이지, 왜 툭하면 도망치려 들어서 일을 번거롭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표본이다.
“대체 뭘 망설이는 거야?! 혹시 너도···?”
“난 이단이 아니야!”
“그럼 왜 도망치지 않겠다는 건데?”
“좀 더 때를 두고 보자 이거지. 적당히 기분을 맞춰 주다가, 저들이 방심했을 때 도망가는 방법도 있잖아?”
“그런 기회가 올 것 같아? 우리가 축복인지 뭔지 하는 마약에 취해서 바닥에 널브러지는 게 더 빠를걸?”
지극히 타당한 얘기다. 나도 세르펜스와 함께 있는 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꽁무니를 사렸을 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마약은···. 첫날이니까 봐달라고 하면 하루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지 않을까?”
“네가 저 사람들 입장이었다면 그렇게 하겠어?”
“그, 글쎄? 난 이단이 아니라서 모르겠는데? 하지만 잘 생각해 봐. 아무리 네가 데려온 기사와 내 기사가 강하다고 한들, 적의 수가 몇 명인데. 너랑 나랑 우리가 데려온 시종들까지.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을 지키면서 도망치는 게 가능할 것 같아? 게다가 어찌어찌 별장 밖으로 나가 봤자 여긴 산속이라고. 잊은 건 아니지?”
“그, 그건···.”
공깃밥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퇴로를 막은 악숭 기사들과 잔뜩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공시종을 눈에 담고, 내 시종 역을 맡은 세르펜스에게도 시선을 보냈다.
공시종에게 질세라, 세르펜스가 더욱 몸을 움츠리며 달달 떠는 시늉을 했다.
“주, 주인님···.”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과도한 메소드 연기다. 무시하자.
“오늘은 그냥 ‘아, 마왕님 참 대단하시죠. 아무렴요.’ 하고 아부 몇 마디 대충 던져주고, 집에 가는 길에 신전에 들러서 신고하는 게 제일 안전해.”
“그거야 그렇···지만, 그 얘기를 그렇게 대놓고 하면 어떡해?!”
“아차! 말하면 안 되는 건데, 실수했다. 네가 자꾸 도망가자고 부추기니까 일이 이렇게 된 거잖아?”
사실은 일부러 말한 것이나 그걸 곧이곧대로 밝힐 수는 없다.
그래서 자연스러워 보이기 위해 남 탓을 하기로 했다.
이는 무척이나 효과적이었고, 반응도 바로 나타났다.
“저 두 분에게 자유는 사치인 것 같습니다.”
“어머, 조련이 필요하겠네요. 진정으로 교화될 때까지 돌려보내지 않겠어요.”
악숭 귀족들의 대화를 들은 공깃밥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비틀거렸다.
얼굴 반쪽을 가린 검은 가면 때문에 색이 대비되어 안 그래도 나쁜 안색이 더 나빠 보였다.
공깃밥을 부축하는 공시종의 가면 너머에서 가느다랗게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한 명이라도 짐이 줄어들면,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까요···?”
“뭐라고?! 너, 너 설마···.”
“저, 저는 여기서 죽어도 괜찮으니까 도망가세요. 저하처럼 귀한 분이 악마 숭배자들의 장난감이 되는 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잖아요.”
“크윽···! 이런 곳일 줄 알았으면 여기에 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공깃밥이 분하다는 듯 이를 갈며 후회의 말을 내뱉었다.
나는 그저 연기를 하고 있을 뿐이지만, 저들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이다. 그런데 너무 내 맘대로 일을 진행했나 싶어서 멋쩍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해서 연기를 멈출 수는 없다.
“저하? 방금 저 시종이 그쪽을 그렇게 부른 것 같은데···.”
“···그래. 나는 이 왕국의 8왕자, 루블리크 펠로다! 네 가문의 사람들은 내가 잘 챙겨줄 터이니, 네 기사를 내게 빌려다오!”
공깃밥이 가면을 집어던지며 말했다.
가면을 벗는다고 해서 내가 8왕자의 얼굴을 구분할 수 있게 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예의상 헛바람을 들이마시며 놀란 척해줬다.
그러다가 무언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어? 잠깐만요, 왕자 저하. 빌려···요? 그리고 제 가문의 사람들을 왜 왕자 저하께서 챙기는 건데요···?”
“악마 숭배자들이 나를 세뇌한 뒤, 나를 제외한 모든 왕족을 죽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 나라를 위해 네가 희생해라.”
미안하던 마음이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