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13)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14화(814/1105)
814회
84. 공작님과 살롱 (12)
“의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장내를 정리하겠습니다.”
사제가 악마의 앞에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어앉으며 마치 허락을 구하듯이 말했다.
그에 악마는 오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장내 정리를 한다기에 사제가 민숭이들을 시켜서 청소라도 하는 건가 싶었으나, 행동에 나선 것은 엉뚱하게도 법숭이었다.
법숭이가 스태프로 바닥을 찍자, 바닥에 깔린 카펫에 복잡하게 얽힌 검은 선들이 생겨났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 선을 피하고자 밧줄에 묶인 몸을 비틀다가 옆으로 고꾸라졌다.
다행히도 옆에는 세르펜스가 있었고, 녀석의 무릎 위로 엎어진 덕분에 검은 선에 직접 닿는 상황은 면했다.
대신 세르펜스는 검은 선 위에 앉아있긴 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니 검은 선을 피하려고 애쓴 사람은 나와 밥 트리오뿐이었다.
완전히 피하는 데 성공한 건 나뿐이고.
밥 트리오는 균형을 잃고 넘어져, 검은 선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세르펜스는 그렇다 쳐도, 윈스톤과 푸로르도 가만히 있는 거로 봐서 닿는다고 해가 되는 건 아닌가?’
침착을 되찾고 검은 선을 자세히 살피니, 그것이 그려진 건 카펫 위가 아니라 그 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바닥에 미리 그려뒀던 마법진이 흑마력을 흡수하여 검은빛을 뿜었고, 그 빛이 카펫을 투과하여 올라온 거였다.
‘그렇다면 선 위에 앉아 있는다고 해서 해를 입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찜찜하니까 계속 이러고 있어야지. 어차피 묶여있어서 자력으로 일어날 수도 없지만.’
마음을 편히 먹고 무슨 일이 일어나려나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니, 천장에서 밝게 빛나던 샹들리에 불빛이 훅 꺼졌다.
캄캄한 어둠이 찾아오려는 찰나, 벽면에 걸린 촛대들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소파며 테이블이며 그 외 장식품들까지. 모든 가구가 둥둥 떠올라 구석으로 옮겨졌다.
‘법숭이가 악숭 기사들을 배려하느라, 그들이 해도 될 일을 마법으로 처리하는 건 아닐 테고···. 분위기 조성용인가?’
겉멋이긴 해도 확실히 있어 보이긴 했다.
마법 효과는 그게 다였는지 바닥에서 올라오던 마법진의 빛이 꺼졌다.
타이밍을 계산이라도 한 건지 때마침 계단에서 사람들이 내려왔다.
그들은 밖에서 마차를 대신 주차해 준 민숭이들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손에 쟁반이 들려있었다.
그냥 민숭이라고 부르면 살롱 참석자들과 헷갈리니까, 지금 계단에서 내려오는 자들에게 임의로 심부름꾼 민숭이라는 명칭을 붙여줘야겠다.
살롱 참석자들은 살롱 민숭이라 부르고.
‘적당히 심민숭과 살민숭이라고 줄이면 되려나?’
아무튼 쟁반에 올려진 물건이 굉장히 귀중한 것인지, 한 칸 한 칸 계단을 내려오는 심민숭들의 발걸음이 무척이나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귀한 취급도 무색하게 쟁반이 놓인 곳은 그냥 바닥이었다.
맨바닥은 아니고 카펫 위였으나 신발 밑창과 닿는다는 점에서 더러운 건 똑같다.
살민숭이라고 그 점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그들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심지어. 아니, 오히려 악숭 귀족이 앞장서서 쟁반 바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악숭 수행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귀족의 양옆에 무릎을 꿇었다.
– 탁.
심민숭들은 나와 밥. 그리고 에드나를 둘러싼 방음막 앞에도 쟁반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쟁반에는 와인색의 벨벳 천이 깔려있고, 그 위에는 무슨 우승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거대하고 화려한 금속 잔과 단검이 올려져 있었다.
일렁거리는 촛불 빛 때문일까?
새까만 잔과 단검에 박힌 새빨간 보석이 금방이라도 피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다.
할 일을 끝낸 심민숭들은 창가에 붙어 섰다.
이제 의식 준비가 끝난 모양이다.
“아직 믿음이 부족한 자들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지?”
악마가 못마땅하다는 시선으로, 흑마력을 머금은 마법진의 빛을 피하려다 고꾸라진 나와 밥 트리오를 흘겨보며 말했다.
