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ke, Please Repent! RAW novel - Chapter (819)
공작님, 회개해주세요!-820화(820/1105)
820회
84. 공작님과 살롱 (18)
주요 전력인 아니마를 놓고 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따질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저 서둘러 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아니마도 사태의 심각성을 아는지 휴마누스에게 기다리라고 소리치는 대신, 자신도 최대한 빨리 가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말한 뒤 통신을 끊었다.
내심 에드나의 안전을 계속 확인하고 싶었을 텐데.
행여나 에드나가 통신을 유지하느라 마력이 고갈되면 큰일이니, 차라리 자신이 불안감을 가슴에 품는 게 낫다고 생각한 거겠지.
“갑자기 뭐가 이렇게 빨라졌어?!”
악마의 목소리에서 다급함이 느껴졌다.
놈은 나름대로 휴마누스가 어디쯤 왔을 때 우리를 죽이기 시작하면 적당할지, 머릿속으로 계산해 두고 있었을 거다.
그런데 최고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했던 휴마누스가 더 속력을 내자 당황했나 보다.
“세르펜스, 조금만 더 버텨요! 휴마누스가 금방 오겠대요!”
상황이 상황인지라 세르펜스가 통신 내용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나는 큰 목소리로 희망적인 소식을 전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정말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숨이 턱 막혔다.
“크윽···.”
세르펜스가 걱정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아주 가까이에서 분에 찬 신음이 들려왔다.
윈스톤이 당장에라도 악마에게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낮추고 무게 중심을 앞쪽에 실었다.
그러나 쾅쾅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기만 할 뿐.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가지는 않았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세르펜스도 겨우겨우 버티고 있을 뿐인데, 저런 공격이 우리 중 누군가에게로 향하면 어떻게 되겠어?’
리에나의 결계라면 아주 잠깐은 견딜 수 있겠지만, 나머지는 어림도 없다. 절대로 무사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건 세르펜스가 더 잘 알겠지.
악마의 어그로가 이쪽으로 튀는 순간, 세르펜스는 우리를 구하고자 결계를 걷고 밖으로 나올 테다.
그것이야말로 악마가 바라 마지않는 순간이다.
윈스톤이 억지로 두 발을 바닥에 붙이고 서서 핏발 선 눈으로 악마를 노려보았다.
푸로르는 윈스톤만큼 세르펜스와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동료로서 지금 이 상황이 분하다는 듯 이를 뿌득뿌득 갈아댔다.
에드나는 힘겹게 버티는 세르펜스를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통신기를 꽉 움켜잡으며 고개를 떨궜다.
그런 일행들의 모습이 못내 불안했는지, 리에나가 우리 모두를 감싼 결계에 신성력을 더 불어넣었다.
만약에라도 악마가 우리를 공격했을 때를 대비할 겸. 그리고 우리 중 누군가가 반사적으로 뛰쳐나가는 걸 막기 위해.
안팎으로 결계를 더 견고히 손본 걸 테다.
리에나는 침착하게 판단을 내렸으나, 가슴 앞에서 모아 잡은 두 손이 덜덜 떨리는 것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내가 느꼈던 무력감을 지금은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세르펜스의 결계는 대체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거미줄처럼 촘촘한 금이 가 있었다.
신성력에도 한계가 찾아왔는지 입가에 한 줄기 선혈이 흘렀다.
그 피를 목격한 악마의 얼굴에 환희가 떠올랐다.
“흐하하하하!! 이제 곧 끝이구나! 네가 죽고 나면 다른 인간들이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지. 아, 밖에 있는 것 중 하나는 엘프인가? 운 좋게 건물에 들어오지 않았으니, 그냥 도망쳐도 될 것을. 참 어리석군, 어리석어!”
“으읏···.”
“신의 사자를 고문하는 건 상상만 해도 짜릿하네. 감히 나를 희롱하고 마신 테네브리오 님을 모욕한 그 입에서는 어떤 비명이 나올까?”
“흣, 흐윽···!”
빌어먹을 악마 놈이 세르펜스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고자, 일부러 녀석이 절망할 만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세르펜스가 울고 있는데 손을 잡아주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다니.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게, 그 어느 때보다 괴로웠다.