“저분들은 자신의 본성이 저희와 비슷한 성향을 띠고 있음을 인정했으나, 룩스메아 교단이 퍼트린 편견에 사로잡혀 진리에 눈뜨지 못한바. 일일 체험을 통해 진실을 듣고 마신 테네브리오 님의 위대함을 알고 나면, 신앙이 생길 것 같다고 하시기에···.”
“일일 체험?! 언제부터 테네브리오 님의 교단에 그딴 게 생겼지?”
사제의 대답에 악마가 장난하는 거냐는 듯, 눈을 매섭게 뜨며 사제를 노려보았다.
피처럼 붉은 악마의 눈동자에 검은 마기가 차오르며 새까맣게 물들었다.
자신에게 동의도 구하지 않고, 독단으로 일일 체험 따위를 허락한 사제의 행동에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그, 그게···. 다들 일일 체험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그, 그래서···.”
“보아하니 저들은 축복도 받지 않은 것 같은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혼미해지면 자신이 어떤 교리에 감화되었는지 잊어버릴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마신 테네브리오 님의 교리를 듣는 첫 순간을 명료한 정신에 똑똑히 새기고 싶다고 하여···.”
“그래서 그냥 놔뒀다고?”
악마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사제가 나와 에드나의 말에 넘어갔던 건 당시의 분위기와 에드나의 열연 덕분이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악마가 요약된 설명을 들어봤자 어처구니만 잃을 뿐이다.
“어차피 저들은 돌려보내지 않을 겁니다! 최소 한 달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게 하며, 마신 테네브리오 님의 위대함을 영혼 깊숙이 새길 예정입니다. 그러니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해서···.”
“저자들이 한 달씩이나 실종되면, 수색이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은 것이냐?”
“그, 그게···. 각자의 가문에 편지를 쓰게 하면···, 컥!”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다는 듯, 악마가 사제의 목을 틀어쥐었다.
폭력의 주체가 숭배의 대상인 악마이기 때문일까?
살민숭들은 조금 전까지 자기네가 존경심을 보내던 사제가 공중에 들려 바동거려도, 두둔하고자 나서지 않았다.
악마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사제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이자의 말대로 하면 해결이 되는 게 맞느냐?”
“다른 자들이라면 모를까, 8왕자는 오늘 내로 교정을 마쳐야 합니다. 당분간 일이 있어 돌아가지 못한다는 편지를 보내더라도 1왕자는 믿지 않을 겁니다. 자신의 경쟁자 중 누군가가 동생을 납치했다고 판단하여 수색대를 보내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더 신경 써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며 조언을 드렸는데···.”
물음에 대답한 건 악마의 뒤에서 공손한 자세로 서 있던 법숭이였다.
놈은 차가운 눈으로 악마의 손아귀에 붙잡힌 사제를 바라보았다.
숨통이 반쯤 막혀서 힘겹게 호흡을 이어나가느라, 시뻘게졌던 사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조언을 드렸다는 표현만 두고 보면, 대외적으로 사제와 법숭이의 위치는 동일하거나 사제가 조금 더 위인 것 같은데···.’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법숭이의 시선이 닿자마자 손까지 파들파들 떨어대는 걸 보면 말이다.
어째 악마의 시선이 닿았을 때보다 더 겁먹은 듯하다.
‘혹시 악숭 사제가 되기 전에, 저 법숭이에게 고문을 당하기라도 한 건가?’
그런 게 아니고서야 사제가 악마보다 법숭이를 더 두려워할 이유는 없다.
악마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사제를 조용히 노려보다가, 마치 길거리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듯 가벼운 손목 스냅만으로 그를 집어 던졌다.
쿠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사제는 바닥을 나뒹굴었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의식을 마친 후 제대로 가르치도록.”
“관용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제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며 허리를 깊이 접어 인사했다.
그런 사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악마의 볼 근육이 올라가며 한쪽 입술이 들려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아무래도 사제를 죽이고 싶지만, 억지로 참아내는 듯하다.
살민숭들의 눈치가 보여서라기보다는 악숭 사제의 수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테다.
“너도 같이 도와라.”
“하이마 님께서 신경 쓰이지 않도록 온 정성을 쏟겠습니다.”
사제가 못 미더웠는지, 악마가 법숭이에게도 밥에게 악숭 사상을 주입하라 명령했다.
법숭이가 순종적으로 대답하며 사제를 향해 조롱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악숭 세력 안에서 사제가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다.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이 평생 따르던 신을 저버린 배신자.