하지만 에드나처럼 고개를 돌릴 수는 없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내가 잠시 시선을 돌린 사이 녀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까 봐.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불안했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은빛 결계의 갈라진 틈새에 하얀 빛이 채워져 균열을 메꾼 것이다.
얼핏 보면 비슷한 색이라 착각한 건가 싶어 눈을 잠깐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눈동자를 살짝 굴리니 당혹으로 물든 악마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잘못 본 게 아니라는 뜻이다.
“리에나, 혹시···?”
“저 아니에요.”
질문을 채 끝맺지도 않았는데 리에나로부터 답변이 돌아왔다.
백색의 신성력 하면 떠오르는 게 리에나라서 혹시나 했건만,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이단 심문관인 테일러가 세르펜스를 돕고 있는 건가 싶었으나, 창문 너머에서 날아온 단검에 실린 신성력은 금색이었다.
마지막으로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지만.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악숭 사제가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하이마 님···. 제발, 제발···!”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사제는 악마가 씌워준 피의 장막 안에서 놈을 응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깨지기 일보 직전의 은빛 결계를 이어 붙인 사람은 대체 누구지?’
룩스메아가 세르펜스를 도와주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볼타 산맥의 결계를 펼칠 때. 그리고 세계수를 치료했을 때 보았던 룩스메아의 힘은 오색찬란한 빛이었다.
게다가 기적처럼 나타난 백색의 신성력은 신의 힘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했다.
나타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미약한 힘이 악마의 여유를 앗아갔다.
휴마누스는 아니마를 산 한복판에 버리고 오면서까지 속력을 올렸고, 의문의 백색 신성력이 나타나 깨져가는 세르펜스의 결계를 붙들었다.
그 결과 악마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초조함이 떠올랐다.
“이대로라면 성검의 주인이 먼저 도착할지도···. 아니야, 그래도 프라시더스는 힘을 다해가니 합공을 당할 일은 없겠지. 하지만 이 백색 신성력이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갑자기 강해지면···.”
그렇게 번민에 시달리던 악마 놈이 대체 무슨 생각을 떠올린 건지, 돌연 입술을 양옆으로 쭈욱 늘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사악하다는 표현이 지나치리만큼 잘 어울리는 웃음이다.
“어쩔 수 없으니 확실히 죽일 수 있는 인간들을 먼저 처리해서 피를 더 흡수해야겠구나!”
큰 소리로 외치며 악마는 세르펜스의 결계를 두드리던 망토를 거두어들였다.
그 말에 놀란 세르펜스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을 크게 떴다.
악마는 녀석더러 보란 듯이 우리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붉은 쐐기의 끝 부분이 이번에는 리에나가 만들어낸 결계를 내리찍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그 한 번의 충격으로 리에나가 단단히 대비한 결계에 선명한 균열이 생겼다.
리에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서둘러 결계를 복구했다.
그러나 또다시 쐐기가 내리꽂히자 기껏 메꿨던 균열이 도로 갈라져 버렸다.
심지어 처음 생겼던 균열보다 더 커진 것 같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결계 너머로, 세르펜스가 검을 움켜쥐고 악마에게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가느다란 검에 깃든 은빛은 무척이나 희미하여 금방이라도 꺼져버릴 듯했다.
“잡았다.”
희열에 찬 악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에나의 결계를 두드려대던 쐐기가 꿀렁거리며 피의 파도로 화하여 세르펜스를 덮쳤다.
그러고는 녀석이 꼼짝달싹 못 하도록 몸을 고치처럼 둘러쌌다.
대체 얼마나 억세게 죄고 있는 건지 세르펜스가 ‘읏···!’ 하고 신음을 흘리며 검을 놓쳤다.
– 툭.
바닥에 깔린 두툼한 카펫 위로 세르펜스의 검이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우리는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무언가 소리라도 내면 그것을 신호로 삼아 악마가 세르펜스를 죽여버릴까 봐.
그렇게 모두가 굳어있는 순간.
– 콰아앙!!
금빛 선이 눈앞을 휙 지나가는가 싶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구석에 모아 뒀던 가구들 사이에 처박혔다.
그 금빛의 정체는 급하게 날아오느라 추진력을 제어하지 못한 휴마누스였다.
휴마누스가 부서진 가구 잔해 속에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아직 안 늦었지?!”