신앙심보다 자신의 안위를 우선한 겁쟁이.
사제를 바라보는 법숭이의 눈빛과 표정, 태도 속에 그러한 생각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근데 저놈은 뭐길래 묶여있는 주제에 편하게 시종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어?! 일으켜 앉히고 의식 진행해.”
“네, 네!”
짜증스런 악마의 말에 사제가 날래게 움직여 나를 일으켜 다시 무릎을 꿇게 한 뒤.
바닥에 쓰러진 채 다시 일어나려고 낑낑거리던 밥 트리오까지 덤으로 일으켜 주었다.
누워 있던 자세가 다리도 안 저리고 좋았는데 아쉽다.
하지만 다리가 저려서 무릎 꿇기 싫다고 하면 사제가 변성력으로 나를 치료하려 들 테니,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제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사제의 태도에 악숭 귀족들이 눈치를 보면서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것을 높이 치켜들어 곁에 있던 시종 혹은 시녀를 찔렀다.
어떤 자는 복부를, 또 어떤 자는 팔을, 허벅지를. 그 외에도 다양하게 찔러댔다.
악숭 시종과 악숭 시녀는 그렇게 찔려서 나온 피를 커다란 잔에 받았다.
흐른 피 대부분은 바닥에 쏟아졌으나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잔이랑 단검이 있길래 피를 받는 용도일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각자 찌를 줄 알았는데?!’
피를 보고 났더니 흥분했는지, 귀족들은 언제 눈치를 살폈냐는 듯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다음 타겟을 찾았다.
사제가 혼자 바쁘게 돌아다니며 시종들을 치료한 수고가 무색하게도, 이번에는 기사들이 피를 흘렸다.
일이 이따위로 진행되는데 이제껏 사망 사고가 없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고 잔은 가득 차서 찰랑거렸다.
악숭 귀족은 그제야 자신의 팔뚝을 단검으로 그어 피를 받고, 잔이 넘치자마자 본인의 상처를 지혈했다.
“저런 치사한···?!”
“치사하다니요? 저희와 같은 귀한 이들의 피와 천한 것들의 피는 그 가치가 다르니, 악마님께 바쳐야 하는 혈액의 양도 달라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결집충이 사제에게 치료를 받으며 묻지도 않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사람들은 결집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다.
모두의 관심은 나와 밥 앞에 놓인, 비어있는 잔에 쏠려있었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은 묶여 계시니 도움이 필요하겠군요.”
“그런데 8왕자 저하는 사제님과 흑마법사님께서 손수 교육하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런데 저희가 손을 대도 되는 건지···.”
“사제님은 너그러우신 분이니, 시종과 기사들은 저희 몫으로 배분해 주실 겁니다.”
악숭 귀족들의 말에 밥과 밥시종이 바들바들 떨었고, 밥기사가 이를 악물고 놈들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마력 구속구를 차고 밧줄에 묶인 채로 그래 봤자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저쪽 예비 신입님은 어떻게 할까요?”
“저분은 신입님 몫이잖아요. 신입님은···, 아···. 아직도 저러고 계시네.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기 어려운가 봐요.”
“이건 의식을 돕는 것일 뿐이고 신입님은 환희에 젖어 정신을 못 차리고 계시니, 저희가 나서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악숭 귀족들이 벌게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천천히 다가왔다.
에드나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 상황이고, 도움을 받아 봤자 나를 찌르는 사람만 달라질 뿐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여차하면 밧줄을 끊어버리고 죄다 쓸어버리겠다는 듯, 세르펜스가 단검을 힐끔거리며 꼼지락거렸다.
전투를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어 나가려면, 첫 공격은 무조건 악마에게 기습적으로 행해야만 한다.
가장 효과적인 한 수를 고작 살민숭들에게 써먹을 수는 없다.
“저는 악마님이 담당해 주시면 안 될까요?! 방금 사제님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그 위압적인 모습을 보고, 누군가의 개가 된다면 저런 분의 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해버렸습니다! 악마님께서 직접 제 피를 거두어 가 주신다면 무척이나 영광스러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날카로운 송곳니로 저를 물어주세요!”
“뭐, 뭐야···? 내가 왜 너를 물어야 하는 건데?”
“그게 바닥에 흘리는 피 손실도 없고, 깔끔하니 좋잖습니까? 제 생명에 지장이 없는 한도 내에서 쪽쪽 빨아 마셔 주세요!”
“···어째서 내가 피를 마신다고 생각하는 거지?”
악마가 비위 상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마시는 게 아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