“일단 절반 정도는?”
“어?! 어엇···.”
내 대답에 휴마누스가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악마에게 붙잡힌 세르펜스를 발견하고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딴 식으로 등장할 거면 가구가 아니라 악마 놈에게 부딪힐 것이지.
순간 울컥했으나 휴마누스는 잘못이 없다. 오히려 그는 최선을 다 했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휴마누스를 먼 곳에 대기시켜두는 작전 따윈, 절대로 진행하지 않을 거야. 악마가 도망가든 말든, 알게 뭐람? 누가 그딴 작전을 제시하면 제출한 작전 계획서로 뺨을 후려갈겨 주겠어!’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억지로 참아내며 세니어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일단 악마의 손에서 세르펜스를 무사히 구출해 내야 다짐을 지키든 말든 할 수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아니다, 시온. 뭔가 좋은 생각 없어?”
“지금은 딱히···.”
휴마누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이 정말 답도 없는 막막한 상황이라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건지, 세르펜스가 적에게 잡혀서 머리가 굳어버린 건지.
어느 쪽인지 모르겠지만, 머릿속이 백지처럼 새하얘서 자꾸만 정신이 멍해졌다.
“이, 일단···. 악마가 세르펜스를 당장 죽이지 않는 걸 보면, 인질로 삼기로 한 것 같은데···. 아, 이건 너무 뻔한 얘긴가?”
싸우느라 정신없는 일행들을 대신해서, 열심히 머리라도 굴려야 하지 않겠냐고 떠들어 댄 게 불과 몇 분 전이다.
아니, 몇십 분 전이던가? 시간 단위로는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휴마누스를 기다리던 일분일초가 너무나도 길게 느껴져서 잘 모르겠다.
지금 그딴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그냥 넘어가자.
“크흐···. 아슬아슬했지만, 결국 계획대로 되었군. 비록 바꾸기 전의 계획이라지만, 본래의 계획이기도 했으니까.”
“계획?”
“휴마누스가 도착한 타이밍에 맞춰 세르펜스를 죽일 거라고 했어요.”
악마가 웃으며 지껄이는 소리에 휴마누스가 의문을 표했고, 나는 그 계획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었다.
휴마누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대로 악마의 미소는 짙어졌다.
“성검의 주인이여. 친우를 구하고 싶나?”
“그야 당연하잖아.”
“그렇다면 성검을 버려라!”
아무래도 악마 놈은 날로 먹고 싶은 모양이다.
성검의 주인인 휴마누스와 싸우려면 여러모로 피곤해지니까. 쉽게 쉽게 가려는 거겠지.
‘휴마누스가 성검을 버리든 말든, 어차피 세르펜스를 죽일 거면서···!’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내뱉지 않았다.
악마가 세르펜스를 살려줄 리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악마가 세르펜스의 숨을 곧장 끊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놈의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다.
힘없이 축 늘어진 채, 악마에게 붙잡혀 나를 바라보는 세르펜스의 두 눈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려달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나를 걱정하는 눈이다.
“시온.”
“···네.”
“야, 너!”
“네?”
갑자기 휴마누스가 아니마처럼 나를 불렀다.
얼떨결에 세르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휴마누스를 바라보니, 잔뜩 찡그려진 미간이 눈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살짝 옅어졌다.
“미리 사과할게. 미안해.”
지금 이 상황에 갑자기 사과라니.
손이 덜덜 떨리고 전신에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분 좋다는 듯 악마가 웃어대는 소리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응.”
휴마누스의 대답은 짧고 간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휴마누스가 세르펜스를 포기했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검의 주인] 속 휴마누스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의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했으니까.
어디 그뿐이랴?
최후의 최후까지 타락해버린 세르펜스를 놓지 못하여, 그에게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끊임없이 물었다.
게다가 1회차에서는 세르펜스를 대신하여, 성검의 주인으로서의 사명과 책임감을 짊어지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휴마누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흔들림 없이 굳건한 자색 눈동자가 나를 마주 보았다. 그의 단단한 표정이 뒤늦게 시야에 들어왔다.
결코 무언가를 포기한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그럼 사과는 어째서···, 아!’
알겠다. 휴마누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째서 내게 사과를 했는지.
나는 알아챈 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질끈 감고 입을 열었다.